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9화 (29/211)

[손상된 기록]

"이선욱입니다. 한전병원에서 순환기내과 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40대에 가까워보이는 30대 추정 중년 남성이 살짝 경계하는 어조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나 역시 군인이라는 이름표를 팔았기에 적당히 수방사 소속임을 밝혔다. 김한솔과 이상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설명을 덧붙인 것으로 통성명은 최대한 간결하게 끝냈다.

"통성명은 이쯤하면 된 것 같고, 보다시피 저흰 약탈자들이 아닙니다. 치료가 필요한 친구 때문에 부득이하게 병원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건 보면 알 것 같습니다만...현재 저희 병원측은 외부에서 오신 분들과 가급적 대면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때아닌 사회적 거리두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들것에 실려있는 이상학을 슬쩍 바라보면서 비아냥대자 이선욱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국방의 의무를 지켜야 할 당신들이 우리부터 먼저 구하지 않은 게 잘못 아닙니까? 이 병원에서 전기가 끊긴 것 만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골병이 들었는지 알긴 합니까?!"

"저희야 상층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지휘체계도 지키지 않는 군인들은 그냥 무기 든 폭도입니다. 저희가 받은 명령에서 생존자를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구출하라는 내용은 있었지만 '한전병원'의 의료진과 환자들을 콕 집어서 구출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생존자를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구출하라는 명령도 없었다. 이미 선택받은 자들만 지저 도시로 대피한지 오래였으니까.

우리가 군인이라는 이름표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잖아요! 만약 정말로 군 부대가 주변에서 생존자를 수색하고 구출 작업을 벌이고 있다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죠? 수송차량이나 헬기는 다 어디 있는데요?!"

이번에는 옆에 있던 다른 의사가 치고 나왔다. 그는 이선욱에 비해 훨씬 젊어보이는 청년 의사였다. 아마 레지던트이거나 펠로우 닥터일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나서 직접 바깥으로 나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해서 모든 출입구를 닫았습니다."

"외부인을 막은 이유는요?"

"그거야 뻔하잖습니까! 이런 국가적재난사태에서 가장 위험한 건 물자가 가득 쌓여있는 상점과 의료용품이 가득한 의료시설입니다.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 치곤 외부인에게 지나치게 적대적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 이들은 외부인인 우리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줬음에도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환자의 몸에 칼 대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걸까?

나는 직감적으로 이들에게 뭔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선 우리쪽 동료의 상태부터 봐주십시오. 병원에 큰 문제가 없다면 지금 의료진들과 의료용품만으로도 충분히 동료의 상태정돈 봐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뭐, 뭘 믿고 우리가 당신들을 봐줘야 합니까? 실제론 우릴 구출하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오히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어떤 인재보다도 귀중한 의료인들을 포기할 군대와 정부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소재를 파악했으니 이대로 우리 부대와 함께 이동하면 됩니다."

"아, 아무튼 안 됩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군인인지, 아니면 군 부대를 약탈해서 군인인척 하는 사기꾼들인지도 모르는 마당에...억?!"

나는 아까부터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선욱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신 지금 사태 파악이 안돼? 우리가 진짜 약탈자였다면 당신들이 입 털기도 전에 먼저 머리통 터뜨리고 병원부터 털었겠지. 우리가 좀 더 막나가는 새끼들이었다면 좀 더 잔인한 짓을 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지금 우릴 봐. 우리가 정말 사기꾼에 약탈자들인 것 같아? 아니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군인인 것 같아?"

"시, 시발! 나한테서 당장 떨어져!!"

내가 총구를 들이밀면서 협박했음에도 그는 오히려 나와 가까이 붙어있다는 사실에 소름끼친다는 양 행동했다.

내가 잡아챈 흰 가운을 재빨리 벗어서 던져버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소독액 분무기를 미친듯이 자신의 상의와 손에 뿌렸다. 결벽증 환자도 저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잠깐. 자세히 보니......'

나는 그제야 이들이 품고 있는 이질감이 뭔지 알아냈다.

다들 방한용 마스크나 목도리가 아니라 의료용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또한 얼굴에는 침이 튀지 않도록 보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방한 대책으로 아무거나 몸에 걸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이미 외부인과 접촉했었군요?"

"!"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언제였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죠?"

"우, 우리가 왜 그걸 당신들에게......!"

"어렵게 가지 맙시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똑똑한 양반들이 의사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방한에 대비하는 게 아니라 '방역'에 대비하고 있다? 어지간히 멍청한 사람이 아니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겁니다."

"......"

"그럼 이렇게 해보죠. 예를 들어보는 겁니다. 한전병원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출입구를 폐쇄하지 않은 상태였을 겁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죽고 사는 양반들이니, 세상이 이 지경이 되더라도 불쌍한 환자들을 돌려보낼 순 없었겠죠. 그러던 중 매우 특이한 환자를 받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일부러 말꼬리를 흘리며 의사들의 시선이나 움직임을 살폈다. 특정 키워드가 심리 변화의 트리거가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유명한 무당이 다짜고짜 손님이 처한 상황을 먼저 밝혀내면 손님이 깜짝 놀라는 것처럼.

"눈이 사라진 환자라던가."

"!"

예상대로 반응이 있었다.

"그렇게 날이 선 반응들을 보이시니, 그때의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겠네요. 응급실, 혹은 수술실로 옮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소란이 있었을 겁니다."

눈이 없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을 잃는 사람. 눈이 없다는 공통적인 키워드가 딱 맞아떨어진 시점에서 이들에게 뭔가 있었음은 확실했다.

