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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24화 (24/211)
  • 상도덕(3)

    지상에서 2030년의 10월을 보내고 있던 인간들은 이제 지하에서 2030년의 11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와! 휴일!"

    "내 침대에 눕지마라."

    평소에는 아침 일찍 디그러쉬로 출근하는 아버지와 함께 자신도 출근길에 올랐던 고졸 경리 여동생이 만세를 내질렀다.

    디그러쉬에선 주마다 최소 1일의 휴일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여동생이 디그러쉬에 출근한지 딱 일주일째가 되는 오늘, 여동생이 지저 도시에서 기념비적인 첫 휴일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인적자원(HR)인 나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었다. HR 직급은 굶어죽기 싫으면 노역해서 돈 벌어라, 였지. 맞아죽기 싫으면 닥치고 일해라,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일주일간 1번의 작전을 더 뛰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작전을 통해 쌓인 피로를 해소하면서 꾸준히 지저 도시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 입주 첫날처럼 또 대규모 정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군인들이 격렬한 총격전을 벌어야 할 만큼 위험한 존재들이 또 숨어드는지, 혹은......

    "오빠 그거 들었어? 엄마가 요즘 물가 엄청 비싸졌대."

    "물가를 왜 걱정하시는데? 우리 집 돈 많잖아. 배급도 넉넉하고."

    "당연히 엄마도 처음엔 신경 안 썼대.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물가가 눈에 띄게 올라서 무섭대. 그렇다고 다른 지역에서 물건을 주문하려니 수량 제한이 있어서 원하는 만큼 못 산대. 거기서도 비싸게 받아먹는 건 덤이고."

    "그렇겠지. 자기들끼리 사고 팔고 쓰느라 바쁜데 돈 많은 졸부들이 물량 싹 쓸어가면 기분 좋겠어? 돈이란 게 순환이 돼야 하는데 부자들이 물건만 싹 쓸어가버리면 순환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부자들 상대로 장사할 때는 더 비싸게, 더 팍팍하게 구는 거지."

    "그럼 우리 큰일난 거 아냐?"

    나는 외투를 챙겨 입으면서 피식 웃었다. 여동생은 그래도 머리가 좀 굴러가는지라 돈만 많은 졸부들이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남부 지구의 졸부들이 가진 최대 장점은 큰 발언권과 막대한 재산이다. 그럼 단점은? 장점 빼고 전부.

    "동생아. 돈이 많아서 자존심과 콧대가 높은 졸부들이 서민들과 직접 어울리기 싫어한다면 결국 어떻게 활로를 찾으려 할까?"

    "음, 역시 대행업체를 쓰지 않을까?"

    "잘 아네."

    그래. 소위 먹물좀 손에 묻혀봤다는 엘리트, 돈좀 만져봤다는 졸부들은 직접적으로 서민들과 얽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부려먹고 깔보고 싶어할 뿐이지.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선 그 자존심과 콧대도 잠시 내려놔야 한다. 물론 전부 다 내려놓는 건 너무 모양이 빠지니까 조금만 내려놓는 거다.

    우선 돈이 급하고, 충성심이 높은 놈들을 매수해서 구매 대행을 시킨다. 그럼 북부의 풍족한 물자를 손에 넣은 구매 대행자들이 여기서 또 돈냄새를 맡는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난방이 안 들어오는 차가운 골방에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마셔야 하고,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강변에서도 짜장면을 시켜 먹어야 만족하는 배달의 민족이다.

    바로 그렇게 대행업체와 배달업체가 탄생하는 거다.

    하지만 밀수조직들 덕분에 북부 지구에 물자가 어느정도 공급된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눠먹을 파이는 적고 사람은 많다.

    가장 먼저 자신들부터 챙길 군인들이 그 상황을 좋지 않게 볼 거다. 자신들에게 바쳐져야할 뇌물과 우선적으로 판매되어야 할 물자들이 웬 놈팡이들에게 뺏긴다면 기분이 어떨까?

    '엿같겠지.'

    그럼 밀수조직과 군대 사이에서 냉전이 터지는 거다. 왜냐? 군대는 VIP들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 없고, 밀수조직들 역시 몰래몰래 구매 대행하는 놈들을 잡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오해와 분노가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뻥! 하고 터질테고, 때마침 터져나오는 누군가의 폭로와 공익 신고로 인해 지저 도시에서 밀수는 전면 금지 땅땅! 다같이 사이좋게 좆되는 엔딩이다.

    그러니 슬슬 졸부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안 좋아진 지금, 내가 나설 차례다.

    배달업체는 생기면 좋지만 대행업체는 절대로 생기면 안 된다. 서로 노력해서 이권을 나눠먹는 사람들 몰래 저 혼자만 불로소득을 취하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기 때문이다.

    "칠칠맞게 누워있지 말고 너도 얼른 나갈 준비 해."

    "못 들었어? 나 오늘 휴일이라니까?"

    "어쩌라고.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여성용품이랑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까먹는 간식들 전부 누가 갖다준 것 같냐?"

    "박한성 존나 짜증나!"

