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덕(1)
"왔다!"
눈치없이 외치는 한 장병의 목소리에 이미 부사관부터 장교들까지 눈망울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상으로 나간지 정확히 12시간 하고도 52분만에 돌아온 작전팀(밀수조직)들이 알이 가득찬 꽃게같은 모양새로 돌아왔다. 당연히 기대되겠지.
거대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모여든 그들은 밀수범들이 얼마나 많은 물자들을 가져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볼만큼 우리가 좀 많이 가져오긴 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미 민간인들에게 털려버린 백화점이나 마트를 뒤지고 온 조직, 거리 순회공연을 하면서 편의점이란 편의점은 죄다 털어온 조직, 그리고 우리처럼 튼실한 물자 보급처를 찾아서 보급박스와 배낭을 한가득 채워온 조직.
여러 조직들이 각자의 재량껏 역량껏 물자를 구해왔으니 굶주려있던 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군 장교들은 거래가 아닌 공짜 뇌물을 받을 생각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안타깝게도 부사관 아래, 군 장병들은 밀수범들의 직접적인 뇌물수수 대상이 아니다. 대신 군 장교들과 함께 이 일을 묵인하는 대가로 '우선 거래권'이 주어진다.
즉 북부 지구 시장에 물건을 풀기 전에 군인들부터 먼저 거래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얘기다.
일반인들처럼 포인트를 주고 물건 사는 건 똑같지만, 당장 필요한 물건을 남들보다 먼저 구할 수 있으니 군인들 입장에서도 아주 손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PX나 황금마차 같은 느낌이라며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물자를 기다리는 군 장병보다, 뇌물을 기다리는 군 장교들보다 우리를 더욱 열렬하게 환영해주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동새애애애애애애앵!!"
군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 철창을 붙잡고 정신병자마냥 소리를 지르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차도식 사장이었다.
물론 그 혼자만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들도 너나할 것 없이 철창에 들러붙어 '비싼 거 가져왔어?! 뭐 가져왔어?! 많이 가져왔지?!'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엘리베이터 철창이 개방되고, 우리는 개선문에 들어선 역전의 용사들처럼 당당하게 노획물자를 가지고 나왔다.
빈손으로 돌아온 놈들은 엘리베이터 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다.
"동생! 동생! 믿고있었다고 젠장!!"
"제가 뭐랬습니까? 몸 쓰는 일이나 머리 쓰는 일이나 다 자신있다고 했잖아요?"
"그럼그럼! 난 동생 믿어! 동생 하고싶은대로 다 해!!"
수많은 밀수조직들 사이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 것은 당연히 내가 이끄는 차도식파(?)였다.
학교에서 찾아낸 대량의 물자, 그중에서도 지저 도시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식료품과 구호물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먹거리가 부족한 지저 도시에서 식료품의 인기는 12km 벽을 뚫고 지상으로 솟구칠 정도였다. 시장은 활성화되자마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팔려나간 게 식료품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통방중 급식소의 대형 냉장고와 식자재 창고에 가득 쌓여있던 것들을 보급 박스에 최대한 눌러담아서 가져왔다. 이러고도 최소 2번은 더 다녀와야 한다. 애초에 수백 명의 학생들을 먹이는 게 일인 급식소인데 식량이 적을리가 없잖은가.
개인적으로 챙길 권한이 있는 김명호와 그 똘마니 정찰조는 담배나 술, 기타 생필품을 우선적으로 챙겼다. 오래 묵혀둘 수 없는 식료품과 달리 사치품이나 생필품은 묵혀두면 묵혀둘수록 가격이 상승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밀수범들에게 주어진 규칙중 '개인 능력으로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긴 것만 본인 소유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건 정찰조에게만 해당되는 규칙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차량을 공수해서 물자를 확보, 운송했기 때문에 다른 정찰조보다 가져온 양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인용 배낭에 꽉꽉 눌러담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차량 좌석과 트렁크, 개인 배낭까지 총동원했다. 내 능력으로 직접 확보한 물자들이었기 때문에 규칙을 지키면서 대박까지 터뜨린 셈이 된다.
