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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35화 (35/211)
  • 나이트 시티(4)

    굳게 닫힌 격벽 앞에는 내가 이끄는 차도식파, 상도 아재가 이끄는 공구리파, 그리고 안전한 북한산 주변만 돌아다니며 잡다한 물자만 챙길 생각인 소수의 조직만이 남았다.

    우린 처음부터 대어를 노리고 있었기에 저들처럼 잡다한 물자에 한눈 팔 여유는 없었다.

    "우린 약속 지켰으니 이제 동생이 약속 지킬 차례야."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온 상도 아재가 말했다. 만약 내 계획이 정말 별 거 아니라면 주먹다짐까지도 할 기세였다.

    "상도 아재 신호탄발사기 아직 가지고 있죠?"

    "어? 일단 가지고는 있는데 이건 쓰면 안 되는 거라면서?"

    "저한테 주세요. 이번 계획에 필요하니까."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신호탄발사기를 내게 넘겨준 상도 아재는 오히려 한시름 덜어낸 표정을 지었다.

    나는 대기조와 운반조를 이끌 길잡이(정찰조)를 전원 불러모은 다음, 그들에게 스마트폰 지도 어플로 이동 경로와 시간, 목적지인 한전병원에서 챙겨야할 '물자'와 주의사항을 세세하게 전달했다.

    한창 설명을 듣던 도중, 상도 아재는 문득 내게 의문을 품었다.

    "가만. 이렇게 듣고보니 좀 이상한데. 마치 동생은 우리랑 같이 못 간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맞아요."

    "뭐? 왜?!"

    "그야 제가 새로운 미끼가 돼야 하니까요."

    나는 신호탄발사기와 함께 차키를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한 상도 아재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알려준대로 여러분들이 움직인다면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어요. 100% 안전까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요."

    "신호탄 효과는 이미 톡톡히 봤으니 계획대로만 하면 나쁘지 않아.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동생?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조직 2개가 한꺼번에 실어나르기도 힘들 만큼 많은 의약품과 의료기기, 그리고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다수의 전문 의료진까지. 지저 도시에서 내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수단중 하나다. 못할 것도 없지.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한다.'

    나는 대답 대신 격벽 앞에 세워둔 차량에 탑승했다. 두 번째 작전에서 차량 정비공들의 도움을 받아 얼추 수리를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운행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부동액도 새로 갈았고 기름도 가득 채웠다.

    운전석 차창을 내린 나는 조직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제가 신호탄을 터뜨리면 그때부터 움직이세요. 최대한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거 잊지 마시고요. 총으로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기보단, 처음부터 위험 요소를 피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이동하세요."

    "거 사내새끼가 시어머니보다 잔소리가 많구만. 퍼뜩 움직이기나 해!"

    "중요하니까 그렇죠. 아무튼 여러분들만 믿습니다?"

    김명호와 상도 아재에게 조직원들을 맡긴 나는 삼양로를 타고 그대로 남하했다. 본래 차량을 이용할 때 헤드라이트는 켜지 않지만 이 상황에선 내가 미끼가 돼야 하기 때문에 헤드라이트를 켰다.

    나는 이대로 강북구 수유 1동까지 내려갈 것이다.

    어떤 개망나니 새끼가 쐈는지 모를 첫 신호탄은 강북구의 북부, 그러니까 수유 2동에서 터진 게 확실하다. 한전병원에서 빠져나온 내가 직접 거리계산을 했으니 오차율은 적을 거다.

    지금쯤 수유 2동으로 몰려든 위험 요소들은 다시 인간과 빛, 그리고 소음이 사라진 탓에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평소처럼 그냥 어둠 속에 숨어들었거나.

    그런 상황에 내가 요란하게 차를 몰고 수유 1동까지 질주한 다음 다시 한 번 신호탄을 터뜨린다? 아마 일행이 한전병원까지 가는 길은 순탄하기 짝이 없을 거다.

    대신 나는 좆되겠지만.

    "쓰읍."

    깨진 유리창 너머로 칼바람이 새어들어온다. 차량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칼바람의 위력도 증가했다. 뜨거운 여름철에 땀 뻘뻘 흘리다가 냉탕에 뛰어든 기분이다.

    수유 1동으로 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북한산에서 삼양로를 타고 쭉 직진하기만 하면 수유 2동을 지나쳐 곧바로 수유 1동이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조직원들이 미처 치워두지 않은 차량들이었다.

