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3화 (23/211)
  • 상도덕(2)

    많은 사람들이 특정 기업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질 때마다 반드시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디그러쉬는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든 기업인가?

    채굴부터 채광, 시추, 지질학적 환경조사까지. 지구에서 '지하'에 해당하는 것은 모두 뜯어서 파헤쳐보겠다는 강력한 일념이 깃든 이 기업은 정말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최초 창립자는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의 기업인이었다. 그가 디그러쉬라는 유명한 대기업을 세계각지에 알리면서도 무명인 이유는, 1대 창립자임과 동시에 순식간에 주인자리를 내준 무명인이었기 때문이다.

    무명인의 자리를 넘겨받은 이는 또 다른 무명인. 무명인의 뒤를 잇는 무명인의 연속에 세계는 디그러쉬라는 기업을 매우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신기술과 새로운 장비를 활용한 획기적인 채굴 덕분에 디그러쉬를 찾는 국가는 넘쳐났지만.

    그것은 마치 모든 인류에게 '어서 땅을 파라! 저 드높은 하늘을 넘어 우주로 솟아오르지 말고 그저 아래로 향해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인류는 현대 기술로는 절대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의 12km의 지반을 뚫었고, 그 아래에서 지저 세계를 발견했다.

    본격적인 지저 세계 탐사 시대가 열리고, 뒤이은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대다수의 인류가 달려들었다. 2035년에 화성에 사람이 이주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두고 떠들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모두 땅밑에만 쏠려 있었다.

    때문에 디그러쉬 소속 직원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언제나 준비된 대답을 해준다. 사실 그것외엔 달리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고.

    -지금 당신이 신경쓰지 않았던 발밑에 보물이 묻혀있을수도 있습니다!

    디그러쉬 이전에는 땅을 파도 돈이 나오지 않는 시대였으나, 디그러쉬 이후에는 땅을 파는 행위만으로도 돈이 되었다.

    설령 땅을 파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 해도 상관없다. 지저 세계라 불리우는 제 2의 '지상'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떼돈을 벌어들인 것이니까.

    그곳은 누구의 땅도 아니다. 먼저 깃발을 꽂고 벽을 쌓고, 사람을 모아서 터전을 만들고, 넘쳐나는 지하 자원을 쓸어담으면서 새로운 삶을 구가하면 된다.

    당신의 발밑에 보물이 묻혀있다. 디그러쉬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저 끝없이 땅을 파길 바라는 것처럼.

    "차장님, 만나뵙고자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들여보내게."

    아직 내부사정이 혼란스러운지라 내선 전화도 급하게 수리중인 엉성한 회사의 차장, 박한화가 자신에게 의견을 묻는 비서에게 손을 내저었다.

    집무실의 넓은 창문 앞에 가만히 서있노라면, 저 아래에서 감시 드론을 달고 움직이는 노예들이 각자의 일터로 움직이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디그러쉬에서 인정받은 중간관리직. 그 유명한 대기업의 한국지부에서 사실상 이사급 대우를 받고 있는 남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활용할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 구분할 안목을 가진 권력자.

    그것이 박한화라는 이름 석자를 가진 50대 남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면 제대로 들은 게 맞다.

    그의 잘 다려진 검회색 정장 앞섬에는 DR-2 직급 코드가 새겨져있다. 디그러쉬 내에서 '무명(無名)'을 상징하는 DR-1 직급 코드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직급 코드다.

    "이런, 개미들의 대행진을 보면서 사색에 빠져계실 줄 알았더라면 나중에 찾아뵐 걸 그랬습니다."

    "자네답지않게 실없는 소릴 하는군."

    피식 웃은 박한화는 이내 블라인드를 내려서 바깥의 풍경이 신성한 집무실에 침범하지 못하게끔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아니. 이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네. 돈이나 사람을 헛되이 쓰는 정도라면 괜찮아. 단순한 실수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만큼은 절대로 허비해선 안 되지. 내가 지금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자네에게 정확히...5분이 주어질 걸세."

    2030년에 고풍스러운 회중시계도 아닌, 원시인들이나 써먹을 법한 투박한 모래시계가 박한화의 손에 뒤집혔다.

    아랫 사람이 자신을 만나러 올때면 언제나 5분짜리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동급인 사람이 찾아오면 30분짜리 모래시계를, '무명'이 찾아오면 모래시계를 치워버린다.

    이건 그의 업무 철칙이자 일종의 습관이었으며, 당연한 권리였다.

    박한화가 자리에 앉자, 이제 막 30대에 접어들었을까 싶은 젊은 사내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저는 차장님의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아마 이 도시에서 차장님보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말입니다."

    "이제 얼추 4분 남았군."

