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38화 (38/211)
  • 나이트 시티(7)

    "씨발 새끼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지 않았더라면 수직으로 솟구친 촉수에 그대로 상반신이 꿰뚫릴 뻔 했다.

    몸을 비틀면서 옆으로 넘어질 때 아슬아슬하게 고글을 빗겨간 촉수의 표면은 굉장히 검고, 돌기가 많았다. 왜 튼튼한 나무가 부러지고 껍질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는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 현상이나 놈들의 생태, 독특한 사냥법 같은 걸 차분하게 관찰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드다다다다!

    촉수가 빠져나온 마룻바닥에 대고 적당히 탄환을 퍼부어준 다음 누운 자세로 불상을 박찼다.

    매끈매끈한 마룻바닥을 썰매처럼 이동한 나는 튕겨오르는 자세 그대로 장지문을 들이받았다.

    우지끈!

    예상대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장지문은 내 몸통박치기 한 방에 박살났다. 바깥 기온은 여전히 살인적이었다.

    사람 여럿이 기어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불당 아래의 빈 공간 속에선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굳이 불빛을 비출 필요도 없겠지.

    얼마 남지 않은 탄환을 여기서 죄다 퍼부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심장을 펌프질 했다. 완벽한 컨디션으로 전력질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상관없었다.

    이로써 나는 또 한 번 목숨을 담보로 걸고 귀중한 정보를 획득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

    '놈들은 인간을 지능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지능이 있다!'

    우리가 그동안 빛과 소음을 적절하게 이용해 놈들의 관심사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을 뿐, 기본적으로 놈들의 사냥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거기에 사냥감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반드시 빛과 소음만 쓰이는 것도 아니다!'

    나는 놈들이 공기중에 흩어진 진한 인간의 냄새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불당 안에 숨어 있었던 나의 열기(체온)까지 감지했을 가능성은 적으니, 남는 건 결국 냄새 뿐이다.

    일반인조차 타인의 땀냄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하물며 놈들이라고 내가 흩뿌린 땀냄새를 맡지 못 했을까? 오히려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땀냄새가 일종의 네비게이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빠르게 본원정사를 벗어난 나는 여전히 도심 속으로 숨어들어야할지 말지 고민하면서도 산길을 달렸다. 다행히 이곳은 북한산초입에 해당했기 때문에 길이 그렇게까지 가파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인 만큼 정비된 등산로나 인도가 드문드문 있었다.

    다시 야투경을 착용한 나는 네비게이션으로 확인했던 통일교육원 건물을 발견했다. 통일연구원 생활관, 연구 1관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미 불당에서 한 번 데인 나는 굳이 저런 장소에 숨어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저렇게 꽉 막힌 곳에 숨어들었다간 빼도박도 못하고 놈들에게 당할 것이다.

    '교육원이니까 미니셔틀버스 한 대 정돈 있을 거라는 편의주의적인 생각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차량 안 끌고나간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나는 차량을 찾는 헛수고를 하는 대신 교육원 부지를 열심히 내달려 입구 앞 편의점에 뛰어들었다. 후미진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편의점의 주 고객층이니 당연했다.

    "탈취제...탈취제......!"

    이미 누군가 한바탕 털고 간 편의점의 생필품 코너를 열심히 뒤지자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데오드란트 한 통을 발견했다. 페브릿~즈보다 땀냄새 제거에 탁월하며, 미국인들 90%가 사용하는 탈취제계의 전통 강자!

    "오늘 나는 상위 0.1% 한국인으로 거듭나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땀냄새가 덜나는 한국인이 데오드란트까지 쓴다면? 고수를 먹을 때마다 비누맛이 난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빼면 완벽한 이 DNA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바깥 기온이 영하 25도고 나발이고 당장 수영장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땀냄새를 지우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조...온나...차갑네......!"

    왠지 끈적거리는 것 같은 젤 형태의 데오드란트를 몸 곳곳에 치덕치덕 발라대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영하 25도는 지속적으로 내 체온을 뺏는다 > 체온이 뺏기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 움직이면 땀이 난다 > 땀냄새가 퍼지면 놈들에게 추적당하니 데오드란트를 써야 한다 > 데오드란트를 쓰면 춥다 > 1부터 반복

    '이거 사실상 무한동력발전기 아닌가?'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움직인 탓에 드디어 머리가 맛이 가버린 걸까. 조금도 웃기지 않은 농담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도심으로 뛰어들었다.