    정찰조 중에서도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놈들이 몇 명 있던데, 일좀 해두면 어디가 덧나나?

    다행히 GPS 기능은 없지만 네비게이션은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샛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도로 들어간 다음 샛길로 빠지고, 다시 인도로 빠져나오면 돼.'

    다소 복잡한 길 탐색과 운전을 동시에 하느라 신경써야 할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달려든 놈을 전속력으로 쳐버릴지, 아니면 빠르게 회피기동을 해서 지나칠지 1초 안에 결정을 내려야 것처럼.

    꽈아앙!

    급가속한 나는 그냥 정면으로 놈을 박아버리고 십수 미터 너머로 날려버렸다. 덕분에 본네트 일부가 찌그러지고 큰 충격이 가해졌으나, 다행히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다.

    "역시 국산 자동차는 달라도 뭐가 달라. 원할 때나 원하지 않을 때나 에어백은 절대로 안 터지잖아?"

    K-자동차의 위엄을 제대로 느낀 나는 저 앞에서 꿈틀대고 있는 놈을 시원스럽게 짓밟고 지나갔다. 콰직! 으직! 하고 으깨지는 소음이 고막을 긁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온갖 듣기 싫은 소음은 이미 군대에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선임의 갈굼, 총성, 비명, 후임의 우는 소리, 비명, 총성, 비명.

    "슬슬 준비해야겠네."

    상도 아재에게 받은 신호탄발사기를 차창 밖으로 쭉 내뻗었다.

    네비게이션 정보와 주변 지리가 일치한다는 전제하에 수유 1동이 맞다고 확신한 순간, 나는 망설임없이 신호탄을 쏴올렸다.

    피유우우우우우우우! 퍼엉!!

    하늘 높이 치솟은 신호탄. 순식간에 어둠을 밝히는 불빛. 지평선 저 너머까지도 울려퍼질듯한 소음.

    나는 삼양로를 내려오는 방향에서 즉각 우회전했다. 좌회전해서 위로 다시 올라간다면 기껏 미끼가 된 보람이 없으니까.

    인도를 미친듯이 내달리는 차량 안에서 탄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했다. 소총 탄약은 65발, 권총 탄약은 32발 남았다. 소총은 탄창 하나당 20발, 권총은 탄창 하나당 12발씩 들어가는 구조였다.

    '탄약도 문제지만 어그로 핑퐁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문제네.'

    이대로 쭉 내달리면 한신대학교(신학대학원)와 혜화여고가 나온다. 이런 마당에 학교에 숨어드는 건 나 잡아잡수쇼 하는 짓이니 은신처의 가치도 없다.

    '이대로 화계사(절)까지 올라간다.'

    화계사 길에 접어든 나는 쏜살같이 학교들을 지나쳐 곧장 화계사로 향했다. 화계사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을 버리고서 반쯤 전력질주하듯이 산을 탔다.

    나침반이 있으니 산행이 다소 어려워도 북진하기만 하면 북한산 북부 격벽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내가 어둠속에서 산을 타고 북한산 북부 격벽에 도달하는 시간과 일행이 한전병원에서 '물자'를 구해 복귀하는 시간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삐융! 삐융! 삐융! 삐융!

    쾅! 콰직! 콰아아앙!

    등 뒤에서 울려퍼지는 차량의 경고음, 무언가에 의해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깨져나가고 급기야 차량이 뭉개지는 끔찍한 소리가 이어졌다.

    짐작컨대 한둘이 따라붙은 게 아니리라.

    "후우! 후우! 후우!"

    산악행군은 페이스 조절이 필수다. 42.195km를 달려야 하는 마라토너처럼.

    만약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다간 산길에서 그대로 몸이 퍼진다. 한 번 퍼진 몸은 어지간해서 기력을 되찾기 힘들고, 이미 흐트러진 페이스 때문에 다시 걸어도 금방 지친다.

    여기서 더 좆같은 점은 평탄한 도로를 달리는 마라토너보다 지형이 불규칙적인 산악행군에서 페이스 조절을 하는 게 훨씬 더 힘들다는 거다.

    '괜찮아. 이런 상황은 많이 겪어봤잖아.'

    내 집보다 더 집같은 곳이 산이었다.

    스사사사사사사!

    그리 멀지 않은 후방에서 들려오는 수풀 소리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를 지지대 삼아 짚고 나아갔다.

