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2화 (42/211)
  • 경쟁(4)

    이용호 팀장이 나간지 대략 5분쯤 흘렀을까. 그보다 최소 10년 이상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사내와 함께 돌아왔다.

    중장년치곤 다부진 체격에 강인해보이는 인상, 얼굴만 봐도 '나 아직 죽지 않았소'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타입의 인간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더 높은 직급의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래테크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신형석 부장입니다."

    "박한성입니다. 따로 직급은 없습니다."

    사실상 미래그룹과 통합된 상태나 다름없는 미래테크에서 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중에선 가장 급이 높다는 얘기다.

    '능력이든 정치질이든 미래그룹에서 부장이라는 직위까지 올라가려면 뭔가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는 권력자일수도 있고, 반대로 임원 승진을 거부하고 부장으로 남은 노련한 베테랑일 수도 있다.'

    내 개인적인 평가에 의하면 신형석은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일에 대한 열정은 있어보이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을 섣불리 탐할 것 같은 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단이 없는 것 같지는 않으니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치고 올라갈 기세가 엿보인다.

    고작 첫인상만으로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겠느냐마는, 나는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독종 중의 독종인 회사원 한 명을 십수년 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서로 가볍게 악수를 나눈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팀장인 이용호는 신형석의 옆에, 거래 대상인 나는 신형석의 맞은 편에.

    "우선 당사를 방문해주신 박한성 씨에 대해 미리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듣자하니 다른 기업보다 미래그룹을 가장 먼저 찾아오셨다지요? 그건 당사를 가장 먼저 염두해두고 있을 만큼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닙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작부터 '너도 미래그룹이 다른 기업보다 제값 잘 쳐줄 거라 생각해서 온 거잖아? 그러니까 가격좀 낮추자' 라는 뉘앙스로 운을 떼기에 선을 그었다.

    "호오, 그럼 박한성 씨가 미래그룹을 1순위 거래대상으로 선정한 것과는 별개로 심사요건이 있다는 말입니까?"

    "심사요건이라뇨.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제가 어떻게 대기업들을 일일이 분석하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대기업하면 미래그룹부터 떠올리는 게 정상이라는 의미죠. 쉽게 말해서 유명세가 남다르다는 겁니다."

    "확실히 미래그룹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요. 국가 안팎으로 유명한 것도 사실이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 속에 미래그룹이 섞이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니까요. 제가 말하고도 조금 쑥쓰럽군요 하하!"

    "인정합니다. 미래그룹은 대단하죠. 오죽하면 대한민국의 기둥이라고 불릴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둥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순간 신형석 부장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물론 다른 대기업들도 대단하지요. 미래그룹만큼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대단한 신기술을 선보이면서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해석 : 그래봤자 미래그룹은 못 이기는 거 알지? 제자리걸음만 하는 다른 기업들이랑 붙어먹느니 그냥 우리랑 붙어먹어라.

    "절대로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자리에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겠지요. 뭐든 할 수 있고,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신뢰를 나타내는 지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치열함은 없겠죠. 시장 경제에서 확고부동한 1위를 점했다는 건 누가 덤벼들어도 짓밟을 자신이 있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1위는 언제나 치열함이 부족해요."

    내 지적에 신형석은 한 방 얻어맞았다는 눈치였지만, 곧 반색하며 그게 어쨌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어차피 확고부동한 국내 대기업 1위는 미래그룹인데 네깟 놈이 뭐 어쩔 거냐는 의미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적이 많은 건 언제나 확고부동한 1위죠. 등 뒤에 칼 꽂을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거기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제 몸값은 얼마나 뛸까요?"

    1위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1위 아래에 있는 놈들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몸값은 상승하겠지.

    그러니까 1위가 먼저 내 몸값을 깎으려는 시도는 1위에게 오히려 독이 될 거라는 얘기다. 삼키면 좋은 약이지만, 섣불리 뱉으려 하면 무시할 수 없는 독.

    미래그룹이 뱉어낸 독을 다른 놈들이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제가 미래그룹을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저에 대한 평가가 가장 확실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래그룹이 그냥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하기만 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럼 제대로 찾아오신 게 맞습니다. 미래그룹만큼 인재 보는 안목을 자랑하는 기업은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라면 더더욱."

    신형석은 일단 한 발 물러났다. 상대가 일개 민간인(HR 직급)이라고 해서 기선제압부터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그럼 이제 미래그룹과 거래할 품목이 정확히 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대략적인 내용은 들었지만 역시 실물을 확인해보지 않으면 거래를 진행하기 힘듭니다."

    "물론이죠."

    나는 미리 스마트폰에 따로 저장해둔 짧은 동영상 파일을 재생해서 신형석의 앞으로 밀었다.

    매끄러운 책상을 타고 쭈우우욱 미끄러져간 스마트폰은 정확히 신형석의 손에 잡혔다. 다소 예의없는 행동이지만 그건 서로간에 수직적 관계가 성립할 때나 해당되는 얘기다. 나와 미래그룹은 아직 수직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이런 퍼포먼스도 필요하다.'

    나는 너희의 밑이 아니라, 너희와 평등한 파트너 관계라는 의사를 사소한 제스쳐에 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사용하면 역효과를 낳는다. 그 전에 내가 한 두 가지 비밀을 품고 있으며, 상대가 나를 섣불리 무시할 수 없게끔 약을 쳐둬야 한다.

