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0화 (40/211)
  • 경쟁(2)

    지저 도시의 참담한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인류에게 미래따윈 없다며 자조할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차고 넘치지만 하나같이 부족한 것들 뿐이라 윗분들이고 아랫놈들이고 죄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

    정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서부와 동부 지구에 집중적인 투자 및 개발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서부의 인공 곡창지대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약 90일 안에 대량 수확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지저 도시에 새롭게 자리잡은 방송국에서 그 사실을 각 지구에 전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겠지.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아름답지만 않다는 걸 모두가 안다.

    식량의 대량 수확이 가능해졌다고한들 일부는 씨종자로 남겨두고, 또 일부는 가축의 먹이로 돌아갈 것이다. 나머지는 정부가 모두 거둬들여서 배급제로 조금씩 풀겠지. 서민들의 식탁이 아주 조금 더 다채로워지는 것 빼곤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예정이다.

    나는 지친 몸을 달랠 겸, 집구석에 처박혀서 펜대를 굴려가며 대략적인 로드맵을 그렸다. 원래 로드맵이란 건 상황이 어려울수록 짜기 쉽다. 당장 뭐가 급한지 척 보면 알기 때문이다.

    현재 지저 도시는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도시를 운용하고 개발하기엔 충분한 인구가 모여 있지만, 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 비축량이 생각 이상으로 적었던 것이다.

    우리같은 밀수범이 단순한 밀수범에서 끝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려면 철저하게 약점을 공략해야 한다. 이 도시가 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목에 쉽사리 칼을 들이대지 못하는 그런 약점을.

    그래서 지저 도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품목들을 정리 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식료품 : 지저 도시에서 식량을 가진 자가 곧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 만큼 부족하다.

    2. 생필품 : 삶의 질을 어느정도 낮출 각오가 되어있다면 당장 부족하진 않다. 하지만 자신이 문명인이라는 것을 꼭 증명해야겠다고 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3. 의약품 : 식료품보다 더 부족하다. 정부기관과 기업들이 직접 관리하는 몇몇 의료시설에 방문해도 의약품이 굉장히 비싸거나 부족해서 치료를 못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4. 원자재 : 이건 지저 도시 건설에 착공했을 때부터 정부와 기업이 대량으로 들여놓은 것이 많아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지속적인 지저 세계 개발과 채광, 제련, 가공 덕분에 원자재는 앞으로도 썩어넘칠 것이다.

    5. 유류 : 기름을 필요로 하는 시설이나 설비, 혹은 장치 같은 것들은 빠르게 전력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아마 부족할 것이다.

    나는 1번부터 3번까지 동그라미를 쳤다.

    4번과 5번은 굳이 우리같은 밀수조직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4~5번은 밀수조직이 가지고 올 수 있는 양에 비해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지저 도시의 식량 사정이 나아지려면 아무리 빨라도 3년은 걸릴 테지. 원자재가 공급되고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생필품도 자연스럽게 시장에 풀릴 것이다.

    밀수조직이 식료품과 생필품으로 먹고 사는 것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거다. 의약품은 수도권의 병원들을 이잡듯이 뒤지면 그보다 좀 더 여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독자적인 발전이야.'

    1번부터 3번을 한데 묶어 '발전'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시켰다.

    밀수조직이 밀수조직으로 끝나지 않고, 서민이 서민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 체제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때마침 정부의 2030 프로젝트 덕분에 지저 도시의 토목업과 건설업은 호황을 맞고 있다. 우린 남들보다 비교적 여유로운 자금(밀수)과 인력(북부 지구 거주민)을 이용해 슬쩍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외관만 놓고 보면 지저 도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비칠테니 정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도 쉽게 피할 수 있을 거야.'

    급작스러운 비상시국이라 정부는 지저 도시로 숨어들어온지 11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지저 도시의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지상에서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부동산'이다.

    '개인, 혹은 민간단체가 지저 도시를 빠져나가 미개척지대를 멋대로 개척한다고 해도 정부가 제재할 방법은 없어.'

    지상이야 각자 땅 주인이 정해져있었으니 사유지를 침범하는 것 만으로도 불법이겠지만 지저 세계는 아니다.