    오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저 아래에서 귀신같이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여동생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암, 네가 은혜를 안다면 얌전히 내 말에 따라야지.

    "...그래서 뭐할 건데?"

    "뭐하긴 장사 해야지."

    "뭐?"

    나는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동생에게 배낭 하나를 떠넘겼다. 죄다 가벼운 물건들로만 가득 채웠기 때문에 녀석도 어렵잖게 들 수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들었어?"

    "지금 돈은 많은데 물건이 없어서 못 사는 졸부들이 가장 원하는 거."

    나는 커다란 벽장 안에 고이 모셔둔 보급박스까지 꺼내서 배낭처럼 짊어졌다. 무게가 좀 무겁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상자였다.

    주상복합아파트의 중심 상업구역. 정확히는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듯한 각종 프렌차이즈 가게와 명품 가게들이 늘어선 중앙 광장.

    교양 챙기고 점잔 떠느라 바쁜 상류층 인간들은 절대로 중앙 광장의 분수대에 앉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중앙 광장의 분수대 앞 명당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다.

    "배낭 내려놔."

    "진짜 장사하게?"

    "그럼 가짜로 장사할까?"

    나는 지상에서 챙겨온 방수포를 돗자리처럼 넓게 펼쳐서 깔았다. 그리고 배낭에서 먼저 꺼낸 각종 의약품과 생필품들을 있어보이게 배치했다. 가격표는 지상에서 챙겨온 여러 대의 스마트폰으로 대체했다.

    스마트폰 화면에 상품 금액을 적어놓고, 스마트폰 거치대에 꽂아두기만 하면 그게 곧 가격표였다. 상품보다 더 비싼 가격표라는 점이 옥의 티지만.

    "자, 판은 다 깔렸고."

    파리처럼 손을 쓱쓱 비빈 나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여동생과 함께 분수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눈앞의 풍경은 온통 밝은 조명으로 가득해서 별천지마냥 화려했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분수대의 물줄기 소리는 삭막한 지저 도시에서 때아닌 풍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오늘 충동적으로 판을 깔고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간 지저 도시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부른 돼지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VIP이거나 그들의 가족이긴 하나, 결국 이들 또한 지저 도시를 운영하는 정부 입장에선 서민들과 똑같은 '입'이다.

    매일 먹고, 매일 싸고, 매일 자고, 매일 입어야하고, 매일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써야 만족하는 입!

    나날이 줄어가는 보급 물자를 계속 정량으로 배급해주면 이 탐욕스러운 입들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식량 자급자족을 실현하기까지 아직 몇 개월은 남았기 때문이다.

    유전자 개량을 거친 각종 곡식과 채소, 과일과 가축들이 지금도 전문가들의 손길을 받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실이 지저 도시의 모두에게 돌아가기까지 몇 개월, 딱 몇 개월 남은 거다.

    심지어 그 몇 개월 후에 지저 도시의 식량 사정이 안정화된다고 한들, 여전히 수많은 입과 기호를 만족시키긴 어려울 거다.

    하나가 있으면 둘을 원하고, 둘이 있으면 넷을 원하는 게 바로 인간이니까. 시민들의 기호를 채워줄 수 있는 건 현 시점에서 밀수조직들 뿐이다.

    만약 그들의 기호와 탐욕까지 모두 채워준다면, 단순히 막대한 부를 쌓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이권까지 챙길 수 있겠지.

    '너희 군인들과 양아치 놈들은 북부 지구에 평생 머물러 있어라. 난 블루오션을 개척할 테니까.'

    나는 마침내 골판지 상자를 잘라서 만든 '잡화상점' 상호를 내걸었다.

    그것만으로도 할 짓없이 좀비처럼 중앙 광장을 떠돌고 있던 졸부들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물론 졸부들만이 아니라 이곳을 관리하고 졸부들의 편의를 봐주는 직원들도 이쪽을 봤다.

    "이거 설마 노점(露店)입니까?"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노점 맞습니다."

    다들 눈치만 보는 가운데, 결국 특유의 엘리트주의 때문에 먼저 나선 인간이 있었다. 딱봐도 공부 잘할 것 같고 못난 놈 깔보기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의 미중년이었다.

    "노점이라...허참. 설마 이 주상복합아파트에서 노점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혹시 허가는 받고 이러는 겁니까?"

    "굳이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나요?"

    "음?"

    "지금 돈이 있지만 필요한 물건을 못 구해서 속 썩이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리고 저한테는 마침 그분들의 욕구를 달래줄 물건들이 있네요? 그럼 상호합의하에 적당히 흥정해서 물건을 건네주고, 포인트를 넘겨주는 거죠. 바깥에 있을 때도 그런식으로 직접 중고 물건을 거래하는 경우 흔했잖아요?"

    "하지만 이건 단순 거래가 아니라 엄연한 상(商)행위 아닙니까?"

    해석 : 넌 상호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개인 거래가 목적이 아니라, 물품 대량 판매로 이득 취하려는 장사치 아니냐?

