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7화 (27/211)
  • [손상된 기록]

    군인들이 갑자기 밀수조직들에게 들러붙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만으로 밀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면 머지않아 밀수조직을 전부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혹은 군대만으로 밀수조직 전체를 대체하는 대신, 적당히 붙어먹으면서 군대의 손해는 최소화, 이익만 최대화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을 수도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향하면서 저들의 목적이 전자일지 후자일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산했다.

    우선 전자가 목적이라면 밀수조직들을 비롯한 북부지구의 민간인들에게 크나큰 반발을 살 것이다. 밀수조직들이 좀 좆같긴 해도 민간인들과 가까워서 시장에 물건 하나는 잘 풀어주니까.

    하지만 군대가 그 자리를 집어삼키면 남은 건 통제 뿐이다. 민간인보단 지저 도시 전역의 군 부대에 먼저 물자가 보급되겠지. 어디 그뿐인가? 생필품이나 사치품은 군 상층부의 뇌물로 더 많이 소모될 거다.

    군 상층부가 본격적으로 뇌물을 받기 시작하면 다음은 정부다. 국회의원들이나 고위 관료(공무원)들이 과연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당연히 자신들에게도 입막음 비용을 달라고 요구하겠지.

    그럼 군 부대가 작정하고 밀수를 해도 민간인에게 돌아오는 물량은 쥐꼬리보다 더 적어지게 된다. 소위 기득권층만 더 부유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건 안 되지. 지금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서민들이 더 부유해져야 해. 서민들의 삶에 지장이 생기는 순간 이 도시는 몇 개월도 채 버티지 못할 거야.'

    가장 좋게 봐도 대규모 파업, 가장 나쁘게 보면 폭동이나 쿠데타가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망한 세상이니 기득권층 싹 죽여버리고 다 무(無)로 돌려버리겠다는 자칭 혁명가놈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겠지.

    그렇게 되면 남은 건 파멸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군 부대의 목적이 후자면 좋겠는데......'

    후자라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관리하는 군 부대가 소소하게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기고자 밀수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니까.

    오히려 서로의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외부에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 할 것이고, 밀수조직들과 연계해서 괜찮은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밀수조직에게 부족한 장비나 '통신망'을 군 부대 측에서 대여해준다던가, 혹은 밀수조직들이 독자적으로 획득한 지상 데이터를 군 부대에게 넘겨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서로의 이익이 걸린 이상 불필요한 싸움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외부 시선도 신경써야 하니 당연히 민심을 위해서라도 민간인들에게 물자를 적극적으로 풀겠지. 그럼 만사 오케이다.

    '상권으로 치면 경쟁 업체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지만, 궁극적으로 다 함께 상생하는 구조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낫다.'

    나는 부디 군 부대의 의도가 후자이길 바라면서, 어느새 지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안타깝지만 차량은 사용할 수 없겠군.'

    한 조직마다 따라붙은 군인들이 6명이다. 게다가 중무장을 한 그들을 모두 승용차에 태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김명호와 똘마니들만 태우자니 군인들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다.

    해서, 나는 공평하게 오늘은 일행 모두 차량을 사용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아예 다음부터는 버스나 트럭을 한 대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후우, 장난아니네. 바깥이 이렇게 추웠나?"

    차도식파 정찰조에 따라붙은 1분대의 분대장, 이상학 병장이 호들갑을 떨면서 입김을 내뱉었다. 아직 격벽은 열리지도 않았다.

    그때 격벽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중위가 확성기를 들고 초소에서 걸어나왔다.

    "전원 고글 착용! 현재 바깥 기온은 영하 25도다! 바깥에서 고글 벗으면 자칫 안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절대로 고글을 벗지마라! 혹시 작전중에 고글이 망가지면 개인 지참한 방독면을 꼭 착용하도록!!"

    """고글 착용!!"""

    마치 노가다판에서 다함께 안전제일을 외치는 것처럼 밀수범들이 일제히 고글을 착용했다.

    어리둥절해하던 군인들도 곧 동계 작전에 쓰이는 군용 고글을 착용했다.

    밀수범들이 일반적인 싸구려 고글을 사용할때 저들은 파편 방어 기능에 김서림 방지 기능까지 달린 군용 고글을 착용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부러웠다.