    "그래서인지 저는 차장님의 주변을 곧잘 눈여겨보곤 합니다. 차장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행동을 통해 결과로 나올 때면 언제나 디그러쉬가 이득을 봤기 때문입니다."

    "누가보면 내가 자네 입에 총을 박아넣고 납탄과 나에 대한 무의미한 아부, 둘중 하나만 고르라고 협박한 줄 알겠군."

    "하하, 꼭 제가 아니더라도 디그러쉬를 다니는 모든 직원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느낌을 받고 있을 겁니다. 아부를 하지 않아도 쓸모가 없으면 납탄이 박히겠지만, 아부를 한다면 시간을 좀 더 늦출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내게 그런 아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네. 납탄이 박힐지 말지 정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니라 자네들이야. 일을 못 하거나 기업의 이익과 가치를 배반하면 싫어도 납탄이 박히게 되는 거지. 그러지 않으려면 유능하면서 똑똑해져야 하는 거고. 3분."

    이 삭막한 집무실에 응접용 소파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아랫 것이 찾아오든 동급이 찾아오든 대화자들의 위치가 바뀌진 않으니까. 다만 무명이 찾아올 때면 박한화의 위치가 눈앞의 사내와 같은 위치로 변경될 뿐이다.

    편하게 앉을 자리가 없음에도 사내는 열성적으로 PPT 발표를 하는 신입 직원처럼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죠. 저희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기업에게 이익과 가치를 가져다준다고 한들, 거기에 윗분들이 만족하지 못 하신다면 그또한 납탄의 이유가 되잖습니까."

    "그또한 높으신 분들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자네들 책임이지. 이제와서 갑자기 강성노조라도 만들고 싶어진 건가? 하루세끼 먹여주고, 업계 최고 수준의 임금과 대우, 복리후생, 그리고 디그러쉬 소속임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직급 코드 외에도 원하는 게 더 있나? 인센티브같은 실없는 얘기를 꺼낸다면 정말로 납탄이 박힐 거라고 미리 경고해두지."

    "디그러쉬가 인센티브에 후한 기업이라는 것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연봉 협상도, 대우 개선도, 부질없는 청탁도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의 해소겸 귀중한 정보 제공을 통해 높으신 분과의 연줄을 만들어놓으려는 것 뿐이죠."

    "1분."

    박한화는 흘러내릴 모래가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를 톡톡 두들기며 계속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제야 밑작업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사내는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품속에서 기밀 스티커로 봉해져있는 서류 봉투를 꺼내들었다.

    DR-2 직급보다 낮은 인간들이 '개인의 의도'로 기밀 스티커가 붙어있는 서류 봉투를 들고다닐 일은 좀처럼 없다.

    사내로부터 서류 봉투를 받아든 박한화는 주저없이 편지칼을 꺼내 서류 봉투의 기밀을 해제했다. 기밀도 경우에 따라 해제할 권한이 있거나 없다. 이 경우엔 있었다.

    아랫것이 멋대로 가져온 기밀이라면 최소한 무명이 관리하는 특급 기밀은 아니라는 얘기니까. DR-2 직급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서류 봉투에서 나온 것은 상공에서 어느 인물을 촬영한 몇 장의 고화질 사진, 그리고 그 인물이 방문한 장소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출입 기록이었다.

    "제가 디그러쉬내에서 맡은 직무는 보안입니다."

    "...그정도는 알고있네. 그래서 이제 내 DNA를 물려받은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망나니 아들놈의 실시간 행적 사찰 기록을 가져와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점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이상하다고 대답해야겠지. 아니면 정확히 어디가 이상하냐는 대답을 못할 만큼 이상한 점이 많다는 대답을 원하나?"

    모래시계의 모래는 이미 다 흘러내렸다.

    하지만 대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차장님의 아드님께선 정부에서 발표한 2030 신도시 부흥 계획에 따라, 첫날에는 남들처럼 정상적인 노역을 했습니다. 디그러쉬 사의 관리감독을 받으면서 현장 실무자들도 만족할만큼 훌륭하게 노역을 해냈다, 이런 보고를 받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노역을 끝마친 뒤가 문제였습니다. 북부 지구를 촬영하고 있는 감시드론에 우연찮게 포착된 아드님께선 상당히 의외의 행동을 하시더군요.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잡것'들과 어울리고 계십니다."

    "설마 이걸 내 약점이라 생각하고 이 자리에 가져온 거라면 자네의 능력을 크게 의심하겠지만, 일단 더 들어보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겠습니까? 앞서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순수한 호기심 해소이자 귀중한 정보 제공이 목적입니다. 각설하고, 아드님께서 어울린 잡것들은 바깥에서 물장사나 하던 양아치 패거리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가족 특혜로 이 도시에 들어온 자격없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고 말하는 듯한 사내의 행동에 화가 날법도 하건만, 박한화가 화를 내는 포인트는 자신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쓰였냐 아니냐 뿐이었다.