"봉사정신이 투철하신 분들이니 당연히 환부 소독과 검사를 위해 의료진 여럿이 달려들었을 테고, 결국 긴급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겠죠. 그도 그럴 게 눈이 없는 환자였으니까."

"......"

"병원은 전력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비상발전기를 켜서 어떻게든 의료설비를 가동했을 겁니다. 연명치료가 필요한 환자들, 긴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잔뜩 있었을 테니까요. 눈이 없는 환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리고 그 환자를 수술실에 들인 순간...아니, 수술을 진행하던 도중...그래, 수술을 진행하던 도중에 어떤 문제가 터졌을 겁니다."

나는 유도신문을 하듯 그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살피며 추측을 이어나갔다. 똑똑하기로는 국내 최고인 양반들이지만 교묘한 심리전에는 매우 약했다.

"여러분들은 봤을 겁니다. 검은 피, 검은 안개, 그리고...의료진을 공격하는 환자."

"그만!!"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이선욱이 내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내 추측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래! 맞습니다! 보호자가 자기 아들이 갑자기 눈을 다쳤다면서 병원을 찾았고, 우린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려다 마지못해 그 환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우리들만으로 수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더미였는데...울면서 부탁하는 보호자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외부인을 받았고, 사건이 터진 거 아닙니까."

"...처음엔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술실 CCTV를 확인하고 있던 병원장님이 원격으로 수술실 문을 잠궈버린 후에야 뒤늦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병원장님이 직접 의료진들을 불러모아서 CCTV 화면을 보여준 후에야 다들 믿은 겁니다. 이게 현실이라고."

"병원장은 어떻게 됐죠?"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습니다."

안봐도 뻔했다.

뭔가 사고가 터진 수술실, 상황이 잘못됐음을 눈치챈 의료진들이 수술실에서 '그것'과 함께 빠져나가기 전에 원격 제어로 문을 잠궈버린 병원장,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화면 너머로 수술실 내부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두가 확인했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낀 병원장은 노련한 의사인 만큼 손쉽게 자기자신을 죽이는 법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마취제를 과다투여하면 되니까.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상황은 이해합니다. 현재 군에서도 그러한 사태를 파악중이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이런 얘기를 꺼냈겠습니까?"

"알면 됐습니다. 우린 더이상 외부인을 받고 싶지 않으니, 정말로 우릴 구출하겠다면 다음에는 군 부대와 함께 오십시오. 그때는 우리들도 협조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예? 하지만......!"

"그냥 갑시다."

김한솔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우리는 다시 이상학을 들고 왔던 길을 통해 되돌아나갔다.

저들은 우리가 지하 주차장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문에 바리게이트를 쳐서 막았다. 절대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그냥 총으로 협박해서 이 뱀 상태만 확인하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총으로 협박한다고 해서 저들이 진정성 있게 이상학 병장님을 봐줄 거란 보장이 있습니까?"

"아니 총으로 위협하면 그정도는 당연히......"

"아니죠. 우린 의학에 대해서 쥐뿔도 모릅니다. 막말로 의사가 전문용어 남발하면서 주사를 놓거나 약을 처방해주면 일반인인 우리가 그게 뭔지 알긴 합니까? 막말로 포도당 수액이랍시고 마취제를 놔버린다면? 진정제랍시고 각성제를 놔버린다면? 감기약이랍시고 독한 항암제를 준다면? 의사이자 약사이기도 한 저들에게 신뢰를 잃은 상태로 환자를 맡기는 것 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우리한테 된통 당할 게 뻔할 텐데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의사정도면 약을 써서 시간을 버는 것도 어렵지 않죠. 겉보기엔 치료하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수면제와 진정제만 써서 환자를 계속 재울 수도 있죠. 그러다 우리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어서 치사량의 약물이 든 주사기나, 약물을 묻힌 거즈로 저항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들은 절대로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법이 그들을 구속하고 있었던 거죠."

법치주의가 사라진 지금, 의사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유일한 치료자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행여라도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 전인류가 손해인 직업이 의사다. 의사들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현대 인류가 짊어져야할 리스크는 더더욱 커진다.

"우선 한전병원 앞 편의점으로 가죠."

"편의점은...이미 다 털렸습니다."

병원은 멀쩡했지만 병원 앞 편의점은 이미 약탈자들이 한 번 휩쓸었는지 엉망진창이었다. 유리창은 죄다 깨져있고 텅 빈 선반은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었다.

우리는 우선 편의점 안쪽 창고에 이상학을 눕혔다.

"김한솔 상병님은 여기서 이상학 병장님을 지켜보세요. 뭔가 이상하다, 잘못됐다 싶으면 주저없이 처리하시고."

"자, 잠깐! 처리하라니!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얘기 들었잖아요. 이상학 병장님이 필요이상으로 호전적인 반응을 보인다, 인간다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싶으면 방아쇠를 당기라는 겁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전 병원에서 못 끝낸 일을 마저 해야겠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일을 끝내면 다시 이상학 병장님을 안으로 모시죠. 아니면 다시 이상학 병장님을 들고 랑데뷰 포인트로 복귀할 수도 있고요."

"...정말로 일 끝내면 돌아오실 겁니까?"

"그럼 제가 밀수조직에서 배제 당할 것도 감수하고 일부러 군인을 둘이나 죽게 내버려둘까요? 이래 봬도 전 감정보다 상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병원에서의 일을 떠올린 김한솔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와 이상학을 편의점 창고에 남겨두고, 조용히 병원부지를 크게 돌았다. 야투경으로 병원을 살펴보니 역시나 병원 본관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몇 명인가 있었다.

"뭘 그리 숨기고 있는지 한 번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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