    한반도 지하 12km에 있는 공간이니까 엄연히 대한민국 정부가 주인이라고? 그건 지저 도시가 아니라 지저 국가를 세웠을 때나 통할 법한 헛소리다.

    북부 지구 외곽 경계를 지키고 있는 군 부대와 적당히 붙어먹고, 인력과 원자재, 중장비를 바깥으로 내보내서 몰래 개척하면 문제될 것 없다.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에 반발하면 정부에서 발표한 2030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며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고, 혹 정부에서 눈치챈다고 해도 우리가 2030 프로젝트를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일테니 문제 없다.

    '지저 도시의 식량 사정이 한결 나아지면 정부는 도시의 발전을 위해 지상의 생존자들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일 거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민간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상업 지구를 만들어야 해.'

    동부 지구와 달리 북부 지구가 독자적으로 뭔가를 개발한다고 한들, 대규모 공장이나 연구소를 운용할만한 여유는 없으니까. 대신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신성불가침영역 같은 상업 지구를 만드는 게 목표다.

    '그렇게 되면 최종적으로 민심은 북부 지구 편이지. 있을 거 다 있고, 즐길 거 다 즐길 수 있고, 심지어 외부의 감시나 억압, 개입도 어느정도 피할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가 될 테니까.'

    치안이나 위생 문제가 조금 곤란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신경쓰면 된다.

    "일단 필요한 것부터 구해야겠는데......"

    나는 지금까지 내가 모은 지상 데이터의 복사본을 중요도에 따라 각기다른 USB에 저장해두었다. 원본은 항상 내가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있고.

    중요한 건 누구에게, 어느 수준의 데이터를, 얼마에 파느냐는 것이다.

    현물과 달리 귀한 정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들이 꼭 있다. 정보기관의 요원이나 수장, 혹은 대기업의 중직, 정보거래를 업으로 삼는 조직, 그리고 특종만 찾아다니는 기자들.

    모두 자신들의 신분과 상황에 따라 원하는 정보가 각양각색인데다 정보에 대한 보수도 천차만별인 족속들이다. 당연히 나또한 상황에 따라 정보 판매 대상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처음 공략해야 하는 건 어느쪽이지? 정부? 기업? 조직? 개인?

    손 위에서 룰렛처럼 쌩쌩 돌아가고 있던 펜대의 움직임이 멎은 순간, 펜대의 끝이 향한 곳은 기업이었다.

    지저 도시에서 기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디그러쉬.

    지상에선 전세계를 아우를 만큼 대단한 채굴, 채광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에 걸맞는 중장비도 여럿 가지고 있다. 특허만으로도 뽑아먹는 돈이 천문한적이라고 평가받고 글로벌 공룡 기업이다.

    '하지만 첫 공략 대상으로는 최악이지.'

    언뜻 보면 이름값 하는 회사답게 귀한 정보를 비싼 값에 사줄 것 같지만 디그러쉬는 외국계 기업이다. DR-5 직급을 부여받아 디그러쉬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여동생에게 사내 분위기를 알아보게 한 결과, 굉장히 경직된 분위기라고 한다.

    철저하게 능력만 보는 집단이면서도 특출난 능력 하나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직장.

    여동생은 디그러쉬 본사를 발톱을 숨긴 맹수들이 득시글대는 동물원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맹수들조차 보이지 않는 사육사들에게 속박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치 우리 가족처럼.

    '디그러쉬가 가장 괜찮은 거래를 해줄 기업은 맞지만, 그것도 급이 되는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야. 국내 기업중 아직 지저 도시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기업 위주로 공략하는 게 좋겠어.'

    여동생은 아직도 근무중, 어머니는 내가 공략한 부녀회에 들어가시면서 조금씩 분위기를 휘어잡고 계신다.

    아버지가 디그러쉬의 중책이니 국가 공인 VIP, 나는 남부 지구에서 유일하게 생필품과 사치품을 비밀리에 공급해주고 있으니 남부 지구 공인 VIP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위상이 높아질수밖에.

    이걸로 최소한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상대적 박탈감과 스트레스를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거다.

    "계획을 세웠으면 실행에 옮겨야지."

    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정기적으로 지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셔틀 버스를 잡아탔다.

