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30화 (30/211)

[손상된 기록]

나는 똑똑한 사람들의 머리를 믿는다.

고학력자에 박학다식한 그들은 소위 엘리트 계급에 해당하며, 일반인들과 다르게 특출난 재주를 하나둘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똑똑하거나 능력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리더에 걸맞다, 그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똑똑한 것과 인성, 가치관, 사상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들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을 믿고, 특정 사상에 물들어있으며, 우민들처럼 쉽게 선동당하기도 한다.

'그 똑똑한 의사들이 비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거대한 병원에서 소수의 생존자들끼리 뭉쳐 지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저들도 알 것이다. 하물며 안전이 최우선이라면 군대라고 밝힌 우리들에게 적극 협조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협조하기는커녕 배척하는 것도 모자라 굳이 비효율적인 선택까지 했다. 자신들을 구출해줄 유일한 구명줄인 우리에게 자진해서 반감을 산 것이다.

의사인 자신들의 가치를 아니까?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치곤 너무 날선 반응이었다.

'군인의 보호도, 안전한 피난처도 거부할 만큼 매력적인 뭔가가 이곳에 있는 거야.'

혹은 외부의 모든 것을 배척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공포가 자리잡고 있거나.

좌우간 나는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병원 부지를 크게 우회했다. 병원 뒷문은 예상대로 셔터가 내려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문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정도면 무너질 일은 없겠어.'

건물 외벽에 쭉 이어져 있는 배수관을 가볍게 두들겨 보니 제법 튼튼했다.

나는 강화 외골격 파츠를 착용한 양팔을 뻗어 순수한 팔의 근력만으로 배수관을 타고 올랐다. 너무 무거우면 어깨 근육이 파열되거나 팔이 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내 배낭은 아직 가벼운 상태였다.

'좋아, 닿는다.'

대충 4층 높이까지 올라온 나는 다리를 옆으로 쭉 뻗어 외부 발코니로 이동했다. 의사들의 휴식터인지 담배를 태우는 장소에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누구보다 건강으로 잔소리를 많이 하는 직업이 의사지만, 정작 그런 의사들도 술과 담배를 달고 산다.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 그런 사람들이 대체 어쩌다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외부 발코니는 4층 높이라 의사들도 외부인의 침입 걱정없이 편하게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영하 기온이긴 하지만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싶을 때 종종 사용하는 것이리라.

당연하게도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빠르게 내부를 훑었다. 한전병원 내부는 굉장히 깔끔한 모던풍 인테리어에 시설도 최신식이었다.

밝은 불빛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면 좀 더 친숙하게 느껴졌을 텐데, 사람도, 불빛도,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이곳은 흡사 폐건물 같았다.

'4층은 병동이군. 1층은 데스크와 환자 대기실, 그리고 매점이나 화장실이 대부분이겠지. 2층부터 3층까지는 각 의과 진료실과 처치실, 비품 창고 등이 있을 테고.'

병원 구조는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다. 이렇게 큰 병원은 환자나 방문자들의 편의성을 고려해서 응급실을 제외하면 대부분 매점이나 대기실, 화장실만 배치해둔다.

병원이 큰 만큼 여러 의과 진료실과 다양한 검사실은 한 층에 다 우겨박을 수 없으니 최소 2개 층 정도는 쓰고 있을 터.

복도를 나와서 살펴보니 역시나 죄다 병실 뿐이었다. 복도 중앙에는 환자이송용 엘리베이터와 일반인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존재했다.

'난방이 되지 않아서 실내도 사실상 냉장고나 다름없군. 환자들이 많이 죽거나 병들었다는 건 사실이겠지.'

나는 구태여 아래로 향하지 않고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병원에서 권위있는 과장이나 센터장, 병원장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의 높은 층에 개인실을 둔다.

'창가에서 우릴 감시하던 놈들은 대부분 1층이나 2층에 몰려 있었어.'

