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31화 (31/211)
  • [손상된 기록]

    복도 코너를 돌아 들어가자 1회의실과 2회의실이 보였다.

    권위있는 의사들끼리 서로 자주 모여서 회의하며 정보 교류 및 병원 운영 방침을 논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쭉 이어지는 회의실 안쪽으로는 탕비실과 비품 창고, 화장실 등이 딸려 있었다.

    애초에 6층은 VIP 병실을 제외하면 환자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적었다. 때문에 의료진들에게 비교적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듯 했다.

    '의사들이 머무를 수 있는 휴식터나 쪽잠을 잘 수 있는 수면실도 있겠지. 일일이 확인하려면 시간도 걸리고 비효율적이다.'

    내가 처음 문짝을 뜯어냈을 때, 놈들은 꽤 빨리 튀어나왔다. 즉 중간 계단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조심스럽게 1회의실 문 옆에 바짝 붙어섰다. 멍청하게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붙는 놈들은 총맞아 죽기 딱 좋다.

    철컥철컥.

    드다다다다다다!!

    혹시 몰라 문고리를 몇 번 건드려보니 안쪽에서 귀신같이 반응을 보였다. 내가 떼어낸 문짝에 비하면 훨씬 얇은 금속문에 구멍이 송송 뚫렸다.

    '다른 놈들이 싸우러 나갔다가 죄다 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매복까지 한다라...어디 후방 부대 꿀보직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한테는 연막신호탄이 있는데.

    딸칵.

    연막신호탄의 안전핀을 제거한 다음, 손에 단단히 쥔 채로 망가진 문을 반쯤 열었다. 또 한 번 탄환 세례가 날아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연막신호탄을 굴려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이!

    연막신호탄은 강렬한 불빛을 내면서 연막까지 흩뿌리는 군용 가젯(도구)이다. 날씨가 안 좋은 날, 혹은 너무 어두울 때 이쪽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신호탄과 연막탄을 합친 것이다.

    예상대로 상대는 갑작스러운 불빛과 연막에 당황했는지 연신 기침을 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중간에 발이 걸렸는지 우당탕 하고 넘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야투경을 해제하고 내부로 진입했다.

    창문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는 탓에 빛이 반사되어 내부가 훤했다. 팔로 입가를 가린 채 허겁지겁 움직이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팡! 팡!

    연이은 두 발의 총성으로 상대는 뒤통수에 한 발, 등짝에 한 발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혹시 몰라 회의용 테이블 아래를 철저하게 확인하면서 놈에게 접근하니, 군인의 방탄 헬멧까지 뺏어쓴 중년 사내가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장교용 권총과 K-2 소총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체격이 건장한 것으로 보건대 평소부터 운동을 꾸준히 했던 미친놈이거나, 아니면 꽤 높은 확률로 군 소속이었지만 국가와 국민을 배신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쪽이든 내 알 바는 아니었기에 적당히 시체를 발로 차서 치웠다. 1회의실과 2회의실은 탕비실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한 번 문을 열면 2회의실이다.

    여전히 문 너머에서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굳이 주의할 것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1회의실에서 동료가 당했다는 걸 알아챘다면 2회의실에 있던 놈이 진즉에 움직였을 테니까.

    "히이이익!"

    "제, 제발 살려주세요!"

    "말하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목숨만...흐윽!"

    2회의실에는 꽤 많은 생존물자들과 함께 3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여지껏 공포를 억누르며 숨죽이고 있었는지 눈물로 얼굴이 벌개진 상태였다. 셋 모두 간호사 복장에 이불이나 모포 같은 것을 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병원의 간호사들인 것 같았다.

    남자들이 무력으로 점거하고 있는 곳에 간호사들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라. 시국이 시국인 만큼 그녀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지 굳이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구석에 뭉쳐서 덜덜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 손전등 불빛을 비추며 조금씩 접근했다. 그녀들은 총을 들고 있는 내가 무서웠는지 구석으로 더 파고들기만 했다.

    "괜찮습니다. 전 군인입니다. 이곳에 갇힌 민간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작전중입니다."