    놈들이 빛과 소음을 제외하고도 냄새를 이용해 타겟을 추적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편한 도보로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만약에.

    빛도, 소음도, 냄새도 발산하지 않은 내가 가만히 서있는다면 놈들은 지척에 있어도 날 알아볼 수 없을까?

    '...아니, 오늘 목숨은 걸 만큼 걸었어. 이 이상은 진짜 자살 행위다. 지상 데이터도 이미 충분히 모았고, 놈들의 추적을 뿌리칠 방법도 얻었으니 만족해야지.'

    아무리 귀하고 값진 정보가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한들, 그또한 정보를 가진 내가 살아서 이용할 수 있을 때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대량의 PC를 피해 방황하고 있는 나약한 USB에 불과하다.

    데이터를 업로드하고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서버, 데이터를 공유할 상대를 찾기 위한 인터넷(중개역), 그리고 내 데이터를 제값주고 살 유저가 있어야만 이 모든 헛짓거리에 의미가 생기는 거다.

    '내려올 때는 차량을 타고 내려왔는데, 올라갈 때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니.'

    버려두고온 차량에 아쉬움 한스푼, 데오드란트의 특유의 차갑고 끈적거리는 느낌에 불쾌감 한스푼, 그리고 김명호와 상도 아재가 제대로 일을 마무리 했는지에 대한 불안감 한 양동이.

    그 모든 난잡한 감정들을 상쾌한 데오드란트향 가슴 속에 품고 격벽으로 향했다.

    "어, 어! 저기 온다!"

    "이야! 저 친구 결국 살아왔구만!"

    "참 징한 친구일세. 그 난장판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보다 먼저 격벽에 도달한 차도식파와 공구리파는 3대의 구급차와 함께 격벽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격벽이 열리기까지 정확히 5분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강북구에서 도봉구로 올라오는 길에 혹시 모른 추적을 염려해 데오드란트 한 통을 거진 다 썼는데, 지금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쾌한 남자일 것이다.

    상쾌한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간신히 드럼통 앞에 도달한 나는 걸리적거리는 짐부터 벗어던졌다. 어차피 개인적으로 챙겨온 것도 없고 탄약도 거의 다 썼다. 체력보존을 위해 챙겨온 간식과 물도 다 마신지 오래다.

    지금은 그냥 따스한 불이나 쬐면서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었다.

    "...동생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잠깐 쉬게 내버려두자고. 숨 돌릴 틈은 줘야 할 것 아닌가?"

    눈치빠른 상도 아재가 내게 질문을 던지려던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내가 어둠에 잠긴 도시에서 지독한 추적에 시달리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고, 끝끝내 데오드란트를 치덕치덕 발라대는 동안 이들은 가볍게 나들이를 다녀온 것 같았다.

    뭐, 내가 자초했던 일이니 이들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나를 믿고 성패를 장담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와준 것을 고마워해야겠지.

    따스한 열기로 어느정도 체력을 되찾은 나는 김명호와 똘마니들을 불러 수확량을 확인했다.

    "의료진은 전원 무사구출했으며 대량의 의약품과 기본적인 의료기기를 확보했습니다. 또 이상학 병장과 김한솔 상병도 무사히 데려왔습니다."

    "잘 됐네요. 최소한 다른 조직들과 달리 우리 조직은 군인들 중 전사자가 없어서 군에 미운털 박힐 일은 없겠어요."

    정확히는 이상학 병장이 행동불능 상태이긴 하지만, 어쨌든 위험한 지상 작전에서 목숨만 붙여 데려온 게 어딘가?

    "그런데 이상학 병장의 상태는 확인해봤나요?"

    "일단 의사를 통해 확인하긴 했습니다. 여전히 외부 자극에 반응이 없는 혼수상태라고 합니다. 매 10분마다 체크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고......"

    "다행이네요."

    의사가 10분마다 직접 확인했다고 하니 이 이상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이제 우린 별다른 소득이 없는 다른 조직에 비해 최소 두 걸음은 더 앞서나가게 되었다.

    지저 도시에서 압도적으로 부족한 전문의약품 및 의료기기,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줄 빵빵한 의료진들까지 확보했다.

