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36화 (36/211)
  • 나이트 시티(5)

    -그건...유감입니다.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는데요. 설마 그렇게 될 줄이야......

    -나도 유감일세.

    -그런데 저를 굳이 이곳까지 부르신 건 그들의 안타까운 소식만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네도 알고 있겠지. 상층부에선 누구든 '답'을 내주길 원해. 딱 맞아떨어지는 명쾌한 답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저 이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할 정도라면 그걸로 충분해. 이미 자네 말고도 많은 박사들이 이곳을 거쳐갔지.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답을 내주질 않더군. 다들 똑같은 정보를 제공받았는데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이클 중장님은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몹시 다급한 상황에서 오는 패닉을 말하는 건가?

    -그거야 상황이 나아지면 자연스럽게 진정될테니 잠시 잃은 지성과 이성을 되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침 소리)

    -자신의 이해가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과 마주했을 때 지성과 이성을 지키기 힘들어 합니다. 아니, 꽤 높은 확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하던 천문학자가 돌연 자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고싶은 말이 뭔가?

    -솔직히 말하면 저도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는 확답을 드릴 수 없는 쪽이었는데, 어떤 답이라도 상관없다고 하시니 알려드려야할지 말지 고민중이었습니다.

    -뭐든 좋으니 사양하지말고 말해보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도 정확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있었는지 답을 찾아내지 못 했어. 정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일세.

    -그럼 그 날의 기록에 대해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녹음기가 재생되는 소리)

    (녹음기가 종료되는 소리)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품었을 의문인 지저 세계의 고대 문명에 대한 것 말입니다만, 탐사대는 지저인들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문명'을 세워서 생활했을 것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일부 탐사대원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고요. 여기서 우린 2개의 가설을 얻게 됩니다.

    -과학자란 나부랭이들은 하나같이 말꼬리 늘리는 데 선수군. 정치인들의 필리버스터보다 자네들의 연구 주제 토론이 훨씬 더 오래 가겠어.

    -하하, 직업병이라서 말입니다. 차치하고, 첫 번째 가설은 지저인들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문명을 세웠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빛이 필요없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었을 것이라는 설. 두 번째 가설은 자발적으로 빛을 거부한 고대 인류였다는 설입니다.

    -벌써부터 복잡하군.

    -사실 화석이나 미라가 발견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문명을 이룩한 종이 정말로 고대 인류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이 계신다면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시겠지요. 중요한 건 그들이 굳이 12km나 되는 지하로 숨어들 필요가 있었냐는 겁니다.

    -계속해보게.

    -만약 태생부터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생명체였다면 깊은 동굴이나 심해에서 살았을지언정, 굳이 도달하기 힘든 12km 지하까지 파고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생물학적으로 너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죠. 산소나 물은 둘째치고 식량 수급이 힘듭니다. 살아가고, 또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영양분 수급은 필수인데 지하 12km에 파고들어서 뭘 먹었겠습니까?

    -즉 말이 안 된다는 건가?

    -예. 따라서 현 인류처럼 지하 12km를 파고들고, 또 지상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고등 문명을 보유한 고대인류가 지저 세계로 파고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대 인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질리도록 들었네. 좀 더 확 와닿는 건 없나?

    -고대 인류도 현 인류처럼 그럴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라는 건 조금 이상합니다. 그런 기술력이 있는 고등 인류가 지저 세계에선 고작 그정도의 문명밖에 이룩하지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요점만.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지상에 남아있기를 거부한 겁니다. 아마 굉장히 급했겠죠. 지상의 풍부한 자원과 가장 중요한 빛을 포기하고 지하 12km까지 내려가서 빛 한점 없는 삶을 연명해야 했을 만큼.

    (라이터를 켜는 소리)

    (담배에 불이 붙는 소리)

    -후우, 우리의 대화는 모두 기록되고 있네. 내가 어떤 답을 내놔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는 자네에 대한 상층부의 신뢰만 잃게 할 뿐이야.

    -과학자들은 항상 허무맹랑한 가설부터 시작해서 논리정연하고 완벽하게 증명된 공식에 다다릅니다. 심지어 그렇게 다다른 공식도 갑자기 다른 가설과 공식에 의해 깨질 수도 있죠. 저는 과학자답게 말하는 겁니다.

    -좋아좋아, 그럼 계속해보게.

    -그들이 가장 중요한 빛을 포기한 이유가 단순한 기후변화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 인류와 비슷한 수준의 고등 문명이었다면 기후 변화 정도는 능숙하게 대처했겠지요. 게다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닙니까?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지상이라는 낙원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천재지변은 어떤가? 빙하기나 운석 충돌 같은 것 말일세. 외계인 침공도 재밌겠군.

    -그또한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지저 세계에서 이룩한 문명의 특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이클 중장님. 그들은 지상에서 빛을 포기하고 지저 세계로 내려왔음에도 끝내 자신들의 삶에 빛을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빛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는 겁니다.