한창 엘리베이터 앞에서 군인들 상대로 경매가 벌어지고 있는와중에 내가 그런 얘기를 건네자, 다행히 차도식은 융통성을 발휘했다. 네 능력으로 확보한 물자니까 다 네 거다! 라고 통크게 질러버린 것이다.
이건 결과적으로보면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잘한 행동이었다. 그래야 내 사례를 본 다른 조직원들도 더 열심히 머리와 몸을 써서 더 많은 물자를 가져올 것 아니겠나?
그게 개인 소유든 조직 공동의 소유든, 지저 도시에 물자가 풀리면 풀릴수록 시장이 활성화되는 건 똑같았다. 순수하게 자본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면 명백하게 플러스 요인이었다.
"아, 그런데 사장님. 혹시 남는 창고좀 있을까요?"
"대박 터뜨린 동생한테 창고 하나 못 빌려줄까? 당연히 남지."
"그럼 제 개인 창고 하나만 주세요. 대신 조직원이 공평하게 분배받을 수 있는 몫은 포기할게요."
"안 될 거 없지. 사실 그냥 나눠주는 몫 받아도 우리가 훨씬 남는 장사인데!"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나는 따로 물자를 담을만한 박스가 없어서 커다란 방수포에 싸온 내 개인 물자를 창고에 보관해두기로 했다.
차도식은 생긴 건 저래보여도 머리가 좀 굴러가는 양반이다. 내가 나름 쓸만한 인재라는 걸 몸소 깨달았을테니 내 물건에 장난질치진 않겠지.
만약 탐욕에 눈이 멀어서 내 물건에 장난질치는 순간, 나라는 인재를 잃게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차도식파만 콕 집어서 높으신 분들의 '찍어내기'에 당할 수도 있다. 정확히는 그런 두려움이 뇌리에 새겨져 있을 거다.
여하튼 이대로만 간다면 나는 밀수범으로서 신뢰도 쌓고, 조직원으로서 대접도 받고, 지저 도시의 일원으로서 가치도 증명할 수 있다.
이미 그 작업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내가 이끄는 차도식파 밀수범들이 가져온 대량의 식료품과 생필품은 군인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기엔 충분했으니까.
특히 술과 담배를 뇌물로 받은 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죄책감보다, 당장 술 담배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 장병들도 맛대가리 없는 전투식량보단 역시 사제가 낫다며, 포인트를 내고 1인당 제한된 수량까지 꽉꽉 채워서 식료품을 사갔다.
장교들이 눈감아주고 있는 마당에, 장병들이 식료품 들고 가서 구워먹든 쪄먹든 삶아먹든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차도식에게 내 개인 물자의 보관을 떠넘긴 뒤, 개인 군용배낭만 짊어진 채 조용히 군 기지를 벗어났다.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 고작 사흘째인 것 치곤 제 2의 삶이 시작부터 나쁘지 않다.
그 사이에 밀수조직이 시장에 급히 풀어버린 물자들은 어제보다 한층 더 많은 인파를 끌어들였다.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 관리하는 군 부대에 뇌물도 먹였고, 자기들끼리 분배도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돈(포인트)좀 만져보겠다는 거다.
'식료품이야 장기관 보관이 용이한 게 아니면 곧장 팔아버리는 게 맞지만, 사치품이나 생필품은 묵혀둘수록 가격이 오를 텐데. 미련한 짓들을 하는군.'
지금 2천 포인트에 거래되고 있는 치약과 칫솔 세트? 시간이 흐르고 정부가 배급해주는 물자가 서서히 고갈되면 가격이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높으신 분들은 아랫것들의 허리끈을 강하게 조을 거다. 생존에 필수인 식료품을 제외한 물자 배급을 제한하거나 아예 중지해버리겠지. 그런 주제에 일은 더 많이 시킬 거다.
하지만 일을 시키면 뭐하나? 돈을 받아도 쓸 데가 없는데.
바로 그때부터 밀수조직들의 세상이 시작된다.
바깥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살벌하게 추운 영하 기온이라 어지간한 식료품들은 쉽게 상하지 않을 거다. 지상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냉동고가 된 셈이다.
진공포장이 잘된 식료품은 최대 2년까지는 버틸거고, 통조림이나 휴대용 식량은 10년도 우스울 거다. 어디 그뿐인가? 굳이 식료품이 아니어도 높으신 분들이 원하는 기호품, 혹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도 밀수 대상이다.
