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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37화 (37/211)
  • 나이트 시티(6)

    김명호와 한상도가 이끄는 임시 연합 밀수조직은 다시 한 번 신호탄이 터지는 것을 확인하곤 즉각 강행군에 나섰다.

    기존에 확인해둔 물자에는 일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50명이 넘는 대인원으로도 병원에 있는 대량의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모두 가져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다.

    식료품이나 생필품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현재 지저 도시에서 가장 값어치가 높은 것은 단언컨대 의약품이다. 높으신 분들이 애용하는 귀한 사치품조차 의약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쪽은 김명호라고 했던가? 이제와서 물어보긴 뭣한데, 정말 동생이 우리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작전을 속행한다고 했나?"

    "예. 오히려 소수로 한전병원의 의료진과 의약품을 구해오면 우리 조직의 명성과 몸값은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원이 적은 만큼 리스크도 더 커지겠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걸어볼 만한 밀수각이라더군요."

    "미친새끼구만."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대값을 계산해보니 많이 남는 장사인 건 확실했습니다."

    "나도 밀수로 굴러먹은 짬이 있어서 아는데, 그 돈 한 푼에 아득바득 목숨 거는 놈들치고 오래 가는 놈들은 못 봤어."

    "돈만 원했다면 우리도 그냥 아파트 단지만 싹 털고 빠졌을 겁니다. 도식이 형님 말마따나 요즘 지저 도시 굴러가는 꼬라지를 보면 돈보다 더 우선시 해야할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나같은 놈들은 간 떨려서 그런 짓 못 해. 솔직히 이번 건도 반신반의하다가 마지못해 참가한 거야."

    김명호는 어둠 속에서 한상도가 던진 야광봉을 받아들고 손으로 열심히 주물렀다. 곧 은은한 초록불빛이 흘러나오자 야광봉을 저 멀리 던졌다.

    야광봉이 하필 얼어붙은 강에 떨어졌는지 빙판이 쿵!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빙판을 깨부술 정도로 격한 움직임을 보인 무언가는 얼어붙은 강물 속에서 야광봉을 확보하기 위해 미친듯이 몸부림쳤다. 그 수는 어림잡아 다섯 이상.

    "확실히 호로잡놈 새끼가 터뜨린 첫 번째 신호탄 때문에 주변에 몰려든 놈들이 많아. 돌아가는 길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이번 계획에서 은밀함과 신속함이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기 한전병원이 보이는데...호식아."

    "예, 형님."

    "네가 애들 먼저 몇 명 데리고 가서 건물 내부 문제 없는지 확인해봐. 혹시 그쪽에서 사람들이 나오면 '구조를 위해 파견된 군 부대' 소속이라고 해. 자세한 소속을 물어보면 비밀 작전이라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러한 대처법도 박한성이 떠나기 전에 브리핑을 해주면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이미 본인이 의사들을 상대로 '비밀 작전중인 군인'이라는 신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말귀를 알아들은 덩치 큰 부하는 동료 몇 명을 이끌고 먼저 한전병원 본관 입구로 접근했다. 예상대로 병원 입구에서 손전등 불빛을 비추며 이쪽의 신원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히 의사들과의 얘기가 좋게 끝났는지 호식이 일행을 향해 손전등 불빛을 깜빡깜빡 점멸했다. 오케이 사인이었다.

    "다시 한 번 알려준다. 병원 안에 들어가면 병원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장 먼저 의약품과 의료기기부터 확보한다. 조직 물자확보 상자에는 무조건 의약품과 의료기기만 넣는다. 그리고 개인배낭에 잡다한 물자 챙겨넣는 새끼는 진짜 뒤진다. 우린 딱 챙길 것만 챙겨서 떠나는 거다. 이게 평범한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괜히 행군 속도 느려지게 만들지 말라는 거다. 알아들었냐?"

    병원에 진입하기 전, 김명호가 조직원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까지 정찰조도 아니면서 개인 배낭에 조금씩 챙겨넣는 놈들은 유도리있게 봐줬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알아들었으면 움직인다. 운반조가 먼저 움직이고 대기조가 후방 확인하면서 마지막에 따라들어와."

    한상도가 이끄는 공구리파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공구리파는 젊은 차도식파와 다르게 거친 노동에 시달린 아재 비율이 높아서 좀 더 체계적이고 능숙했다.

    "당신들이 박한성 씨가 말했던 구출 부대입니까?"

    병원 안에서 만난 흰 가운의 의사는 자신을 이선욱이라 소개하며 박한성과의 인연을 먼저 과시했다. 만약 김명호 일행이 정말로 박한성과 친근한 관계라면 자신의 목숨은 확실하게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처럼.

    "예, 저희가 맞습니다. 작전의 특수성 때문에 복장이 좀 난잡하기는 한데, 우리가 가진 엑소스켈레톤을 보면 대충 짐작하실 거라고 봅니다. 지상 환경때문에 약간의 개조 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모두 군에서 운용하는 것들입니다."

    의사가 김명호 일행을 믿지 못하는 눈치라면, 혹은 쉽게 신뢰를 얻고 싶다면 가장 먼저 엑소스켈레톤부터 보이라고 한 것도 박한성의 지시였다.

    의사들은 직업 특성상 공학자가 아니면서도 엑소스켈레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작 폭도무리 따위가 이런 상황에 엑소스켈레톤을 대량으로 보유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챌 것이라는 까닭이었다.

    박한성의 예상대로 이선욱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다수의 중무장 인원을 보고서 일말의 의심을 걷어낸 눈치였다. 이정도면 자신들의 목숨을 맡겨도 되겠다는 기분이리라.

