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1화 (21/211)
  • 어둠 속에서(6)

    다행히 나의 그럴듯한 말에 속아넘어가준 군인들을 뒤로하고서 조용히 방학역을 떠났다.

    이제 민간인들은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비교적 안전하게 삶을 영위하게 될 거다. 삽시간에 정부와 군 수뇌부가 사라져버린 이 대한민국 땅에서 그런 삶이 언제까지 더 이어지겠느냐마는......

    '세상은 원래 그래. 모든 사람들이 선택받을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어.'

    나는 그런 아버지를 원하지 않았음에도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준비해준 길을 걷지 않고 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자신이 선택받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에 조소를 금치 못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반대로 누군가는 나와 같은 삶을 원했을 것이다. 비록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일지언정 따뜻한 집과 풍족한 먹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세계가 어둠에 휩싸이고 모든 인프라가 마비된 끔찍한 장소를 벗어나, 지저 도시라는 안락한 환경에서 제 2의 삶을 시작해보고 싶다고.

    지금이라면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저들이나 나나 모두 잘 알고 있다.

    지저 도시는 아직 미완성이다. 서둘러 완성시켜야 입주민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고, 추가 입주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상은 완전히 난장판이다. 예상치 못한 위험과 살갗을 파고드는 맹추위, 갑작스러운 인프라 단절때문에 삶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절충안이 필요하다.

    '지저 도시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물자가 부족하지 않도록 창고를 풍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도시를 운영하고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건 전적으로 높으신 분들의 권한이지만, 나같은 사람들이 가장 밑바닥에서 움직여주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오는 길에 본 병원 하나, 약국 3개, 아직 물자가 남아있는 편의점 2개, 교회 1개, 빌딩과 아파트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고작 도봉구를 조금 돌아다녔을 뿐인데 물자 수급처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숨어있는 위험 요소와 민간인 생존자라는 변수도 존재하겠지만, 그또한 감수해야 한다.

    "후우......"

    다시 통방중으로 돌아와보니 불길은 이미 꺼진 뒤였다. 정확히 운동장의 인조잔디만 태워먹고 끝난 것이다. 운동장과 화단은 비교적 거리가 있어서 불길이 번지지 않은 듯 했다.

    '시간은...4시간 30분 정도 지났네. 지금 등산하면 6시간에 맞춰서 대기조와 운반조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들과 함께 학교로 내려와 아직 회수하지 못한 물자들을 도로 회수하는 게 바람직하다. 일단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해야 그만큼 위험 부담도 줄어드니까.

    하지만 막상 이대로 등산하자마자 다시 내려올 거라 생각하니 쓸데없는 체력소모가 될 것 같았다.

    '차량은 도로가 꽉 막혀있지만...잘만 하면 빼낼 수 있겠는데?'

    북한산 인근에 몰려들었던 인파는 지저 도시 입구가 닫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가져온 차량은 그대로 내버려둔 상태였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도로를 주의깊게 살펴보니 인도를 침범한 차량들이 몇 대인가 있었다. 차가 꽉 막히니 참다못해 인도를 침범한 거다. 이 주변이 전부 어린이보호구역이라는 것도 잊고.

    '그만큼 급했겠지.'

    결국 거리에 몰려든 인파 때문에 인도를 침범해도 얼마 가지 못 하고 차를 세웠으리라.

    조심스럽게 차량에 접근해서 손전등 불빛으로 내부를 비췄다. 차량의 유리창이 깨져있긴 했지만 그 외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키도 그대로 꽂혀있네.'

    차 주인은 지저 도시에 입주해야한다는 생각만 앞서서 차키도 내버려둔 게 틀림없었다.

    '날이 좀 춥긴 하지만 차량 배터리가 고작 사흘만에 방전됐을리가 없지. 차 주인이 병신이 아니고서야 부동액도 제때 갈아줬을거고.'

    좌석에 흩어져있는 유리조각을 대충 쳐내고 문을 닫았다. 대한민국 국민 승용차라 그런지 핸들이나 기어의 그립감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키키키키키키키! 우우우웅!

    처음엔 빡빡하던 시동이 걸리자 한시름 덜었다. 도로가 꽉 막혀있긴 해도 사람이 사라진 지금은 인도가 널널했기 때문에 주행 자체는 문제 없었다.

    군인들이 지저 도시로 철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북한산 인근을 통제했기 때문에 북한산 내부 도로도 쾌적했다.

    자동 온도 감지 센서가 살인적인 기온을 감지하고 난방 시스템을 작동시키려 했지만 즉시 꺼버렸다. 기름 아까우니까.

    '가만. 차량을 지저 도시까지 가지고 들어갈 순 없지만, 지저 도시 입구 근처에 적당히 세워두고 차키를 내가 가진다면......'

    어라? 이거 의외로 나쁘지 않다.

    도로 사정이 워낙 험하니 반드시 인도나 야지로 이동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으나, 굳이 구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다. 여차하면 차량으로 물자를 실어나를 수도 있고.

    '다른 팀이 걸어서 움직일 때 나는 차 타고 편하게, 더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는 거잖아.'