머지않아 밀수조직들이 판 친다는 걸 높으신 분들이 알게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그 얼뜨기들이 눈 뜨고 코 베인 상황일 거다. 밀수조직들이 직접 발품을 팔지 않으면 당장 이 도시가 안 굴러갈 테니까.
'이 도시도 언젠가는 완전한 자급자족과 안전을 확보하겠지만, 지상에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왔어. 최소 10년에서 20년까지는 지상에 남겨둔 물자들을 쪽쪽 빨아먹어야 할 거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이 원하는 건 지저 도시를 제 2의 국가로 탈바꿈 시켜줄 개돼지들이다. 쉽게 말해서 지상에 두고온 생존자들을 지저 도시로 받아들일 거라는 얘기다.
'경제가 활성화될수록, 도시가 완성될수록 그 시기도 앞당겨지겠지.'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범죄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또한 거시적으로는 인류라는 종을 보존하기 위한 대의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나는 커다란 군용 배낭을 짊어진 채 VIP들이 거주하는 남부 지구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편한 얼굴로 깨끗하게 정비된 거리를 걷고 있던 상류층 인간들이 나를 한 번씩 흘겨보았다.
그야 이상하게 보이겠지. 딱봐도 있는 집의 배운 자식처럼 생기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그런 인간이 쓸데없이 큰 군용배낭과 이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정지. 잠시 신분증좀 확인하겠습니다."
예상대로 주상복합아파트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흑색 경비제복에 모자를 꾹 눌러쓴 이들은 인터컴으로 저들끼리 중얼대더니, 곧 내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말없이 신분증을 제시해보이자 지문 검사기까지 들이밀었다.
"...박한성 씨 본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최근에 흉흉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입주 첫날부터 VIP 거주 구역에 총격전과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발했는데 당연히 예민하게 반응할만 하지.
나는 그들의 노고를 이해하는 척 적당히 넘기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지금쯤이면 주상복합 아파트도 본격적으로 장을 열기 시작했겠군.'
투명한 유리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상업 구역을 주의깊게 살폈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궁극적인 건설 목적은 결국 돈 많은 인간들에게 '딴데 가서 돈 쓰지말고 집앞에서 돈쓰세요~' 였다.
집밖을 나가기만 하면 온갖 편의시설과 명품 가게를 쫙 깔아둘테니, 거기서 돈 팍팍 쓰고 세금도 팍팍 납부하라는 의미다.
때문에 소위 상류층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주상복합 아파트에는 얽힌 이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돈을 물처럼 써대는 인간들을 모아둔 고오오오오급 닭장인데 누가 거기에 가게를 내고 싶지 않겠는가?
명품만 취급하는 가게는 말할 것도 없고, 고작 카페나 편의점 같은 편의시설도 매출을 쭉쭉 올릴 수 있다. 고작 건물 하나가 도심의 번화가 같은 역할을 하는 거다.
'이런 와중에도 준비된 상품을 파는 가게가 있고, 또 그걸 사는 인간들이 있군.'
결국 오픈을 강행한 명품 옷가게에도 손님이 있었고, 편의시설에도 할 짓 없는 부르주아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 북부 지구의 사람들처럼 무언가를 애타게 갈망하지 않는다. 돈은 썩어넘칠만큼 있고, 또 자신들은 높은 지위에 있으니 필요한 건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나중엔 저들도 알게 되겠지. 장사꾼들이 북부 지구 거주민이 아닌 외부 거주민들에게는 살인적인 바가지를 씌울 거란 사실을.
특히 돈이 썩어넘치는 호구 새끼들을 탈탈 털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하지 않는 자 먹을 수 없고, 돈을 벌 수도 없으며, 계급으로 인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상에선 상전같은 삶을 살았겠지만 지하에선 더이상 그런 삶을 살 수 없겠지.'
눈치 빠른 인간들은 벌써 지저 도시의 치명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이미 행동에 나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배부른 돼지들은 지금처럼 잠깐의 평화를 누리다가 준비되지 않은 폭풍에 알몸으로 노출될 것이다.
나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