    (담배 연기 내뿜는 소리)

    -확실히 듣고보니 이상하군. 빛을 왜 포기한 거지? 지저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예정이었다면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빛 없인 살아갈 수 없었을 텐데.

    -빛의 가장 큰 힘은 '인식'에 있습니다. 반드시 뭔가가 빛에 반사돼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방의 불을 끈다면 마이클 중장님은 저를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건 다른 감각을 활용한 인식법이잖습니까. 빛을 이용한 인식법은 시각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스스로 시각을 포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태계의 3대 요소중 하나인 빛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저 세계로 피난한 그들은 끝내 빛을 추구하지 않았고, 따라서 빛으로 무언가를 인식하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뭔가가 꼴보기 싫어서 어둠 속에서 자발적인 맹인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 아닌가?

    -비슷합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도 모릅니다. 정체도 모르는 고대 인류의 생각을 우리같은 막내 인류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록 종료)

    *  *  *

    눈의 따끔거림과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총탄에 머리가 날아간 놈은 검은 체액을 왈칵 내뿜다가, 이내 검은 연기를 대량으로 내뿜는 매연 발생 장치가 돼버렸다.

    하지만 야투경으로 꿰뚫어보는 시야속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끝없이 나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통방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놈들을 노려본다고 해서 딱히 눈이 따끔거린다거나 가렵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역겨움이 치솟았다.

    구멍이 뻥 뚫린 눈으로 정확히 나를 응시하는 것도 찝찝한데, 놈들의 검은 입 속에서 전조없이 튀어나오는 검은 촉수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저 찢어지는 비명 소리!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대충 스피커를 한계까지 짼 듯한 기괴한 비명 소리는 쉬지않고 내 골통을 두들겼다.

    층간소음만으로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에 이런 부당한 소음공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적당히 소총으로 긁어준 나는 낙엽과 흙을 거칠게 뒤로 털어내면서 비탈길을 달렸다.

    산을 달리면서 놈들이 나를 쫓을 수 있는 수단이 정말로 빛과 소음이 전부인지 다시 한 번 계산했다.

    놈들이 빛과 소음에 반응하는 건 확실하지만, 그 이외의 수단으로도 나를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본원정사 절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거대한 불상이 있었기에 뒤편에 몸을 숨기고 최대한 빠르게 호흡을 정리했다.

    쿵쾅대는 심장도, 헉헉대는 호흡도 어느정도 진정되고나니 내가 내는 소음이 급격하게 줄었다.

    내가 먼저 고지대에 도달한 다음 모습을 감추고 기척까지 죽였으니 적어도 빛과 소음은 확실하게 사라졌다.

    만약 빛과 소음으로만 나를 인식한다면 놈들은 이 근방에서 열심히 헤맬 것이고, 아니라면 정확하게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게 어떤 수단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볼 문제다.

    '퇴로는 장지문이면 충분해.'

    불당은 장지문이 많아서 어느 방향이든 그냥 박차고 달려나갈 수 있다. 반대로 저쪽에서 먼저 치고들어오기도 쉽지만.

    숨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두툼한 목도리 섬유에 입을 깊게 파묻었다. 막말로 눈알 굴러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끔 시선도 고정했다.

    저 멀리서 요란하게 낙엽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마치 처음 격벽을 빠져나와 고요한 요람속에 잠든 세상과 마주한 것처럼.

    정적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는 골이 울릴 정도로 요란했지만, 놈들도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잡아채진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정도로 귀가 좋다면 벌써 시끄러운 격벽 앞으로 놈들이 몰려들었을 테니까.

    끼이이익. 끼이이이익.

    "!"

    절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목재 바닥. 끼익거리는 소리가 많이 날수록 오래된 절이라는 걸 증명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보다 장지문이 열렸던가? 장지문이야 워낙 가벼우니까 조용히 열면 소리가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조용한 공간이라면 고작 장지문을 여는 소리도 천둥처럼.......

    끼이이익. 끼이이이익.

    걷고 있다. 산책을 하듯이 가볍게. 조급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발걸음이다.

    나는 해제했던 야투경을 다시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불상 뒤에서 나왔다. 뭔가 보인다면 눈에 타격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총을 쏴서 잡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빛과 소음이 없다는 전제하에, 내겐 어둠 속에서 놈들을 먼저 발견하고 공격할 수 있는 선공권이 있다. 여차하면 다시 산비탈을 타게 되더라도 죽어라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렇게 고양이 발걸음보다 민첩하고 조용하게 불상 옆을 돌아나온 나는 아무것도 없는 휑한 불당과 마주했다.

    "......"

    아무것도 없다. 야투경으로 열심히 불당 내부를 둘러봐도 눈이 따끔거리거나 가렵지 않다. 혹시 놓친 게 있나 싶어 천장까지 올려다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끼이이이익.

    "......"

    내가 밟고 서있는 목재 판자가 '아래쪽'에서 가한 힘에 의해 흔들렸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건 마룻바닥 위를 걷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개......"

    콰지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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