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1화 (41/211)
  • 경쟁(3)

    누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거든 미래그룹을 보게 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적이 있는 것 같은 이 캐치프레이즈는 실제로 미래그룹이 예전부터 꾸준히 사용해왔었다.

    그건 어디서 나온 대단한 자신감이냐고 비아냥대면 미래그룹은 불필요한 논쟁을 하는 대신 그냥 대단한 기술 공개로 맞받아쳤다.

    완전자율주행 AI가 탑재된 무인차량부터 끔찍할 정도로 대단한 반도체 기술, 한국인의 손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고성능 스마트폰, 스마트글라스를 사용한 증강현실(AR) 기술까지.

    못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는 기업. 디그러쉬만 아니었다면 지저 도시 개발 프로젝트에서 당당히 주축으로 자리잡았을 테지.

    물론 미래그룹이라고 해서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매콤한 맛 K-대기업답게 사고도 많이 쳤다. 노동자 착취, 노조 탄압, 갑질, 오너 일가 마약 투여 사건이나 음주운전까지 일일이 세자면 손가락이 모자라다.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전형적인 K-대기업을 상대로 나는 지금부터 영업을 해야 한다. 영업사원이었던 적은 없지만.

    "관계자가 아닌 모든 외부인은 의무적으로 본인의 신분과 당사 방문 목적을 밝혀야 합니다."

    미래그룹 산하의 경비업체 소속 경비원이 전용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채 내 접근을 제지했다. 딱딱한 어조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해석하면 그냥 군소리말고 직급카드부터 내놓으라는 뜻이다.

    "박한성입니다."

    HR(인적자원) 코드가 새겨진 카드를 내밀자 입구 검색대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의아한 얼굴로 나와 카드를 번갈아보았다.

    내가 외부인인 것은 둘째치고, 사실상 개돼지나 다름없는 HR 직급을 가진 놈이 대체 미래그룹 지저도시 지부(사실상 본사)에는 대체 무슨 볼일인가 싶겠지.

    "혹시 미리 방문 예약을 하고 오셨습니까?"

    "아뇨."

    "...그럼 당사에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뇨."

    "대체 왜 온 겁니까?"

    자기가 물어보고도 참 어이가 없었는지 젊은 경비원은 내게 인상을 팍 썼다.

    반쯤 계급 사회로 돌아선 지저 도시라면 HR 직급이 이런 대우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내가 사고라도 칠까봐 염려하는 것이 경비원의 당연한 본분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좀 있어서요."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의 대충 팀장 직위 정도 되는 사람이요."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낫겠습니다. 피차 이런 곳에서 서로 문제 일으키지 맙시다."

    "에이, 제가 지금 돌아가면 큰일날 텐데요. 최소한 확인이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가 검색대 옆에 위치한 사내 인터폰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경비원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비웃었다.

    "방금 본인 입으로 당사에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괜히 일하느라 바쁘신 분께 전화를 걸어서 알아보라고요? 제가 미쳤습니까?"

    "그럼 직장인들 퇴근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려야겠네요. 이왕 기다리는 김에 미래그룹에게 돌아가야 할 귀중한 물건을 경비원의 문전박대로 디그러쉬에 갖다줘야겠다면서 1인 시위도 하고."

    "아니, 그건......!"

    "왜요? 1인 시위는 불법 아니잖아요? 아니면 건물 안에 들어오지도 않은 1인 시위자를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경비원이 무력으로 제압하기라도 하시려고요?"

    "아니 진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제가 뭐가 됩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십시오!"

    "그러니까 한 번만 확인해줘요. 사내전화 한 번만 쓰면 되잖아요? 디그러쉬의 중역 '박한화'의 아들 '박한성'이 지금 미래그룹 본사 앞에 찾아왔다고."

    "!"

    그는 그제야 내 직급카드에 작게 쓰인 거주지 주소를 살폈다. 보나마나 북부 지구 거주민일 거라 생각했던 내 거주지는 남부 지구로 찍혀 있었다.

    남부 지구는 VIP, 그리고 VIP의 친인척들만 거주할 수 있는 특별 거주구역이다. 막말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병신이라고 해도 VIP의 친인척이기만 하면 남부 지구에 거주할 자격이 된다.

    "시, 실례했습니다!"

    딱히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남부 지구 거주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비원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그는 서둘러 사내전화로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에 연락을 넣어, 현재 나와 만날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주었다.

    예상했던대로 몇몇 사람들이 나를 당장 만나겠다는 답변을 해왔고, 나는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미래그룹의 총수나 부회장, 혹은 전략기획실의 실장처럼 굉장히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하다. 아직 내가 그정도 '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정보의 가치는 분명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과 독대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하찮았다. 디그러쉬의 중역인 박한화의 아들인 게 뭐 어떻다고? 그냥 HR 직급 민간인인데.

    디그러쉬에 다니지도 않는 놈이 디그러쉬의 기밀 자료라도 훔쳐나왔을까봐? 택도 없는 소리. 아버지는 절대로 집에 일거리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매일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한다. 3일마다 한 번씩 새벽 일찍 나서고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는 나와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설령 내가 디그러쉬의 기밀 자료를 빼왔다고한들, 내 주장에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만나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우선은 내 몸값부터 높여야 한다.

    "박한성 씨 되십니까?"

    "예. 그쪽이......?"

    "미래그룹 산하 미래테크의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 1팀장 이용호 입니다."

