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6화 (26/211)
  • 상도덕(5)

    차도식은 근본이 썩어빠진 양아치이긴 했으나. 그래도 바깥에서 조직을 운영하며 물장사를 해본 입장이라 수요와 공급에 대해 잘 알았다.

    지금 지저 도시는 턱없이 부족한 공급에 수요층이 미쳐 날뛰는 혼돈과 격란을 맞이하고 있다.

    생필품을 하나라도 더 사기 위해 다른 손님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고,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은 자연스럽게 경매 형식으로 물건값을 적당히 올려받다가 판매한다.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지저 도시에 들어온지 불과 10일밖에 되지 않은 날에 일어난 대혼란이었다.

    사실 지저 도시의 식량 사정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정부가 보급 물자의 배급량을 철저하게 조절하기도 했고, 서부 지구에서 당장 식량으로 쓸 수 있을만한 것들을 급하게 조달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아슬아슬한 생존에 문제가 없을지언정, 윤택한 삶에는 문제가 생기는 거다.

    누군가는 잘 구운 스팸 한장을 김치에 싸서 밥과 함께 먹고 싶은 법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식사 시간의 유일한 낙인 반주를 위해 술이 필요했다.

    생필품은 생존과 반드시 직결된 문제는 아니었으나, 사치품과 달리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물건들이다.

    그들은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삶을 원하는 게 아니다. 좁고 불편하긴 해도 최소한 두 다리 쭉 뻗고 지낼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거지.

    "준비됐어 동생?"

    "예."

    철컹철컹.

    나는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채 밀수조직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엑소스켈레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기립형 엑소스켈레톤이다. 척추부터 사지를 감싸는 외골격에 탑승하면 몸이 불편하거나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펄쩍펄쩍 뛰어다니게 만들어주는 물건이다. 본래 개발 목적은 의료용으로써, 주로 걷지 못하는 반신불수 환자들을 위해 개발된 물건이다.

    걷지 못하는 자들에겐 걸을 수 있다는 축복을, 힘이 약한 자들에겐 힘든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챙겨준 것이 바로 이 기립형 엑소스켈레톤이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척추 외골격과 연결된 사지 외골격을 전부 사용하기 때문에 조작감이 굉장히 낯설고 어렵다는 것 정도. 그리고 첫 구매 비용과 유지 비용이 생각보다 비싸다는 것.

    두번째는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이다.

    기존의 기립형 엑소스켈레톤은 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데다 개인의 관리와 운용이 상당히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거기서 착안한 아이디어에 의해 탄생한 것이 바로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이다.

    마음껏 걷고 뛰고 싶은가? 그럼 척추에 하반신 외골격만 달려있는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을 구입해라.

    순수하게 팔의 근력만 늘리고 싶은가? 주먹 하나로 상대를 으깨버리고 싶은가? 그럼 양팔에만 착용할 수 있는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을 구입해라.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보단 주로 팔힘만 쓰는 용도에 매우 적합한 외골격 파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중무장보병들이 착용하는 방호형 엑소스켈레톤이다. 우리같은 민간인들과는 연이 없는 군용이다.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은 부품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용케 구했네요?"

    "흐흐, 동생을 위해서 내가 힘좀 썼지. 바깥에서 엑소스켈레톤 장사하던 정비공이 여기선 나랑 꽤 가까운 사이거든. 그래서 혹시 남는 보조형 엑소스켈레톤 부품 있으면 몇 개 팔아달라고 했지."

    "경쟁자들이 꽤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 경쟁자들이 동생보다 덜떨어지는 놈들 뿐인데 왜 걱정해? 우리 차도식파 밀수량 1위! 개인 밀수량 1위! 밀수품 가치 1위! 작전을 고작 두 번밖에 안 뛰었는데 벌써부터 이 바닥에 동생 이름이 자자하다니까?"

    "선택과 집중 전략 덕분이죠."

    선택과 집중.

    가장 빠르고 안전한 루트로 대량의 물자를 우선 선택하거나, 조금 힘들고 위험하긴 해도 비싼 물자를 집중적으로 노려서 확보하거나.

    첫 작전에선 김명호와 그 똘마니들에게 대량의 물자를 선택하게끔 했고, 내가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비싼 물자들을 집중적으로 확보했다.

    두 번째 작전에선 아예 정찰조 전원을 차에 태워서 도봉구를 돌아다니며 값비싼 물건들만 긁어모은다음, 운반조와 대기조에겐 미처 다 회수하지 못 했던 통방중의 물자를 마저 회수하게끔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고작 두 번의 작전만으로 최대 효율과 수익을 끌어올린 밀수조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대망의 세 번째 작전이다.

    작전은 3일마다 한 번씩 진행하기로 이미 군 부대와 밀수조직들끼리 합의가 끝난 상태다. 그 과정에서 능력없고 쓸모도 없는 밀수조직들은 과감하게 배제되었다.

    지상에서 빈 손으로 돌아온 놈들, 두 번 다시 바깥으로 나가기 싫다며 울부짖는 병신들, 적당히 나눠먹으면서 적정가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지독하게 바가지만 씌우는 양아치들. 그런 놈들은 군 부대 측에서 먼저 입장을 제한시켰다.

    그럼 배제된 자들이 원한을 품고 밀수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북부 지구에는 먹고 살기 위해 24시간 눈을 부라리고 있는 놈들 천지다. 혹시라도 단순한 원한 때문에 정보를 유출할 경우, 이 혼잡한 거리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되어 끔찍하게 살해당하겠지. 그걸 모르는 멍청한 놈들은 없을 거다.