    지상에서도 이미 수도권에 한해서 제한적으로 운용중이었던 완전자율주행 시스템이 탑재된 무인 셔틀버스. 놀랍게도 외국제가 아니라 순도 100% 국산이다.

    중공업부터 반도체(하드웨어), 게다가 소프트웨어 기술까지 탁월한 성과를 자랑하는 국내 대표 기업중 하나인 미래그룹의 작품이었다. 디그러쉬에 밀려 지저 도시 개발의 주축이 되진 못 했지만 그 외의 분야라면 자신있게 가슴을 펼 수 있는 기업이다.

    미래그룹과 비슷한 기업들도 몇 있지만, 나는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저 도시에 신기술의 패러다임을 불러일으킬 예정이었던 미래그룹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엑소스켈레톤, 완전자율주행차량, 지저 도시 전역을 아우르는 최신예 보안 시스템 등등 미래그룹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니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값을 치러줄 것이다.

    당장 지저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직급카드만 해도 미래그룹에서 개발한 물건이다. 정부가 그걸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애초에 미래그룹은 디그러쉬에게 이래저래 맺힌 게 많을테니, 내가 디그러쉬에게 넘기지 않은 정보를 미래그룹에게 먼저 넘기고자 한다면 그들은 좋든 싫든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다음에 내리실 곳은 동부 지구입니다. 동부 지구를 처음 방문하시는 승객 여러분을 위해 주의사항을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미리 녹음된 안내절차가 차내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나왔다.

    -직급 카드를 잘 보이는 곳에 달아주십시오. 동부 지구는 관계자외 접근금지 및 무단촬영이 금지된 특수구역이 많습니다. 기업의 귀중한 자산, 혹은 정보의 가치를 훼손할 경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으니 관계자가 아닌 승객 여러분께서는 상시 본인의 직급카드를 내보여야 합니다.

    동부 지구에서 직급카드를 목덜미나 가슴에 걸어둬야 하는 이유는 뻔하다. 감시드론들이 실시간으로 해당 인물과 직급카드 정보를 대조하면서 관계자인지 부외자인지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공교롭게도 동부 지구 하늘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감시드론은 미래그룹이 아니라 디그러쉬의 작품인데, 이게 미래그룹의 작품인 직급카드와 시스템적으로 서로 맞물리면서 기술적 타협점을 찾느라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가진 제품들을 시스템적으로 연결(링크)하는 작업은 양측 모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테니까.

    '사람 냄새가 확 풍기는 북부 지구와 다르게 동부 지구는 딱 서울을 축소시켜놓은 것 같네.'

    북부 지구 특유의 활기가 동부 지구에선 음울한 노동자들의 끈기로 바뀌어 있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모양인지 너나할것 없이 동태 눈깔로 돌아다니는 영업직과 현장직. 그리고 지저 도시에서도 특유의 마천루를 자랑하는 고층 빌딩의 창문에선 자리에 앉아 일하는 사무직과 그런 노예들을 내려다보는 상급자들이 보였다.

    아마 지상이든 지저든 동부 지구의 인간들은 생활 양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신기하게도 기업들의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단 말이야.'

    일단 무조건 높고 깔끔해보이는 모던 양식의 고층 빌딩. 그런 빌딩에 출퇴근 도장을 찍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는 변태적 취향을 가진 노예들을 돈다발로 채찍질하며 부려먹는 것. 아마 이쪽 업계에선 꽤 잘나가는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닌자 20명이 갑자기 회장 모가지를 따고 회사를 대신 경영하는 것보단 훨씬 더 잘먹히는 래퍼토리지.'

    동부 지구의 경직된 분위기와 침체된 경제 활동을 뇌리에 똑똑이 새겨둔 나는 마침내 미래그룹 본사 앞에 당도했다.

    사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미래그룹 산하의 경비업체 취직을 고려하고 있었던 터라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아버지는 디그러쉬에, 아들은 미래그룹에 붙어먹으려 하다니. 부자가 쌍으로 참 잘하는 짓거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타고난 기질이 이런 것을.

    '말 잘 듣는 인형같은 아들 딸을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반골 기질이 없는 순진한 놈들로 낳으셨어야지.'

    얄궂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것은 DN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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