    산악 행군에선 다리 힘만 쓰는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팔도 써서 엉금엉금 기듯이 올라가야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적당히 잡기 좋은 크기의 나무는 훌륭한 지지대가 되어준다.

    스삭! 사사사사사!

    계절상으로는 가을이라 그런지 바닥에 어마어마한 양의 낙엽이 쌓여 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잔가지와 낙엽 밟는 소리가 울려퍼질 수밖에 없었다.

    야광봉은 이미 다 썼기 때문에 남은 게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차량 네비게이션 정보가 맞다면 이대로 북진할 경우 인수봉로 55길이 나온다. 그 길을 넘어서면 또 다른 절인 본원정사가 나온다.

    인수봉로 55길에서 우측으로 크게 빠져서 다시 길이 평탄한 도심으로 도주하는 방법과 본원정사를 넘어서 산악 행군을 계속 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를 고를 경우 밀수조직원들이 작전을 끝내고 격벽에 안전하게 도달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없다. 대신 내가 도주하거나 은신하는 건 좀 더 쉽겠지.

    반대로 후자를 고른다면 지금처럼 나 혼자만 죽어나겠지만 한전병원의 의료진과 대량의 의약품, 의료기기까지 전부 구할 수 있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마지막 격벽이 다시 열리고 닫히기까지 앞으로 5시간 남았다. 5시간 안에 저것들을 떼내지 못하면 작전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난 무조건 죽는다.'

    인수봉로 55길을 마주한 나는 선택을 기로에 놓였다.

    '이대로 간다.'

    지금 내 입지를 공고히 하지않으면 지저 도시에서의 내 신분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 아버지가 정말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지저 도시 가족 동반 입주 혜택을 받게 해줬을까?

    아니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내가 지저 도시 입주 혜택을 받아 들어오자마자 부모로서 해야할 자식 걱정보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바빴으니까.

    즉 내게 목숨진 빚을 받으려고 그런 거다.

    '그래, 목숨진 빚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당연히 갚아드려야지.'

    아버지가 자식 상대로도 은원관계를 철저히 하듯, 자식인 나 또한 아버지 상대로 은원관계를 철저히 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권력이든 부든 명예든 이용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사건 당일, 군인들이 북한산 인근 통제를 풀자마자 민간 차량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쳤는지 길가에는 차량들이 가득했다.

    능숙하게 차량을 타넘은 나는 다시 산길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저 아래에서 차량과 무언가가 부딪치는 파괴음이 들렸다. 수많은 차량 대열과 나를 뒤쫓는 놈들이 충돌한 것이다.

    서둘러 야투경을 착용하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 차량이 신나게 부서지고 있는 곳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지끈지끈.

    "염병.'"

    야투경 너머로 확인한 것들은 통방중에서 봤던 온전한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대부분이었다. 네발로 기거나, 팔을 휘적휘적 흔들면서 뛰어다니는 놈들.

    괜히 부딪친 차량이 소음을 내자 검은 촉수같은 것을 내뻗어 찔러보기도 했지만, 곧 놈들의 표적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내게 고정되었다.

    그런 놈들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알을 긁어내고 싶어.'

    눈이 따끔거리는 감각을 넘어서 이젠 눈이 가렵다. 눈꺼풀을 벅벅 긁으면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눈알 속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 곳에는 아무리봐도 인간과는 생김새가 많이 다른 무언가가 멀뚱멀뚱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개씨발!!"

    콰악!

    눈을 깜빡일 만큼 찰나의 순간, 무려 수십 미터를 넘어서 쇄도해온 검은 촉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이 있던 장소를 스쳐지나갔다. 촉수에 긁힌 나무에 커다란 상흔이 생기며 나무 껍질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거리도 사거리지만 위력이 정말 대단했다. 강화 외골격 파츠를 착용하고 있던 내 팔을 부러뜨릴 뻔 했던 '그것'의 위력과 비슷한 것 같았다.

    "좆같은 새끼! 씨발 새끼!"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대량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픈 영화를 봐도 이정도는 안 나오겠다 싶을 만큼 펑펑 쏟아지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가렵고 따끔거리는 눈을 안정시키기 위한 눈물샘의 처절한 발악이겠지.

    '맨 눈으로 볼 때는 문제 없었는데!'

    나는 눈의 증세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며 튀어나갔다.

    또 한 번 수십 미터를 가로지른 촉수가 나를 노렸지만, 산비탈의 미끄러운 낙엽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지면서 총을 쐈다.

    타타타!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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