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32화 (32/211)
  • 나이트 시티(1)

    "보, 봉수 형님! 봉수 형님 저 좀......!"

    "야 이 미친 새끼야! 소리 안 줄여?!"

    서로 조용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느쪽도 목소리를 먼저 줄일 기색은 없었다.

    이제 40줄에 접어든 근육질의 사내 김봉수는 자신의 옆으로 굴러들어오다시피한 동생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두꺼운 털모자를 꾹 눌러쓰고 스키용 고글까지 끼고 있던 놈이 대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머리는 산발이 된 상태였다. 고글도 뭔가에 세게 부딪쳤는지 거미줄처럼 쩌적 금이 갔다.

    "혀, 형님...형님!"

    "알아. 나도 아니까 제발좀 조용히 해라."

    김봉수는 애새끼처럼 울먹이면서 들러붙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거렸다. 남은 게 팔 한짝 뿐이라 끌어안아줄 수 없었다.

    "진정해 인마. 너도 나처럼 팔병신 되고 싶어?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너라도 돌아가야 애들이 무슨 상황인지 알 거 아냐."

    "......"

    "씨이이이벌. 존나 아프네 진짜."

    김봉수는 부패한 군 장교들과 거래해서 몰래 군용 모르핀을 빼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르핀을 맞지 않았으면 팔 한짝이 사라진 지금, 태연하게 동생과 얘기할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혹독한 날씨 때문에 환부의 핏물이 빠르게 얼어서 출혈은 어찌어찌 멈췄다. 일단 급한대로 옷을 찢어서 환부를 꽉 감싸두긴 했지만,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환부가 괴사할 것이다.

    "...같이 돌아가셔야죠. 어떻게 저 혼자만 가요."

    "같이 못 가. 모르핀 놔서 지금 버티고 있는 거지 출혈 때문에 점점 눈 감기고 있다. 그러니 딱 한 번만 말한다. 랑데뷰 포인트로 돌아가서 전원 철수하라고 해."

    "형님......!"

    "씨발놈아. 나 눈 감긴다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 줄 알아? 존나 편해. 한 겨울에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놓고 이불 속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느낌이야! 아니면 네가 나 업고 뛸래? 업을 수는 있냐?"

    "저는......"

    "됐다. 그냥 빨리 가라. 셋 센다."

    자신의 모자와 배낭을 청년에게 억지로 떠넘긴 그는 허리춤에서 붉은색이 감도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셋!"

    "죄송합니다 형님! 진짜!!"

    김봉수가 신호탄발사기를 들어올리자마자 청년은 헐레벌떡 움직였다. 신호탄발사기를 들었다는 건 이미 각오했다는 걸 의미했다.

    자신 몫의 배낭을 짊어지고 열심히 뛰어가는 청년을 바라보던 김봉수는 이내 눈을 감았다.

    "꿀잠자겠네."

    피유우우우우우우우우! 퍼어어엉!

    *   *   *

    "그래서 좀 어떻습니까?"

    나는 병원 앞 편의점 창고에서 덜덜 떨고 있는 김한솔과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인 이상학을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무장폭도들에게서 자유를 되찾은 의료진과 일반인들은 서로 생존물자와 무기를 적절하게 배분한 상태였다. 이제야 삶에 여유가 생긴 그들은 우리를 대하는 태도부터 싹 바꿨다.

    "현재로써는...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여기 보시면 제가 이상학 환자의 안구를 펜라이트로 비추고 있어도 동공에 변화가 없죠? 가장 기본적인 외부 자극 반응까지 끊긴 상태라는 겁니다."

    "뭐 혼수상태 같은 겁니까?"

    "호흡과 맥박은 정상이고, 특별한 외상 흔적이나 감염 징후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외부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예, 사실상 혼수상태가 맞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치료 방법은 없습니까? 아니면 하다못해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한 힌트 같은 거라도."

