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8화 (28/211)
  • [손상된 기록]

    최전방 군부대 출신으로써 감히 말하자면, 자연은 절대로 조용하지 않다.

    춥든 덥든, 어둡든 밝든, 수풀이 무성하고 목림이 우거진 자연환경은 희미하게나마 소리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절대로 인공적이지 않다.

    풀벌레 소리,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 동물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는 소리, 거기서 우리는 자연의 생태계를 느끼지 인공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뱀, 방금......"

    "쉿."

    이상학 병장이 김한솔 상병의 입을 막았다. 대대장이 나름 신경써서 뽑은 애들이라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두 분 다 눈치채셨겠지만 지금의 지상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그때의 지상이 아닙니다. 추위나 어둠보다도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아진 극한의 생태계가 조성됐죠.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할 건, 우리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같은 사람들도 말입니까?"

    "그게 사람인지 아닌지는 겪어보면 알 겁니다."

    나는 강화 외골격 암즈(팔 부위)와 함께 소총용 소음기를 지급받았다. 덕분에 여차하면 총을 쏴야할 상황에서도 깊게 고민할 필요를 조금 덜었다.

    첫 작전에서 총성 한 번으로 대형사고가 터졌기 때문에 밀수조직들이 자체적으로 소음기를 제작하거나 군을 통해 구매한 것이다.

    물론 현대의 공업 기술이 아무리 좋아졌다고한들, 소총용 소음기가 영화에서나 나오는 소음 효과를 재현하진 못 한다. 소리를 최대한 줄인다고 해도 샌드백을 발로 걷어차는 수준의 소음은 터져나올 것이다.

    "두 분은 아직 지상 작전이 익숙하지 않으실테니 야투경 착용하십쇼."

    수방사 소속의 군인들의 최대 장점은 최전방 군 부대 못지 않게 장비가 빠방하다는 거다.

    그래서 중장갑보병들 비율도 육군내에서 압도적이고, 필요시 소음기나 홀로그래픽 조준경, 야투경도 지급한다. 중무장을 했다는 말은 팩트 그 자체였다.

    "도로 양옆으로 수풀이 무성해서 뭘 보려고 해도 잘 안 보일 겁니다. 설령 뭐가 보이더라도 큰소리를 내거나 과하게 반응하지 마시고 위치만 알려주십쇼. 수신호를 사용하면 더 좋습니다."

    나는 야투경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암순응이 끝난 덕분에 도로를 따라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야투경이 필요없었다.

    '중장갑수색대 시절에 야간 차단 작전과 산악 침투 작전만 죽어라 한 게 도움이 될 줄이야.'

    생물학적으로 눈이 트였다는 게 아니라, 그냥 감각이 넓어졌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움직이면 반드시 소리가 난다. 시야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소리는 입체적이다.

    바스스.

    우측 3시 방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에 나는 다시 한 번 야광봉을 구부렸다. 그리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높이 던졌다.

    바스스스!

    '역시 빛에 민감해.'

    나는 지난 작전들을 통해 수집한 놈들의 정보를 정리해서 성향이나 습성을 분석했다. 정체까지 알아내는 건 무리였지만 아슬아슬하게 대응책을 마련하는 건 가능했다.

    우선 놈들은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면 소음보다 빛을 우선시 한다. 반대로 빛이 없을 경우 소음을 우선시 한다. 또한 강렬한 빛이나 방해소음으로 움직임 유도할 경우 쉽게 낚여서 우리를 발견하지 못 한다.

    빛이 보이면 호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빛, 혹은 자신들을 불태울 정도로 강력한 불은 두려워한다.

    머리를 제외한 약점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급소란 없으며, 피해에 따른 신체 능력 저하도 사지 절단이나 골절이 아닌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탄환으로 뇌를 관통시키거나 강력한 일격으로 머리를 부수기, 혹은 목 절단만이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언어 능력도 상실된 상태였지.'

    2회째 작전에서 학교 근처를 정리하기 위해 작전을 진행하던 도중 만난 놈들에게 시험삼아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기괴한 비명소리와 함께 섬뜩한 공격들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둠을 좋아하며, 열기에 내성은 없지만 추위에는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지. 우리에겐 지옥같은 이 지상이 놈들에겐 최고의 낙원이나 다름없는 거야.'

    쭉 걸어내려가면 대략 10분 정도 걸리는 도로는 차량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상태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원의 수풀과 가까운 인도쪽에 붙어서 걸어야 했는데, 수풀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기 바빴다.

    비교적 가까운 장소에서 들리는 소음에 다시 한 번 야광봉을 집어던진 찰나, 바로 뒤에 붙어서 오고 있던 이상학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돌아보니, 그는 필요이상으로 덜덜 떨면서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먼 곳을 바라보듯이.

    주변에서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어, 그그그, 어어......"

    "!"

    자세히 보니 그는 방한용 목도리 아래로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침이 추위때문에 얼어서 고드름처럼 변한 상태였다.

    나는 혹시 몰라 그의 뒤를 따라오던 김한솔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별 문제 없어보였는데, 갑자기 멈춘 이상학을 의아해하며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이상학의 야투경을 위로 밀어올린 다음, 미니 손전등으로 그의 눈가에 빛을 비췄다. 고글 속의 그는 동공이 풀려있었고 시선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패닉? 갑자기 패닉 상태라고?'

    덜익은 짬 냄새 때문에 코를 막아야 하는 이등병이나 일병도 아니고, 무려 병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갑작스럽게 패닉에 빠지는 상황이 있을 수가 있나? 전조도 없이?