    "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신 거예요?"

    "1층에 있는 의사 분들이 협력해주더군요. 이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그, 그...총 너무 무서운데...그것좀 치워주면 안 돼요?"

    셋중 가장 어려보이는 간호사의 말에 나는 총구를 내렸다. 총은 상대방을 쏠 의사가 없을 때는 기본적으로 총구를 내리거나 올려야 한다. 가장 중요한 안전수칙이다.

    "자 이제 됐습니까?"

    "그, 정말로 군인 맞으세요?"

    이번에는 셋중 가장 나이들어보이는 간호사, 명찰을 확인해보니 김선혜 씨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막말로 나또한 이곳을 무력점거하고 있던 폭도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요. 이 장비들 보이십니까? 전부 최전방 군부대 소속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장비들입니다. 뭣하면 1층에 다함께 내려가서 의료진들에게 교차 검증을 부탁해도 됩니다."

    "그건 좀......!"

    내가 자신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방심한 틈을 타서 죽이거나 해코지를 할까봐 걱정되는 걸까?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전 여러분을 해코지 하거나 협박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여러분들을 발견하자마자 총부리 들이밀면서 협박부터 했겠죠.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까지 논리정연하게 말해주면 총격전 때문에 패닉에 빠진 민간인이라도 어느정도 진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6명의 폭도를 직접 처리하고 왔는데 이게 싸이코패스 살인마인지 직업정신 투철한 군인인지 어떻게 구분하겠나? 당연히 이해한다.

    "죄송하지만 그...군인 분들은 군번줄 같은 걸 메고 다니신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이건 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방학역에서 군인과 만났을 때처럼 능숙하게 답변을 회피했다.

    "소수정예 비밀 작전중이라서 개인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는 요소는 전부 배제한 상태입니다. 국정원 요원들이 사회적 신분을 말소하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저또한 이런 비밀 작전을 수행중일 때는 군번줄이나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습니다."

    "그, 그럼 하다못해 얼굴만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맞아요. 솔직히 고글이랑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려놨는데 너무 수상해 보이잖아요......"

    "얼굴이라도 알아놔야 나중에 해코지 못할 거 아니에요?"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달라는 그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 저도 여러분들에게 얼굴을 확실히 내보이기 전에 한 가지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그냥 간단한 절차 같은 거니까 편하게 생각하시고 답변해주시면 됩니다. 동의하시죠?"

    내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자 그녀들은 서로를 마주보다가 이내 동의했다. 내 질문에 먼저 답한 다음 가까이서 내 얼굴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사였다.

    "좋습니다. 그럼 가장 나이가 많으시니까 가장 경력도 오래 되실 것 같은 김선혜 간호사님. 환자가 갑작스럽게 심정지 무호흡 상태에 빠졌습니다. 명백한 응급상황이죠. 이때 간호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의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응급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당연하지만 심폐소생술(CPR)을 해야겠죠? 이때 심폐소생술의 정확한 횟수 및 추가 응급조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 아니, 그, 갑자기 무슨 그런 질문을......."

    "대답해보세요 5초 드리겠습니다."

    "10회 가슴 압박 후 119 신고?"

    탕!

    권총으로 김선혜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119 요청은 환자 발견, 혹은 사건 발생 즉시 불러야 하는 첫 번째 행동이고 가슴 압박은 30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간호사가 이걸 모를 수는 없다.

    내가 일부러 '김선혜 간호사님' 이라고 운까지 띄웠는데도 말이지.

    "꺄아아아아악!"

    "흐아아아아아?!"

    "안타깝게도 김선혜 씨는 간호사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간호사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정말로 김선혜 씨가 맞긴 했던 걸까요? 비밀은 이제 두 분만이 알고 계시겠죠."

    나는 피와 뇌수 범벅이 된 두 명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악을 지르게 만든 다음 다시 총구를 겨눴다.

    "그쪽은 이숙희 간호사님이시네? 다리가 부러진 환자에게 부목을 대는 방법에 대해서 한 번......"