    갑작스럽게 지저 도시로 입주하면서 미처 계열사 건물이 준비되지 않은 탓에 계열사 소속 직원들도 임시로 미래그룹 본사에서 일하는 모양이다. 나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 부서를 콕 집어 말한 것이고.

    "일단 이동하실까요?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하하!"

    "얘기가 빠르면 저야 좋죠."

    빈 회의실 하나를 적당히 골라잡은 우리는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면서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디그러쉬에서 알아주는 그 박한화 씨의 아드님 되시는 분이 미래그룹에는 어떤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말했듯이 미래그룹에게 돌아가야할 중요한 물건이 있어서요."

    나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USB를 꺼내보였다. 이용호 팀장은 내가 보는 것도 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대뜸 USB를 꺼내들면 당연히 중요한 기밀자료 같은 게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법이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디그러쉬에 관한 정보입니까?"

    "저는 미래그룹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이라고 답한 것 같은데요."

    내 말의 의미를 곱씹던 이용호 팀장은 곧 눈을 크게 떴다. 디그러쉬에게 아직 돌아가지 않은 무언가, 미래그룹에게 돌아가야할 무언가.

    어쩌면 경쟁사인 디그러쉬의 내부자료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용호 팀장은 눈을 껌뻑였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아직 그 어떤 기업도,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조차 손에 넣지 못한 귀중한 정보가 이 USB에 담겨 있죠. 그리고 저는 이 정보에 적당한 값을 쳐줄만한 상대를 찾아다니고 있어요."

    은연중에 그 첫 번째 대상이 미래그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서 물꼬를 텄다.

    "기업도, 정부도 모르는 정보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정보인지에 따라 가격은 천지차이입니다. 일개 팀장인 제가 그 가격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용호 팀장님의 상사를 거쳐, 미래그룹의 더 높으신 분께 이 정보에 대한 가치를 확인받으실 수는 있잖아요?"

    "그건...그렇습니다."

    이런 대기업에서 팀장 정도 되면 자신의 상사에게 곧바로 직언(보고)을 올려서 즉각 조치할 수 있다.

    그래. 나는 팀장급과 거래를 하려는 게 아니라 팀장급을 메신저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들어보시죠. 제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지 윗분들에게 설명하려면 일단 들어보셔야 하니까요."

    "확실히 궁금하긴 합니다. 대체 어떤 정보입니까?"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후에 얻은 지상 데이터."

    "!"

    "당장은 먼 이야기겠지만 인류가 언제까지고 지저 도시에만 처박혀 있으리란 보장은 없죠. 오히려 뒤바뀐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 미래그룹도 야심찬 계획을 준비중이겠죠? 예를 들어 차세대 엑소스켈레톤 개발이라던가, 험지 주파와 작업이 동시에 가능한 다용도 차량이라던가, 외부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신소재 개발이라던가."

    "......"

    정곡을 찔렀던 걸까?

    사실 '차세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미래그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와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지하 12km의 지저 세계도 물론 매력적인 환경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곳은 인류가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되어 있다 싶을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다.

    태양이 없어서 모든 식물을 인공 조명으로 키우고, 대량의 물을 써야 한다. 여기에 낭비되는 전력과 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급에 차질을 빚겠지.

    인류는 지상에 일궈놨지만 어쩔 수 없이 두고와야했던 수많은 인프라와 기술을 필요로 한다. 자신들의 기술 개발에 길잡이가 되어줄 현장 데이터는 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사막을 쌩쌩 달리는 차량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막에 대한 모든 현장 데이터가 필요한 것처럼.

    "지저 도시는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안정화 되고, 어떻게든 발전해나갈 겁니다. 하지만 지상과 같은 우수한 인프라를 완벽하게 구축하려면 못해도 수십 년은 걸리겠죠."

    언젠가는 정부와 군, 그리고 기업이 지상과 지저 도시를 완벽하게 잇는 통로를 구축할 것이다. 0에서부터 100을 만드는 것보다 두고온 100을 가져오는 게 더 편하니까.

    그런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바로 지상 데이터다.

    "참고로 저는 미래그룹 다음으로 산화그룹, 태호그룹까지 찾아갈 생각이에요. 국내 기업들이 모두 이걸 거절한다면...결국 디그러쉬까지 찾아가게 되겠죠?"

    "그건......!"

    당황한 탓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이용호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당당히 찾아온 내가 금방 들통날 게 뻔한 가짜 정보를 가져왔을리가 없을테니, 결국 내 손에 있는 USB가 진짜배기라면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자신들이 못 가지는 건 둘째치고 그 귀한 정보가 디그러쉬에게 넘어간다면 미래그룹은 또 한 번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올 때 빼앗겼던 기회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갈 때도 빼앗기는 대기업이라니. 평생 2인자라고 놀림받아도 할 말이 없다.

    "정보의 경중에 따라 미래그룹에서 제시하게될 금액이 달라질 겁니다. 그 점은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것까지 모르고 여기에 찾아오는 바보는 없죠."

    내 대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용호는 곧바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마 사내전화를 써서 자신보다 더 높은 직급의 사람들에게 줄줄이 보고하고, 행동 지침을 받아올 것이다.

    여차하면 이용호 팀장이 아니라 더 높은 직급의 사람이 직접 거래를 담당하기 위해 찾아오겠지. 그런 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다.

    '미래그룹에서 뭘 뜯어내야 할지 고민이군.'

    내가 가진 지상 데이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엄청난 리스크가 있지만 국내에서 알아주는 대기업과 붙어먹으려면 오히려 그정도는 싸게 먹히는 편이다.

    "조용히 살기 참 힘들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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