    "제가 가진 물건도 많고, 물건을 원하는 사람도 많은데, 여긴 이웃들간에 서로 커뮤니케이션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죠. 그럼 제가 광장에 나와서 '쌀 1kg 팝니다!' 하고 소리쳐서 누가 사겠소 하면 후다닥 집에 뛰어들어가서 쌀을 들고 나와야겠죠? 설마 저에게 그 짓거리만 수십 수백번 넘게 반복하라는 건 아니겠죠?"

    "흠...비록 누가봐도 불법성 짙어 보이는 노점을 차리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 거래마다 집을 들락날락하는 귀찮음과 비효율을 생략하기 위해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개인 거래를 원하는 고객과 상호합의를 거친 후 돈과 물건을 주고받고 싶을 뿐이다? 일리있군요."

    "그럼요. 전 장사나 하려고 여기 앉아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장사를 하려고 했으면 당장 확성기부터 들고와서 호객행위부터 하고, 상품 가격도 매우 높게 책정했겠죠? 하지만 전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서 다함께 으쌰으쌰해서 이 불편한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모두'가 여기에 동참해줬으면 하는 거니까 상품을 적정가에 팔더라도 판매 수량에는 제한을 두겠죠?  그럼 전 여기 있는 구급 키트와 서바이벌 키트를 하나씩 사겠습니다."

    "20만 포인트 입니다."

    각종 비상용 의약품이 알뜰살뜰하게 들어있는 작은 핸드백 크기의 구급 키트, 그리고 전투 식량과 고체 연료, 맥가이버칼과 미니 손전등이 들어있는 서바이벌 키트가 20만 포인트에 팔렸다. 지상에선 그냥 구호물자로 창고에 쌓아두기만 하는 것들이다.

    20만 포인트가 비싼 것 같은가? 우습게도 전혀 아니다.

    남부 지구 거주민이 이것과 같은 구성의 품목을 사기 위해 북부 지구에 가면 최소 50만 포인트부터 시작하는 역대급 바가지를 당한다. 물론 사이좋은 북부 거주민들끼리는 끽해야 몇 만 포인트로 사고팔지만.

    이미 지난 일주일간 그 실상을 두눈으로 똑똑이 확인한 미중년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인 가격에 합리적인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상류층 인간들끼리 서로 으쌰으쌰해서 잘 해낼 수 있다는 분위기에 가장 먼저 탑승했다. 노골적으로 선민의식이 가득찬 '사회운동'에 한 발 걸쳤다는 뿌듯함을 얻은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거 마스크팩이랑 폼클렌징 세트 아닙니까? 우리 안사람이 유난히 좀 깔끔떠는 사람인데 그거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10만 포인트 입니다."

    "합리적이군요."

    편의점에서 5천 원주면 살 수 있는 싸구려 미용품 세트가 10만 포인트에 팔리고도 합리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상류층 인간들이 명품과 서민용 싸구려도 구분 못할 만큼 수준이 낮아진 걸까? 절대 아니다.

    그들은 이 갑갑한 지저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거기서 일주일을 넘게 생활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더이상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천에 널린 게 명품 가게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런 명품들이 아니었다.

    가볍게는 식자재, 무겁게는 호사로운 사치품까지. 최고만을 고집하던 그들이 더이상 최고를 얻을 수 없다면 타협해서라도 싸구려를 써야 한다. 어쨌든 품위는 지켜야 하니까.

    고급 전기 면도기를 쓰던 미중년이 여기서 일회용 면도기를 사간다고 한들 갑자기 수염 하나 못 깎는 병신이 되기라도 하나? 천만의 말씀!

    최고급 스테이크를 썰 수 없다면 냉동 삼겹살이라도 사서 구워먹는 게 이 지저 도시의 이치다. 새로운 법칙이 된 거다.

    다들 그걸 아니까 이 신성한 사회운동에 눈도장을 찍고 있는 거다.

    너도나도 그런식으로 명분을 챙기면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간다. 그리고 아직도 눈치만 보고 있는 배부른 돼지들에게 광역 도발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흰 전기 면도기가 없어서 지저분하게 수염도 못 깎니? 난 일회용 면도기로 쌍판을 깔끔하게 다듬을 예정이란다!

    그쪽은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주름살이 보이고 피부가 텄네요? 난 BB크림에 보습제 발라서 뽀송뽀송 해질 건데!

    "동생아, 잘 봐둬라. 가진 자들이 진짜 약해질 때는 바로 타협하기 시작할 때란다."

    "미친 놈......"

    동생은 특유의 미모와 화사한 미소로 손님들을 응대하면서 나를 흘겨보았다.

    그보다 슬슬 때가 됐는데? 내 이권을 책임져주실 분이 등장하실 때가 됐는데? 지금 안 오시면 늦는데??

    "이보세요! 지금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둘씩 딱 필요한 물건만 적정가(?)에 거래해서 행복하게 귀가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고 싶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광란의 중앙 광장.

    그곳에 카랑카랑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밀고들어오는 여우상의 중년 여성이 자신의 패거리들과 함께 서있었다.

    VIP들에게 있어서 진짜 VIP 대접받는 안주인들. 지저 도시라는 신비로운 생태계 속에서도 용케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성한 여걸들.

    부녀회장과 부녀회 누님들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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