    "작전을 처음 나가는 군 장병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전파한다. 최대 작전 시간은 12시간이며, 격벽은 총 3번 열린다. 정찰조들이 나갈 때 한 번, 운반조와 대기조들이 나갈 때 한 번, 그리고 모든 인원들이 복귀할 때 한 번. 처음 격벽이 열리면 이후 6시간마다 한 번씩 열리고 닫힌다. 그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격벽이 열리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하도록! 이상!"

    중위가 신호를 주자 격벽 제어 장치 앞에 있던 병사가 격벽을 개방했다.

    드드드드드드! 하고 거대한 진동과 함께 열리기 시작한 격벽 틈새로 영하 25도에 걸맞는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방한 용구를 껴입은 이들도 으슬으슬 몸을 떨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가능하면 모든 인원이 낙오하는 일 없이 무사히 다녀오길 바란다."

    중위는 그 말만 전한 다음 다시 난로가 있는 초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격벽 앞에서 대기중이던 중장갑보병들은 격벽이 어느정도 열리자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정찰조 여러분들은 신속하게 나가주십시오! 잠시 후 격벽을 다시 닫을 예정입니다!"

    이번이 작전 3회째인 밀수조직들은 이 상황에 어느정도 적응되어있는지라, 너나할 것 없이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다.

    정찰조는 6시간 안에 대량의 물자를 확보한 다음, 전령(길잡이)를 돌려보내서 운반조와 대기조들을 랑데뷰 포인트까지 데려온다. 그 후 물자를 확보한 인원들이 다시 6시간 안에 복귀하면 끝.

    고작 작전 3회만에 이런 체계가 잡혔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도 않다. 다들 생존을 부르짖던 절박한 심정에서 효율을 부르짖는 초조한 심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차도식파 나간다!!"

    김명호가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외치자 차도식파 운반조와 대기조들이 박수를 치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응원해주었다. 다른 밀수조직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찰조가 많은 물자를 찾아야 모두 행복하게 지저 도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각 조직내에서 정찰조들의 신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정찰조가 일을 못하면 모두가 빈털털이 신세이기 때문에 책임감 또한 막중했다.

    "이제 갑시다."

    나는 여전히 얼타고 있는 군인들을 인솔해서 격벽을 빠져나왔다. 곧 모든 정찰조들이 빠져나온 격벽은 박정하게도 다시 닫혀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김명호가 실질적 리더인 내게 질문했다. 똘마니들을 이끄는 건 김명호였지만, 정찰조내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건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한수 접어주는 관계였다.

    "통합방학중학교는 두 번째 작전에서 싹 털었으니 더이상 볼일 없습니다. 다른 조직원은 대부분 할인마트나 백화점, 편의점 위주로 털고 있지만 저흰 좀 더 상식적으로 털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GPS 기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위치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기록된 지도 데이터를 보는 건 가능했다.

    "통방중을 지나서 방학 3동으로 내려가면 쌍문 4동이 나옵니다. 그 지점이 대규모 거주 지역이죠. 아파트 단지만 해도 최소 10개가 넘습니다."

    "하지만 아파트를 전부 터는 건 좀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거주지마다 물자가 얼마나 쌓여있을지도 모르고, 또 잠긴 문을 일일이 열고 들어가려면 시간도 걸립니다."

    "왜 제가 가정집을 털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규모가 큰 아파트단지에서 고작 가정집이나 터는 건 당연히 비효율적이죠. 우린 각 아파트 단지에서 구호물자와 기름만 빼낼 겁니다."

    나는 가장 규모가 큰 아파트단지를 손으로 직접 가리키며 역할 분담에 나섰다.

    "김명호 씨가 여기 군인분들 4명을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지하의 대피소를 뒤져보십시오. 이렇게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는 대피소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비상시에 대비해서 발전용 기름과 구호물자를 축적해둡니다. 일반인들은 아파트 대피소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아마 손을 대지 않았을 겁니다."

    "확실히 인원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니 이해는 갑니다만, 그래도 생존자가 아파트 지하 대피소에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땐 생존자들과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부딪칠 수도 있다는 말은 김명호 나름대로 말을 골라서 한 것이다. 실제로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자를 찾으러 나선 사람들과 생존이 급박한 사람들간의 관점 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이니까. 세상이 이 지경이 된지 10일이나 됐으니 슬슬 각자도생을 위해 범죄가 판을 칠 때다.