    나는 이미 이용호 팀장에게 약을 쳐뒀고, 내게 선입견을 품은 이용호 팀장이 상사인 신형석 부장에게 지극히 '주관적'인 나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즉 처음부터 이 자리에 나와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신형석 부장은 이미 내가 짜놓은 판에 걸려들었다는 얘기다.

    "이건......?"

    "일단 보시면 압니다."

    내가 말한대로 신형석과 이용호는 뚫어져라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동영상 파일은 1분 남짓한 짧은 분량이다.

    하지만 고작 1분이라는 동영상 파일 속에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쏴! 쏴버려!

    -젠장, 저 놈들 왜 안 죽는 거야?!

    -머리를 쏘라고 했잖아 병신아!

    -저렇게 움직이는 놈들의 머리를 어떻게 쏘......!

    -간격! 간격 유지해 씨발!

    짧막한 총격전. 내용은 충격적.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린 두 사람은 동영상이 끝나자마자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뭡니까?"

    "지금 미래그룹에 가장 필요한 정보입니다."

    스마트폰을 돌려받은 나는 USB를 흔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원본 파일이 담겨있습니다. 미래그룹이라면 동영상이 조작되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겠죠?"

    "......"

    이용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신형석은 턱에 손을 괸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정말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제가 미래그룹에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인간이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미래그룹의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혹은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래그룹의 힘이 필요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어느쪽이든 미래그룹은 구미가 당길 것이다. 당기지 않곤 못 배기지. 이 시국에 사람들이 어떻게 지상으로 나갔는지는 둘째치고, 지상 데이터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물건을 되찾아야 한다는 조바심도 있을 테니까.

    갑작스럽게 흑야 사태가 벌어지고 부랴부랴 피난한 마당에, 정말로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모든 자산을 바리바리 싸들고 지저 도시로 들어왔을까? 천만의 말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건물의 서버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기밀 자료, 연구소에 널브러진 청사진과 설계도, 온갖 신기술이 집약된 시제품 등등.

    기업들도 지상에서 원하는 게 있는 거다.

    "이 USB는 그냥 드리겠습니다. 미래그룹에서 먼저 분석해보신 다음에 저와 거래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 연락주세요."

    내 개인 연락처도 USB 안에 동봉되어 있다. 아마 이들은 부랴부랴 영상의 진위여부를 확인해본다음 내부회의를 거치고, 높으신 분들께 허가를 받아 내게 연락하겠지.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메긴 몸값을 부르면 된다. 이들은 내가 부른 몸값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

    "오늘은 서로간에 좋은 만남을 가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여기서 더 여지를 주지 않고 깔끔하게 퇴장.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말을 움직일지 말지 선택하는 건 저들의 몫이다.

    *  *  *

    동부 지구에서 돌아온 나는 남부 지구의 엘리베이터를 지키고 있는 군 부대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현재 정부와 군, 그리고 기업이 집중적으로 감시하면서 관리하고 있는 곳은 서부와 동부 뿐이다. 서부에선 식량 및 식수 확보, 동부에선 산업 기반 시설과 산업용 원자재, 그리고 차세대 기술 정립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북부 지구는 대다수의 서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서민거주 지역 겸 상업구로 진화중이고, 남부 지구는 VIP와 그들의 친인척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쾌적한 거주구로 유지되고 있다.

    북부 지구와 엘리베이터는 이미 민간인과 군의 합작으로 먹어치웠으니 별 문제 없다. 앞으로도 특별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쭉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 지구는 어떨까?

    입주 첫날의 '그 사건' 이후로 군대의 경계가 한층 강화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남부 지구의 군인들은 할 일이 없다.

    군인들과 남부 지구 거주민들의 생활 양식이 천지차이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남부 지구는 평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거주민들이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니 군이 치안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남부 지구에 주둔하는 군 부대는 VIP와 그 친인척들을 지키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음에도, 막상 할 일이 없어서 따분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그런 건 다 제쳐두고 북부 지구에 주둔중인 군 부대와 대우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게 진짜 문제겠지.'

    남부 지구 군 부대는 100% 배급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다. 북부 지구 군 부대처럼 밀수조직이 큰 거 하나 물어오면 가장 먼저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부 지구는 블루 오션이다. VIP와 그 친인척들만 거주하는 성역 같은 지역이라 누구 하나 건드릴 생각을 못 할 뿐,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금싸라기 땅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통해 격벽을 나오면 우리는 항상 도봉구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남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통해 격벽을 나오면 종로구와 성북구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구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고, 나중에 기업이 의뢰할지도 모르는 일을 수행할 때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

    지금이야 아직 도봉구를 다 털지 못 해서 밀수조직들의 벌이가 괜찮지만, 12시간이라는 제한 시간 내에 물자를 확보할 수 없을 만큼 도봉구를 털게 되면 그때부터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필요하면 제한 시간을 넘기고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이나 바깥에서 머무르며 밀수를 해야할 수도 있다. 나야 상관없지만 대다수의 밀수조직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거부하려들겠지.

    그때 우리는 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루트를 확보하지 못하면 밀수도 못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벽을.

    "우리 아파트 부녀회 맴버 중에서 남부 지구 군 부대 관계자를 남편으로 둔 사람이 있었지."

    바깥 사람은 휘두르려면 안쪽 사람부터 공략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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