    "평범한 놈들이 아닌 모양이군."

    "예. 이놈들은 대담하게도 지저 도시에 들어온지 하루만에 지저 도시가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사실 시장이 가장 활성화된 북부 지구 거주민이라면 배급된 물품의 수량이나 품목에 제한이 걸린 걸 보고 다들 눈치챘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요. 이 놈들이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군 부대와 비밀스럽게 내통하여, 고작 지저 도시 입주 사흘만에 지상으로 빠져나가 물자를 공수해오고, 지저 도시에 물량을 풀어서 큰 차익과 이권을 챙겼습니다. 이 시국에 가장 민감한 범죄중 하나인 조직적 밀수를 저지른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아들이 포함되어 있고."

    "맞습니다."

    "그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사진과 출입 기록 서류를 서류 봉투에 도로 집어넣은 박한화는 그것을 자신의 책상 서랍에 던져넣었다.

    "우선 자네의 호기심 해소부터 해결해보지. 내 아들이 그런 대담한 범죄에 가담한 건 내 의지가 반영되어있느냐겠지? 답은 '아니다'일세. 제 아비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준 은혜도 잊고 반항만 일삼는 저 놈은 그래도 타고난 일머리가 있어. 아마 노역을 몸소 겪은 다음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어떤 가능성 말입니까?"

    "이 지저 도시에서 내 아들이면서 HR 직급으로 분류된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가능성."

    "과연. 눈치가 있고, 계산이 재빠르며, 결단력이 있기에 단 한 번의 노역만으로도 HR 직급은 이 지저 도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나? 당연히 비정상적인 방법, 즉 불법이지. 이제 자네의 얄팍한 호기심이 해소 됐나?"

    "해소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박한화는 옆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들고 목을 축였다. 이제부턴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그래서 자넨 자칫 입막음을 당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내게 이런 정보를 갖다 바쳤지. 이게 내게 귀중한 정보가 될 것인지 말지는 제쳐두고, 정말 자네가 원하는 게 나와의 의미없는 연줄이 전부인가?"

    "의미없는 연줄이라도 일단 만들어두면 충분합니다. 그걸 의미있게 만드는 것과, 아예 없는 연줄을 창조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내게 귀중한 정보이면서도 귀중한 정보가 아닐세. 왜 그럴 것 같나? 이 질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자네는 입막음이란 이름의 납탄, 혹은 의미있는 연줄을 가지게 될 걸세."

    "......"

    "이번에는 30초 주지."

    5분보다 훨씬 더 짧을 수도, 억겁보다 더 길 수도 있는 시간.

    30초가 전부 지나가기 전에 사내는 입을 열었다. 열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드님께 목줄을 채우길 원하시는군요. '공적'이 아니라 '사적'으로."

    "거의 다왔군. 그 이유는?"

    "조금 전에 차장님께서 직접 '은혜도 모르고 반항만 하는 아들'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드님은 정작 부모의 눈길따윈 신경쓰지 않고 대담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강심장입니다. 이 일을 공론화시켜서 공적으로 아드님께 목줄을 채우실 순 있겠지만, 그렇게 하시면 차장님의 입지가 조금 위험해집니다. 설령 내놓은 자식이라고 주장해도 주변의 시선과 평판은 확연하게 달라질테니까요."

    "딱 하나. 딱 하나가 부족하군."

    딱 하나가 뭔지 이미 눈치챈 사내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차장님께선 아드님이 '반항하지 않는 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정확히는 '반항할 수 없는 아들' 원하시지요. 제가 제공한 것은 그걸 위한 사적인 목줄의 재료가 될 겁니다. 그러니 디그러쉬의 박한화 차장님께는 귀중한 정보가 아니며, 박한성의 아버지 박한화 씨에게는 귀중한 정보가 맞습니다."

    짝짝짝.

    박한화가 무감정하게 보낸 갈채였지만, 그것이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내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완벽해. 이제 자넨 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서 이득만을 가져다 준 인재가 되었네. 그리고 그런 인재는 응당 원하는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 사적으로 의미있는 연줄은 이미 만들어졌으니, 이제 공적으로 원하는 대가를 말해보게."

    확 밝아진 표정의 사내는 곧 자신이 디그러쉬에서 원하는 것을 자신있게 밝혔고, 박한화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각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고,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잃었다.

    혹은 그조차도 누군가가 원했던 것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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