    살인, 약탈, 강간, 그보다 더한 범죄들이 이미 망해버린 법치주의 국가를 박살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땐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김명호 씨가 대장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김명호도 칼이나 각목 들고 싸우는 양아치 조직원이라 알 건 다 알고 있겠지.

    "그럼 박한성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저는 남은 군인 두 분을 데리고 쌍문 4동 아래로 쭉 내려가서 한전병원을 수색하고 의약품을 확보하겠습니다."

    "아, 확실히 적은 인원으로 움직이기에는 최적이네요."

    병원 하나를 확보하는 건 그리 많은 인원이 필요없다. 의약품이나 생필품이 있는 위치만 알면 되니까. 여기저기 둘러봐야 하는 아파트 단지와 다르게 효율 면에선 병원이 최고다.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걸로 알고 내려가면 인원을 나눠서 움직입시다. 아, 그리고."

    나는 하산 준비를 하는 팀원들에게 한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조직원들과 마주쳤을 시 불필요한 대응은 자제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아파트 단지처럼 굉장히 넓은 장소를 두고 누가 먼저 이곳을 발견했는지를 따지면 밑도끝도 없는 언쟁으로 이어질겁니다. 그럴 때는 적절하게 각자의 몫을 나누는 쪽으로 타협보는 게 중요합니다."

    "상대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군인 빼고 처리하세요."

    군인을 앞에 두고 상대 조직원을 처리하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내게 긴장한 것일까. 분대원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태를 그 지경으로 만든 상대측 조직원들만 처리하고, 군인들에겐 증인이 되어달라고 하면 됩니다. 우린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저쪽이 막무가내였으니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하면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상학 병장님."

    "그, 그건 그렇지만 살인까지는 조금......"

    "우리가 당하는 것보단 낫죠. 애초에 군인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어주는 상황에서도 상대측이 그런 태도로 나온다면 작정하고 노렸다는 얘기잖습니까? 그러니 우리쪽에서 불가피하게 상대를 처리하더라도 객관적인 목격담만 보고해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고려해보겠다는 상황 보고 진짜 아니다 싶으면 발을 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럴듯 하다 싶으면 도와주겠다는 의미다.

    "좋습니다. 이제 움직이죠."

    우리는 브리핑 내용대로 하산하자마자 방학 3동에서 인원을 둘로 찢었다.

    이상학 병장과 김한솔 상병은 나와 함께 움직이고, 나머지 군인들은 김명호와 똘마니들을 따라 아파트 단지를 뒤지기로 했다.

    김명호가 불만없이 병원으로 나를 보내주는 이유는, 어차피 개인이 챙길 수 있는 몫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명호도 나와 같은 선발 정찰조인 만큼 필요하면 자신 몫을 따로 챙길 수 있다.

    그러니 오히려 내가 값진 물건들을 솔선수범해서 찾아주길 원하는 것이다. 나는 단독으로 내 몸값을 올리는 게 목적이고, 그는 조금 힘든 일을 맡더라도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목적이니까 서로 윈윈 하는 관계다.

    김명호 일행과 헤어진 나는 이상학과 김한솔을 이끌고 빠르게 남하했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한파에 수도관이 터졌는지 도로 일부에 물이 흘러나온 흔적과 함께 빙판길이 생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움직이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사주경계를 철저히 했다. 우린 지상에서 얼어죽는 것보다 더 조심해야할 문제들이 잔뜩 있다.

    한전병원까지 내려가려면 시루봉로를 통해 쌍문근린공원을 관통해야 한다. 문제는 가로등이 죄다 꺼져서 공원근방은 시가지보다 훨씬 더 음침하다는 점이었다.

    "이상학 병장님, 김한솔 상병님,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미리 주의할 점을 하나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시가지로 이동할 때는 손전등을 켰지만 공원을 지나갈 때는 손전등을 꺼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나 어두운데 손전등을 꺼야 한다는 말입니까?"

    "꺼야할 때 안 끄면 죽습니다."

    "......!"

    나는 김한솔 상병에게서 빌린 일회용 야광봉 하나를 잔뜩 구부려서 발광하게 했다.

    그리고 공원 초입에서 투포환 선수처럼 있는 힘껏 던졌다.

    꽤 멀리 날아간 야광봉은 초록빛 형광색을 흩뿌리며 공원 한복판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우리는 수풀이 사사사삭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불 끄십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