    "그, 그만! 그만해주세요! 저희가 다 잘못했어요!!"

    "누가 모른답니까? 당연히 잘못하셨죠. 폭도 새끼들이랑 붙어먹던 년들이 간호사 코스프레 하면서 호시탐탐 날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니까."

    이미 고인이 된 김선혜(가칭) 씨는 대담하게도 모포 안쪽에 군용 대검을 숨겨두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발버둥치면서 모포가 흘러내리자 추악한 속셈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인질과 물자는 함께 두지 않거든요. 특히나 이런 시국에는 물자 관리가 생명인데 인질과 물자를 함께 두는 멍청한 놈들이 어딨겠어요? 무기도 있고 힘도 센 남자들이 왕 노릇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남편이나 애인의 보호를 받으며 여왕 노릇 하고 있었겠죠? 내 말 틀린가요?"

    "맞아요! 다 맞으니까 제발......!"

    탕!

    "다 맞으면 죽어야지. 원래 무장폭도와는 협상하지 않는 법이거든."

    이들이 그냥 남편이나 애인들이었던 무장 폭도들의 기세에 눌려서 조용히 지냈을 뿐이라면 나도 총을 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출하러 온 군인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속이면서 기습할 틈만 노리고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명백하게 살인 의도를 품고 있었던 살인미수범들이란 얘기다.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안락한 공간과 대량의 생존물자를 포기하기 싫어서 날 죽이고 자신들이 새롭게 무장할 생각이었겠지. 그러려고 대검까지 숨기고 있던 대담한 여자들 아닌가?

    "흐윽...흐윽...끅!"

    "진짜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들, 혹은 일반 여성들은 어디에 있죠?"

    "7, 7층요...7층에 다 있어요."

    인질들은 도망치지 못 하게 7층에 묶어두고 무장폭도들은 6층에 거주하면서 5층과 7층을 동시에 감시했다는 얘기가 된다. 악랄한 새끼들.

    "이런 시국일수록 서로 돕고 사는 게 정상 아닌가요? 기술도 있고 힘도 있는 사람들이 의료진들과 함께 한다면 이 병원을 충분히 요새화할 수 있었어요. 무장한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외부 물자를 확보하고, 병원에 남는 사람들이 병원을 지키면서 요새화 작업만 했어도 충분히 풍족하게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멍청한 선택을 했어요?"

    "그, 그게...우리라도 살아남으려면...독해져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위협 속에 던져두고, 자신들은 여기서 호의호식하면서 왕노릇 했다?"

    철컥.

    "차라리 철저하게 주변을 배척해서 자신들만 생존을 꾀한다면 이기적이긴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요. 남의 목숨보다 내 목숨이 더 소중한 건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남의 목숨을 쥐고 흔들면서 노예처럼 부려먹는 행위는 짐승 새끼들도 안할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에 동조해서도 안 되는 거고. 혹시 다음 생이 있다면 좀 더 양심적인 인간이 됩시다."

    탕!

    마지막 '무장폭도'까지 모조리 진압한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7층으로 올라가 입구를 막고 있던 바리게이트를 뜯어낸 다음 인질로 잡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생존물자 창고에 있던 세 명과는 달리 인질로 잡혀있던 여성들은 정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크게 지치고 상처받았을 그녀들에게 상황이 모두 끝났으니 아래로 내려가서 의료진들과 합류하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던 도중, 계단에서 마주친 것은 뒤늦게나마 우르르 몰려온 남자들이었다.

    환자들의 생명, 자신들의 생명을 모두 무장폭도들에게 저당잡혀 있던 자들이 총성이 멎은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거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선 질책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의사들에게 군을 전역한 사람들 위주로 알아서 총기로 무장하고, 상황을 정리하라는 말을 건넸다.

    자신들만이 아닌, 남겨진 환자들과 인질들의 목숨까지도 생각해서 온갖 핍박을 견디며 꿋꿋하게 병원에 남아있던 사람들이다. 이제와서 자기가 빈 왕좌를 차지하겠다고 날뛰는 머저리는 없겠지.

    난 똑똑한 그들의 머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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