그렇다면 그들을 부려먹는 자, 혹은 묶어둔 자는 반드시 위층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깥에서 병원 건물을 살펴봤을때 유독 높은 층만 창가에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외부 감시를 하고자 한다면 높은 층에서 감시를 하는 게 맞고, 안전한 곳에 숨고자 한다면 지하가 어울린다. 그런 간단한 상식도 모를 만큼 의사들은 무식하지 않다. 누군가가, 혹은 뭔가가 그들을 무식하게 만들고 있는 거다.

'얼씨구.'

5층을 무사히 통과해서 6층으로 향하려던 찰나, 나는 계단을 오르는 대신 복도의 커다란 기둥에 몸을 숨겼다.

누군가가 6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바리게이트를 쌓아두고 문짝까지 떼서 붙여놨다. 마치 손님을 골라받는 것처럼.

계단 중앙을 막고 있는 바리게이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6층의 복도에서 간간이 울려퍼지는 발소리가 거슬렸다. 중앙 계단을 막아둘 정도라면 비상계단도 꼼꼼하게 막아뒀겠지.

'바리게이트에 문짝을 그냥 붙여놓은 게 아니라 용접까지 해놨어. 전문가의 실력이다.'

나는 그제야 의사들이 왜 이런 날씨에도 거추장스럽기만한 흰 가운을 걸치고 돌아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걸칠만한 게 없는 거다.

'자세히 보면 복도에 뭔가 대량으로 질질 끌고간 흔적이 있다. 병실 문도 아무렇게나 열려 있고. 위층에 있는 놈들이 물자를 독점한 건가?'

가능성 있다.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식량과 의류를 비롯한 생존물자를 가지고 위로 올라간다음, 저들끼리 바리게이트를 쌓아서 막았다면 나약한 의료진들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하지만 의사들이 왜 1층과 2층에 묶여있는...아!'

수술실.

병원의 영안실과 수술실은 주로 지하에 있다.

그렇다면 약간의 가설과 억측을 더해보자.

정체불명의 집단이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생존물자를 모아서 6층으로 올라가버렸고, 6층으로 올라가는 모든 길을 막았다. 전력이 들어오지 않으니 엘리베이터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터.

하지만 의사들이 필요한 정체불명의 집단들은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가했을 것이다.

1, 2층에 머무르며 지하의 '그것'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외부인의 침입을 저지해라. 그렇게만 하면 주기적으로 생존물자를 나눠주겠다.

'병원 앞의 편의점은 이미 털려있었으니 의료진들은 생존물자를 직접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1층의 매점도 진즉에 털린 상황이라면 방한 대책이 안된 의사들이 무조건 불리해.'

우리가 군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섣불리 믿지 않고 경계부터 한 이유도 워낙 소수인데다,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외부인의 침입을 저지하라는 협박까지 당하고 있으니 우릴 내보낸 것이리라.

'그래서 다음에 올땐 군 부대와 함께 오라고 한거군.'

소수인 우리를 믿지는 않겠지만, 다수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던 이선욱의 대답.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똑똑한 머리로 상황을 타개하는 대신, 그냥 강자의 말에 순응하면서 추하게 살아남는 방식을 택한 거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우린 무장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건......

'놈들도 무장했군.'

다시 한 번 지도 어플을 켜서 확인해보니 한전병원 인근에만 파출소가 3개나 있었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규모가 큰 서울강북경찰서도 있다.

무장폭도들이 이 병원을 무력점거 하고 있을 가능성? 99.99%다.

'멍청한 새끼들. 서로 상부상조 해도 모자랄 시국에 가장 귀한 인재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어?'

나는 더 지체할 것도 없이 6층 계단을 막고 있는 문짝을 잡았다. 강화 외골격 파츠 덕분에 근력이 대폭 상승한 상황. 순수하게 팔힘만 따지면 고릴라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우드드득! 쾅!