    어쨌든 밀수라는 게 너무 자주하면 티가 나고, 그렇다고 너무 적게 하면 수요층의 반발이 거세니까 3일이라는 간격을 두게 된 거다.

    한탕 해온 놈들이 3일동안 휴식하고 재정비하면서 물건을 소비하고, 다시 지상으로 나가서 물자를 구해온 다음 처음과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거다.

    철저한 승자독식 구조지만 동시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다.

    군 부대는 뇌물과 우선구입 자격을 얻어서 좋고, 시민들은 부족한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어서 좋고, 밀수조직들은 돈과 이권을 챙길 수 있어서 좋고.

    언젠가는 시민들의 돈이 다 떨어질테니 결국 밀수조직들이 손해보는 것 아니냐고? 그건 또 아니다.

    "우린 밀수하려고 지상으로 출근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노역하려고 다른 지구로 출근하네요."

    "노역을 해야 포인트를 벌고, 그 포인트로 우리가 가져온 물자를 살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노역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포인트가 쌓이고 이 도시도 발전하는 거야. 우리가 밀수나 하는 범죄자 새끼들이긴 해도 결과만 놓고보면 이 도시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가난한 서민들은 포인트를 벌기 위해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이 던져주는 노역을 해야 하니까. 나와 같은 HR(인적자원)직급 코드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완성이었던 도시는 차츰 완성에 가까워질테고, 도시 규모와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면 지상의 서울 못지 않은 대도시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행하는 밀수가 서민들의 노동력이자 삶의 동력이 되는 게 맞다.

    "새벽 감수성 충분히 느꼈으면 이제 우리도 출근하자고."

    차도식의 말에 나는 양팔에 착용한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을 내려다보았다. 각 파츠마다 보조 배터리가 탑재되어 있는 이 보조형 엑소스켈레톤이면 꽤 많은 걸 할 수 있다.

    찌그러져서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뜯어내거나, 이전처럼 종교에 미친 광신도 새끼들을 상대할 때 무자비한 펀치를 날려줄 수도 있다.

    "이번이 세 번째 작전인 만큼 다른 조직들도 준비 많이 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슬쩍 알아봤는데 도 사장 그 놈이 아주 혈안이 됐다더라고."

    슬쩍 물어봤을 뿐인데 촉새마냥 떠벌떠벌 떠들어대는 차도식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 놈이 아주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 조직원도 더 뽑고 엑소스켈레톤도 몇 대 더 맞춘 모양이야. 당장 얻는 이익보다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거지."

    "사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게 맞긴 해요. 여전히 공급은 후달리는데 수요는 폭발적으로 많고, 안정적인 공급을 하려면 결국 장비와 인력에 투자를 해야 하니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그 놈은 뭐랄까...뒤가 없다는 느낌이야. 솔직히 그만큼 무리했으면 작전 한 번만 거꾸러져도 손해가 막심하거든. 3일마다 기회가 한 번씩 돌아온다고 해도 그많은 조직원들이랑 장비는 무슨 돈으로 유지하겠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네요. 그래도 3일만 기다리면 재도전할 수 있으니까 저쪽도 아주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걸요."

    "그건 두고봐야지, 흐흐."

    여느 때처럼 조직원들과 함께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군 부대에 방문하자,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두 번의 작전에선 최소 경계 근무 인력들만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는데, 오늘은 준비된 군인들의 수가 좀 많았다. 심지어 그들 모두 방한용구로 몸을 감싸고 튼튼한 군용 배낭을 짊어진 중무장 상태였다.

    "이건 뭡니까?"

    "아, 차 사장.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깨어있을리가 없는 대대장이 쏘가리와 부사관들을 데리고 우리 앞에 섰다.

    "군 상층부에서 북한산 인근 지역에 대한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밀수조직들에게서 얻는 찌라시가 아니라, 우리 군이 직접 확인하고 기록한 '공식' 데이터 말입니다."

    "그래서 다들 이 새벽부터 나와서 준비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 겁니다. 우리 애들 중에서 몸이 날래고 노련한 놈들만 뽑았으니 작전에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각 조직당 우리 애들 1분대(6명)씩 끼워서 함께 작전을 진행해주십시오."

    "그건...음."

    차도식이 뭔가 말하려다 침음을 흘렸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대대장이 무슨 의도로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는지 아는 마당에, 차도식이라고 모를까.

    '민간인 신분인 우리도 밀수로 한탕 해먹고 있으니, 군인들도 한탕 해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군.'

    군 상층부에서 지상 데이터를 요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군대는 지저 도시 내부 치안과 대민지원(공짜노동)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저 도시에 들어온지 10일밖에 안 된 군대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대뜸 지상 데이터를 요구한단 말인가? 지상 데이터를 수집하면 지상을 다시 확보하기라도 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저희야 잘 훈련된 군인들이 함께 해주면 더할나위 없이 좋죠. 이거 군대에서 우리에게 너무 편의를 봐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대장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차도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그러자 대대장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역시 젊은 친구라 그런지 말귀가 잘 통한다니까. 척하면 척! 이런 인재가 우리 부대에 있어야 하는데 참 아쉬워."

    "과찬이십니다. 그럼 저흰 예정대로 작전 준비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들 해요. 우리 애들 잘 부탁합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대대장을 저 멀리 보낸 나는 일행을 데리고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차도식은 군대가 자기들 파이를 벌써부터 뺏어먹으려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를 적당히 달랬다. 사실 군대의 개입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고,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엘리베이터의 작동 권한은 저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남부 지구 장악을 서둘러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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