    나는 일단 김한솔에서 수신호로 이상학의 상태를 알렸다. 패닉에 빠진 군인에게 가장 먼저 해야할 행동은 안정시키는 게 아니다.

    -제가 총을 뺏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쇼.

    뒤에서 다가온 김한솔이 조심스럽게 이상학의 소총을 빼앗은 다음 내가 그의 목을 받치면서 가슴을 짓눌렀다.

    졸지에 새드 엔딩을 표현하는 연극 배우처럼 그를 길바닥에 눕혔다.

    "이 뱀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패닉이 왔습니다. 혹시 뭐 이상한 거 못 봤습니까?"

    "전 이 뱀 때문에 앞쪽 시야가 막혀서 측, 후방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상학 병장님이 전방에서 뭔가를 봤다는 건데...혹시 지금 뭔가 보입니까?"

    "차량 빼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도로 전체가 텅 비었습니다."

    패닉이 오면 자력으로 호흡하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심리적인 압박감을 덜어주고자 일단 그의 목도리를 풀어헤쳤다.

    뭔가 자꾸 답답한 것 같고,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곧바로 패닉에서 과호흡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금 그가 발작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고글에 손전등 불빛을 비췄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들것에 실어서 끌고가야겠습니다. 혹시 군대에서 뭐좀 챙겨오라고 포대 자루같은 거 주지 않았습니까?"

    "아, 있습니다."

    "그럼 그거랑 길이조절이 가능한 야전삽도 같이 꺼내세요. 두 사람이니 야전삽도 2개겠죠? 포대 자루랑 야전삽을 연결해서 임시 들것으로 만듭시다.

    한국군 야전삽은 너무 짧다는 단점이 제기되서 최근 군수업체가 아예 길이 조절이 가능한 야전삽을 납품했다고 들었다.

    야전삽의 길이를 최대한으로 늘린 다음, 휴대용 십자 드라이버로 고정 나사를 풀어서 삽날만 빼버렸다. 그리고 포대 자루와 덕테이프를 미친듯이 감아서 구조대원들이 사용하는 들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었다.

    "하나 둘, 읏차."

    "후우......"

    이상학을 들것에 옮긴 우리는 다시 주변 수풀이 바스락 거리기 전에 서둘러 움직였다.

    이번에는 전방에서 신속하게 길잡이를 하는 내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상학의 야투경을 빌렸다. 더이상 야광봉이나 던지며 안전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신경쓰이는 것도 있고.'

    전조도 없이 팀원이 행동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얘기를 첫 작전이 끝날 즈음에 주변인들로부터 들었다.

    그때는 갑작스럽게 피해자의 눈이 소실되었다길래 나도 혹시 몰라 이상학의 눈부터 확인해본 것이다.

    '이상학이 부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뭔가에 의해서 부상자와 같은 상태가 된 건 확실해. 특히 전조도 없이 그렇게 됐다는 점이 신경 쓰여.'

    마치 크리스마스 밤처럼 쥐죽은듯이 고요한 이 세상에서 누가 중무장한 군인을 전조도, 흔적도 없이 무력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후우! 저기 한전병원. 저 병원 맞지 않습니까?"

    "잘 됐네요. 서두릅시다."

    두 사람이 같이 들긴 했어도 짐과 함께 성인 남성을 옮기는 건 꽤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 멀리서 흐릿하게나마 외형이 보이는 병원 건물은 반갑기 그지 없었다. 야투경이 아니었다면 먼저 발견하기 힘들었으리라.

    한전병원 부지는 꽤 넓었고, 건물 양식도 모던풍이라 도시형 인간들에겐 매우 익숙했다. 병원 건물이 네모반듯하고 각져있으면 괜히 더 실력있는 병원일 것 같은 편견도 있다.

    "병원 본관 입구 셔터가 내려가있습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죠."

    병원측에서 먼저 입구 셔터를 내리고 창문을 잠근 것은 전적으로 환자와 의료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인들이니까. 특히 국가적 정전 사태는 의료시설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

    '생명유지장치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부터 죽었겠군.'

    약물 치료나 요양 치료만 하면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는 환자들, 그리고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환자들과 함께 남은 의료진들이 이곳의 생존자 그룹일 것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다음,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문 손잡이를 박살냈다. 소리가 꽤 울려퍼졌지만 지하라서 상관없었다.

    어차피 건물 안쪽에 생존자 그룹이 있다면 그들더러 들으라고 낸 소음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생존자 그룹이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우선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통방중에선 외부 침입과 내부 혼란의 흔적이 뚜렷했지만, 이곳은 버려진 국민들의 소요 사태에서도 빗겨나갔는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쩌면 병원과 환자들을 지키기 위한 의료진들의 행동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빠르고 강경했을 수도 있다.

    아니나다를까, 우리가 지하 주차장을 통해 본관으로 진입하자마자 손전등과 수액 걸이용 철봉을 들고있는 생존자 무리와 마주쳤다.

    다행히 그들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사람들.

    "군인들입니다."

    나는 그들이 오해하기 전에 먼저 군인의 이름표를 팔았다.

    실제로 이상학과 김한솔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고, 나는 외골격 파츠를 달고 있었다. 일반인 입장에선 군인이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했으리라.

    물론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군인이라고 무작정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저들이 깔끔하게 저항을 포기한 건 우리가 가진 소총과 장비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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