    내 물음에 이선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면, 혹은 특정 부위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면 그에 걸맞는 검사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박한성 씨 말대로면 같이 걷고 있다가 갑자기 패닉에 빠져서 굳어버렸다고 했죠. 그럴 경우 물리적인 피해를 입었다기보단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아니라서 확답을 드리긴 힘듭니다만......"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받았다치고, 정말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받았다면 갑자기 패닉에 빠지고 이런 식물인간 같은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사람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졸도하거나 패닉에 빠져서 이상행동을 보일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실어증에 걸리거나 깊은 잠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호르몬 분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그럼 이상학 병장은 일단 지켜봐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죠. 뭐 수액 달고, 대소변 받아내고, 체온유지와 맥박, 호흡 체크만 잘 해주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연명치료를 위한 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기 때문에 전부 의료진들이 직접 관리해야 하지만...은인을 위해서라면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김한솔 상병을 여기 두고 갈테니 여러분들은 제가 부대원들과 돌아오기 전까지...앞으로 2시간 이내에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주십시오."

    "전부 가야 합니까?"

    "가능하면 전부 가야합니다. 특희 의료진 여러분들은. 물론 이곳에 남겠다는 사람들의 의사도 당연히 존중할 겁니다."

    나는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켜서 전자펜으로 탈출 경로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침입할 때 구급차를 봤습니다. 구급차는 환자 안전을 위해 방한 대책이 잘 된 편이죠? 게다가 튼튼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 예상이 맞다면 외부는 엉망진창일 텐데요.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만 이 근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차량으로는......"

    "인도와 야지를 이용하면 됩니다. 운전이 좀 빡세겠지만 그 부분은 어떻게든 해야죠. 장애물이 길을 막고 있다면 다함께 치워내면 그만입니다. 제 강화 외골격 보이죠? 이거면 차량 한 대쯤 질질 끌어서 치워낼 수 있습니다."

    직종이 직종인지라 강화 외골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선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박한성 씨 일행과 함께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물자와 의약품을 챙긴다음 구급차로 이송, 이거면 되겠습니까?"

    "예. 세세한 내용은 저희 부대원들이 도착하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

    이상학과 김한솔을 한전병원에 맡긴 나는 병원 뒤쪽에서 발견한 자전거 한대를 빌려 급히 패달을 밟았다. 꽤 고급 자전거라 그런지 끼익끼익대는 불쾌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의사들중 누군가가 출퇴근 시간에 건강 챙기겠답시고 좋은 자전거를 사서 병원 주차장에 박아둔 모양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쌍문 3동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던 그때였다.

    피유우우우우우우우우! 퍼어어엉!

    "이런 미친!!"

    방향으로치면 서남. 강북구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난데없이 어둠을 가르며 하늘 높이 솟구친 신호탄 한 발이 내 정신을 강하게 붙들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2회째 작전에서 다른 밀수조직도 어둠 속의 무언가가 빛과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다음 작전부터는 각 조직원들의 생환율을 높이기 위해 행동대장격의 현장 책임자들에게 신호탄발사기를 지급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둠 속의 무언가가 빛과 소리에 민감하다면 신호탄발사기를 사용해서 놈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테고, 조직원들이 빠르게 몸을 내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때문에 나온 의견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런 1차원적인 사고방식에 어울려주기 싫었던 나는 차도식에게 신호탄발사기 지급을 거절했다.

    누가 처음 의견을 꺼낸대로 신호탄발사기는 조직원들이 몸을 내빼기 위한 눈속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어그로가 너무 심했다.

    그 엄청난 소음, 그 엄청난 빛, 그 엄청난 소음과 빛이 닿는 거리!

    부르지 말아야할 것들까지 불러들이게 되는 최악의 수인데 어떤 미친 놈이 고작 탈출하자고 그런 걸 쓴단 말인가? 오히려 탈출로마저 막힐 가능성이 있는데.

    "일이 좀 풀린다 싶으면 꼭 이런다니까. 씨발!"