    "박한성 씨와는 이미 얘기가 돼있습니다. 우리쪽에서도 피난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황입니다. 지하 주차장에 대기중인 구급차가 3대 있습니다. 2대는 의료진 이송에 쓰일 것이고, 1대는 환자 이송에 쓸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이동 전에 우리가 먼저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챙길 수 있게끔 협조해주십시오. 그리고 부상자인 이상학 병장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각성제를 써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현재는 기본적인 환자 상태만 10분 단위로 체크하면서 이송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혹시 이상학 병장의 몸에 특별한 이상은 생기지 않았습니까?"

    "없습니다. 어차피 동공 반응을 보이지 않는 환자라서 안구 건조 및 동결을 방지하기 위해 눈을 감겨둔 상태고, 혹시 모를 발작에 대비해 벨트로 구속까지 해뒀습니다."

    "다행입니다."

    별 문제없다는 그의 말에 김명호는 내심 안도했다.

    만약 이상학 병장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면, 특히 눈에 기이한 문제가 생겼다면 이유불문하고 즉각 사살하라는 박한성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조치했겠거니 싶어 그 부분은 더이상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차도식파와 공구리파는 철수 시간까지 계산해서 최대한 빨리 물자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의약품을 챙길 때는 의사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 환자들의 수요가 많은 의약품을 우선적으로 챙겼다. 진통제와 항생제, 마취제 같은 것들이 그에 해당했다.

    그 다음으로는 당뇨병 환자들을 위해 대량의 인슐린을 챙긴다거나, 이런 위태로운 국가재난 사태에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있을 사람들이 많을테니 항우울제도 잊지 않고 챙겼다.

    대량의 의약품을 우선적으로 확보한 다음에는 구급차의 남는 칸에 의료기기를 집어넣었다. 너무 부피가 큰 것들은 따로 챙길 수 없었지만, 의사가 기본적인 진료와 검사를 할 수 있는 알짜배기 의료기기 위주로 챙겼다.

    지금 못 챙긴 것은 다음에 또 챙기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우선은 그정도로 만족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느낌이라 김명호는 대기조에게 한 번 더 주변 정찰을 지시했다.

    차도식파는 비록 유흥가에서 물장사나 하던 흔하디 흔한 조폭이었지만, 마굴 같은 뒷세계에서도 특유의 눈치와 빠른 행동력을 살려 수차례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차도식파의 보스인 차도식도 겉으로는 좀 헤프고 어딘가 모자라보이는 사람이지만, 대규모 조직에게 짓밟히지 않고 용케 자신만의 구역과 조직을 지켜낸 남자였다.

    차도식파의 밀수 계획도 지저 도시의 상황을 본 차도식이 바로 준비한 것이었다. 거기에 박한성이라는 의문의 인재가 끼어들면서 일이 이렇게 커졌을 뿐.

    '도식이 형님은 항상 일이 잘 풀릴 때면 끊임없이 뒤나 밑을 살펴보라고 하셨다.'

    발밑에는 언제나 함정이 도사리고, 등뒤에는 언제나 배신이 따라붙는다. 멍청한 놈들처럼 앞만 보고 움직였다간 꼴사납게 죽을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곤 했다.

    이 상황에서 신경써야 할 만큼 잠재적 위험 요소는 뭐가 있을까?

    "호식아."

    "예, 형님."

    다시 한 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덩치 큰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김명호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을 전했다.

    "만약 공구리파가 물자를 몰래 빼돌리거나 등에 칼꽂으려는 정황이 포착되면 우리 애들한테 미리 준비하라고 말해둬."

    "...공구리파는 우리와 전력이 비슷합니다."

    "알아. 그냥 만일에 대비해서 조심하자는 거다. 서로 공평하게 일하고 보상받아가는 마당에 누구는 몰래 더 챙기고 그러면 안 되잖아?"

    "이해했습니다."

    보수 분배는 이미 어떻게 할지 정해둔 상태다.

    의약품 분배는 7대 3. 공구리파가 7, 차도식파가 3을 가져간다.

    대신 모든 의료진과 의료기기는 한전병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계획을 세운 차도식파(박한성)가 모두 가져간다는 구조였다.

    공구리파에서 이미 동의한 사안이었기에 별 문제는 없겠지만, 원래 더러운 일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끝은 대개 좋지 않다.

    공평하게 나눠먹는 게 귀찮고 좆같으니 수틀리면 배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차도식파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배신과 함정을 주의했기 때문이다.

    대략 2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겨우 출발 준비가 끝났는데, 김명호는 호식으로부터 공구리파가 젊은 차도식파를 얕잡아보고 있다, 차도식파가 알짜배기만 챙겨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따로 뒷주머니를 차는 상도덕 없는 행위는 아직 벌이지 않았으며, 또 한상도가 아직까진 공구리파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정도면 됐다."

    김명호는 예의 이상학 병장이 들것에 몸이 구속된 채 마지막 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확인했다.

    슬쩍 옆을 지나갈 때 본 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하기도 힘들만큼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혈색이 조금만 더 나빴더라면 영락없이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출발한다!"

    대인원과 구급차 3대의 은밀하면서도 신속한 이동. 안전에 신경써야 하는 만큼 차도식파가 구급차의 선두에 서서 길안내를 하고, 공구리파가 구급차 행렬의 뒤를 따라오기로 했다.

    구급차는 매우 느릿느릿 움직이게 되겠지만 각 조직에서 선별한 숙련된 운전자들이 탑승했으니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의료진을 포함한 몇 안 되는 민간인+물자를 지저 도시에 가져가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진짜 문제는 어딘가에서 놈들에게 쫓기고 있을 박한성이 제 시간내에 격벽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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