용접된 문틀을 잡고 금속문을 강제로 뜯어냈다. 그러자 총성보다도 훨씬 더 요란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빨리 나가봐 이 새끼들아!!"

위층에서 들려오는 굵은 남성들의 목소리. 심약한 의사들과는 분위기부터 다른 자들이었다.

"대체 무슨 일......!"

팡!!

소음기를 착용한 소총이 어둠속에서 탄환을 내뱉었다.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내려오던 사내는 정확히 미간이 꿰뚫리며 성대하게 넘어졌다.

"치, 침입자다! 침입자!!"

"저새끼도 총 들고 있어 씨발!"

"몇 놈이야?!"

"나도 몰라!!"

갑작스럽게 울려퍼진 총성, 누군가의 죽음, 졸지에 안락한 거처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바뀌게 생겼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

타타탕!

대한민국 남성들 대부분은 총기를 다룰 줄 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련한 30대들은 어지간한 20대보다 훨씬 더 빠릿빠릿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점사로 끊어 쏘는 걸 보니 감각이 있는 놈이군.'

사람이 정말 크게 당황하면 냅다 연발로 갈겨버리는 경우도 허다한데,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복도 끝자락에서 총을 쏜 놈은 점사로 당겼다.

하지만 놈들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날 이길 수 없다.

한 손에는 강제로 뜯어낸 금속문, 다른 한 손에는 강화 외골격 덕분에 편하게 들고 있는 소총, 그리고 이상학에게서 빌린 야투경. 지금의 나는 보병도살자나 다름없었다.

티잉! 태애앵!

눈먼 총알이 날아와 문짝을 두들겼지만 육중한 통짜 금속문이라 도탄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오른쪽 복도 끝에 둘, 기둥 뒤에 하나, 환자이송용 침대 뒤에 하나.'

계단 끝자락까지 올라온 나는 적당히 금속문을 앞에 세워두고 열심히 빼꼼거렸다. 저들이 암순응이 됐다고는 하나, 어둠에 몸을 숨긴 내 움직임을 꿰뚫어 볼수는 없다.

팡! 팡!

단발로 끊어 쏜 두 발의 탄환이 정확히 복도 끝에 있던 두 명의 미간과 가슴팍을 날렸다. 가슴팍이 꿰뚫린 놈은 아직 죽지 않았는지 울컥울컥 피를 게워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아아아아! 이 개새끼야!!"

트다다다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놈이 참다 못해 옆으로 휙 튀어나와 총을 연발로 당겼다. 초기형 K-2 소총이었다.

'총소리가 좀 다른데. 처음에 파출소를 털어서 M16 소총을 확보하고 그 다음에 군인들을 털었나?'

뭣모르고 튀어나온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제압사격을 가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이윽고 내 소총의 탄약이 먼저 떨어진 것을 눈치챈 상대가 침대 뒤에서 뛰쳐나왔다.

"븅신."

탕탕탕!

"끄흑......!"

소총을 뒤로 치워버리고 재빨리 권총을 뽑아 놈의 가슴팍에 먹여주었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서로 들고 있는 총이 제각각이었다.

권총에 당한 놈은 정말 파출소에나 짱박혀있을 법한 구형 샷건을, 복도 끝에서 엎어진 놈들은 M16을, 기둥에서 겁없이 뛰어나온 놈은 K-2를.

무슨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무장 수준이나 지휘 계통이 이렇게 엉망이란 말인가.

'내가 죽인 건 다섯 명. 하나같이 군용 방탄조끼와 경찰 조끼등을 착용하고 있다. 작정하고 움직인 새끼들이군.'

이런 놈들이 꼭 있다.

세상이 좆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좆같은 악당이 되겠다며 서슴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 무장도 얼추 갖춘 걸 봐선 죽인 사람도 최소 두자리 수일 것이다.

이미 차갑게 식어가는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금속문을 방패 삼아 복도를 거닐었다. 인기척이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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