    나는 자전거 패달을 더욱 열심히 밟았다. 조금 전부터 공원 전체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소음과 빛에 반응한 것이다.

    스칵!

    수풀을 뚫고 나온 검은 채찍이 내가 지나간 자리를 긁었다.

    자전거 속도를 순간적으로 가속시키지 않았다면 옆구리부터 꿰뚫렸을 것이다.

    "염병할 새끼!"

    이미 파티는 시작되었고, 올빼미족들은 제 세상이 왔다며 미쳐날뛰고 있는 판국이다.

    더이상 기도비닉을 유지할 수 없었던 나는 권총을 뽑아 수풀에 냅다 갈겼다.

    탕! 탕! 탕!

    야투경너머로 힐끗 보인 인간형의 무언가가 권총탄에 얻어맞아 뒤로 풀썩 넘어졌다. 그러나 머리에 적중하지 않아 다시금 일어섰다.

    '어차피 속도는 내가 더 빨라!'

    4족 보행으로 열심히 기어온다고한들 성인 남성이 힘차게 패달을 밟아대는 자전거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리가 없다.

    예상대로 저 뒤에서 끔찍한 비명같은 것이 울려퍼졌지만, 곧 소음이 빠르게 멀어졌다.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새카만 하늘에 붉은 불빛을 자아내고 있는 신호탄을 본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의사와 의약품은 반드시 지저도시에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뭘 위해서 정찰 동선을 그렇게 짰는데? 규모가 큰 병원이라면 무조건 의사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라면 절대로 환자들을 버리고 저들끼리 달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이 요 10일간 병원에 처박혀서 진흙속의 진주로 거듭났을 때 내가 캐내면 모든 게 완벽했던 거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걸 방해받다니.

    전속력으로 달리던 도중, 차량 앞에서 자전거를 급정거시킨 다음 반동으로 들썩이는 안장의 힘을 받아 단숨에 차량 본네트를 뛰어넘었다. 아쉽지만 자전거는 여기서 손절이다.

    동시에 어두운 차량 내부가 들썩이더니 차창이 산산이 깨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방에 탄환을 몇 발 쏴주었다.

    여전히 귀를 찢을듯한, 인간의 귀로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카가각! 하고 무언가가 차량 동체를 긁어대는 불쾌한 소음도 뒤따랐다.

    '전방에 하나.'

    야투경 덕분에 똑바로 보인다.

    키가 2m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흰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 길고 가는 팔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횡단보도 앞에 서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검은 머리칼은 워낙 길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모양새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것과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는 사실에 서둘러 야투경을 벗고 소총을 뽑아들었다. 조정간 연발.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흰 원피스를 과녁 삼아 숨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

    정조준 사격도 아니었지만 강화 외골격 파츠 덕분에 총기의 반동 제어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몇 초를 새기도 전에 탄창 하나가 거덜났다.

    나는 '그것'의 앞을 지나치면서 얼굴을 팔로 가렸다.

    까아앙!

    강화 외골격 파츠의 외부 장갑을 거칠게 두들기는 충격에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좆같은 새끼!"

    강화 외골격 파츠가 아니었다면 오른팔이 단숨에 부러질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팔이 얼얼할 정도다. 정확히 내 얼굴을 노린 일격이었다.

    랑데뷰 포인트가 그리 멀지 않다. 나는 급한대로 손전등을 켠 채 아파트 단지에 진입했다. 불빛으로 주변을 한 번 훑자 한 아파트 입구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여깁니다!"

    낯익은 김명호의 목소리. 호흡이 두 번 오가기도 전에 손전등을 도로 꺼버리고 전력으로 달렸다.

    내가 뛰어들어오기가 무섭게 김명호와 똘마니들이 아파트 입구를 도로 막았다. 여기저기서 잔뜩 주워온 가구들로 만든 임시 바리게이트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일이 터지자마자 아파트 안에 숨기로 작정했는지, 이미 드럼통까지 구해와서 불을 피워둔 상태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불꽃의 따스한 온기가 스며든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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