    지저 도시 입주 자격이 없는 외부인들은 지저 도시에서 불법체류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부에서 그들의 입주를 허가할리 만무하다. 우릴 따라온 의료진도 지저 도시의 현실을 알고나면 착잡한 기분이겠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분이 없으면 자신만의 계좌조차 가질 수 없는 지저 도시라도 불법체류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특히 의사나 간호사처럼 굉장히 귀한 고급인력이라면 더더욱.

    "현재 차도식파가 소유중인 건물이 몇 채죠?"

    "저번에 박한성 씨와 우리가 만났던 정비소를 제외하면 2층짜리 아지트와 3층짜리 상가 건물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작 두 번의 작전을 통해 떼돈을 벌어들인 차도식파는 지상에서도 항상 답이었던 부동산에 적극 투자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내게도 잘된 일이다.

    "의약품은 3대 7로 나누기로 이미 합의봤죠?"

    "예. 공구리파에서도 실질적으로 가져가는 물량은 자신들이 좀 더 많으니 만족하는 눈치였습니다. 오히려 의료진을 우리가 데려간다고 했을 때는 짐덩이를 가져가줘서 다행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지저 도시에 내려가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될 의료진을 당장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관리하는 건 매우 힘들죠. 공구리파도 다른 조직들처럼 조직원들 장비에 투자하느라 꽤 큰 돈을 썼을테니 여유가 없는 건 당연하겠죠."

    "차도식파는 이번 작전에서 획득한 의약품 3할과 의료기기를 확보한 것 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긴 합니다만, 불법체류자인 의료진을 관리하기 힘든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보살펴주는 값을 받아내야죠. 일반인한테 보호비 걷는 거 잘 하잖아요?"

    보호비라는 말에 김명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조폭들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보호비를 걷고 있다. 괜히 사태를 키우고 싶지 않은 일반인과 양심있게 소액만 챙기는 조폭들간의 암묵적인 합의 관계였다.

    "우리가 할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상가 건물 2층과 3층을 통째로 비워서 병원으로 써먹는 거죠. 치료비나 진료비는 우리 조직원들이 받아챙기고, 그 대신 의료진들의 의식주 및 개인이 원하는 사치품은 우리 조직이 어떻게든 구해주는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자는 거예요."

    "...불법 병원에 불법체류자를 쓰자는 겁니까? 들키기라도 했다간 파장이 클 겁니다."

    "북부 지구는 이미 암묵적인 합의 관계로 유지되고 있잖아요. 군대도, 민간인도, 우리같은 밀수조직도 모두 법을 어느정도 어겨야만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렇게라도 안 하면 지저 도시는 얼마 못 버틸 테니까요."

    김명호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완성인 지저 도시에 무려 수십만 명이 입주한 상태다. 그들 모두를 먹여살리려면 정부의 미적지근하고 형편없는 구제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불법이 불가피한데, 거기서 약간의 사적인 이득을 취한다고한들 대체 누가 우릴 비난할 수 있을까?

    "서울에 천 만 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든 건 병원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거기 있는 의약품은 대부분 의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을 테니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은 거들떠 보지도 않겠죠. 그러니 주기적으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확보해서 '차도식 병원'에 공급하고, 지저 도시 내에서도 별도의 수익을 챙겨야겠죠?"

    "...일리있습니다. 내려가는대로 도식이 형님께 건의해보겠습니다. 물론 형님이라면 당연히 차도식 병원을 만들 겁니다."

    나와 김명호는 구급차 근처에서 밀수조직원들이 나눠준 따스한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의료진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지저 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우리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가 의식주를 보장해주는 이상 차도식 병원에서 성실하게 일해줄 것이다.

    그들이 벌어들인 수익으로 우리는 다른 밀수조직이 구해온 물자를 구매하고, 남들보다 항상 한 걸음 더 앞서나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획한 나는 자연히 차도식파 내에서 입지가 커질 것이고,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나 힘도 늘어날 것이다. 나에 대한 조직원들의 깊은 신뢰를 이용하면 그리 어렵진 않겠지.

    "가능하면 공구리파가 시장에 내다팔 의약품도 사람 풀어서 확보하라고 하세요."

    "예."

    영원한 밤이 이어지는 지하 12km의 나이트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한다 호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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