    기름도 주변 주유소나 유류차를 털어서 확보해두면 된다. 사람 많은 밀수조직에 차량 정비공 한둘쯤은 있을테니 대가좀 주고 차량 정비까지 맡기면 그만이다.

    내가 하는 걸 보고 다른 밀수조직도 따라하겠지만 딱히 상관없다. 꽉막힌 도로에서 차량 하나 빼내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운좋게 확보한 차를 타고 북한산 도로를 쭉 올라가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지저 도시 북쪽 입구가 보였다.

    예상대로 북쪽 입구 앞에는 상당수의 밀수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드럼통에 장작이나 쓰레기 더미를 모아서 불까지 피워놓은 상태였다.

    지저 도시 입구에서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나가자 밀수범들이 귀신보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차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내가 그렇게도 신기한가?

    "왜요?"

    "아니, 그게...차량은 대체 어떻게 구한 거요? 도로가 꽉 막혀서 차량은 움직이지도 못 하겠던데."

    "이 주변은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 사람들이 엄청 몰려들었잖아요? 당연히 차량은 못 뺄 만큼 빡빡했죠. 그래서 좀 더 멀리까지 나가서 찾아왔죠."

    "허 참 대단하시구만. 우리 애들은 몇 시간이나 걸어다니느라 다리 아파 죽겠다고 징징거리는데."

    "잘 돌아다녀보면 저처럼 운 좋게 주인이 버리고 간 차량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운전이야 좀 거칠어도 인도나 야지로 다니면 되니까 크게 문제될 건 없고요."

    나중에 여건만 된다면 중장비를 준비해서 북한산 인근 도로를 싹 정리해야겠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보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다들 하나씩 건수 찾아서 돌아온 것 같은데 좀 우중충하네."

    "아, 그게......"

    한 밀수범 아재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김명호와 그의 똘마니들이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총성이 터지자마자 부하들과 함께 몸을 뺀 것이다.

    "살아있었습니까?"

    "당연히 살아있었죠."

    "총성이 들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비명 같은 게 들리길래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급히 빠져나온 겁니다."

    김명호와 찰싹 붙어있는 똘마니들은 그의 말이 맞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총성을 터뜨린 것도, 그 난장판을 만든 것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총을 쏴야 했어요. 작전을 방해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신 학교에 있던 생존자들과 만나서 물자 위치나 규모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으니 물자 확보 자체는 문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총을 쏴야할 정도로 위험한 장소라면 거긴 안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식이 형님도 너무 위험하면 그냥 빠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밀수 첫날부터 허탕치고 돌아가면 우리랑 내통한 군인들이 어떻게 보겠어요? 좆될 거 각오하고 위로 올려보내줬더니만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뒤에서 호박씨 까겠죠? 그런데 다른 팀은 물자를 가지고 왔네? 그 팀이 더 유능하니까 무능한 팀은 올려보내면 위험부담만 크고 손해겠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배척당하고 도태되는 겁니다."

    "...일리있습니다."

    그래도 차도식 밑에서 배운 건 있는지 김명호도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지금 분위기 안 좋아보이는 저 팀들 보세요. 절대로 내려가기 싫다는 분위기 팍팍 풍기죠? 저렇게 빈손으로 돌아가면 좆된다는 겁니다. 아, 그래서 아까 물어보려다 만건데 분위기가 왜 저래요?"

    "작전중에 사고가 있었답니다."

    "제가 낸 것 말고 총성은 없었는데요?"

    사고가 있었다면 위험 요소가 있었다는거고, 당연히 총기를 사용했겠지. 그런데 다른 총성은 내가 불장난을 할 때도, 민간인을 대피시킬 때도 들리지 않았다.

    "그게...저도 전해듣기만 한 거라 설명하기 굉장히 복잡한데...작전중에 앞서가던 팀원들이 갑자기 부상을 입었답니다."

    "전조도 없이?"

    "예, 선행하던 팀원이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고 쓰러졌다는데 놀라서 다가가보니 그 팀원의 눈알이 사라진 상태였답니다. 마치 누가 깔끔하게 파낸 것처럼."

    "......"

    마냥 낯설지 않은 이야기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좀 더 말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직후에 팀원들이 가지고 있던 헤드램프나 손전등이 다 깨지거나 뭔가에게 빼앗겼다는데, 솔직히 그건 저도 이해가 잘 안 되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다른 팀원들은 겁에 질려서 부상자도 버려두고 무작정 도망쳐왔답니다. 총쏠 생각은 못 했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무서워서 그럴 생각도 못 했다고......"

    "...쯧."

    대충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한 나는 혀를 찰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성이라고 해도 상식을 벗어나는 상황과 접하면 당연히 무서워하는 게 정상이다. 당장 나만 해도 무심코 이성을 잃고 총을 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던가.

    나야 훈련을 잘 받았으니 그렇다쳐도, 일반인 입장에선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료고 물자고 다 팽개치고 이 격벽 앞까지 도망쳐온 것이리라.

    "저 친구들은 이미 글렀구만. 돌아가면 바로 팀에서 방출될 거야. 첫 작전이라 실패해도 무작정 탓할 수는 없지만 작전이고 뭐고 다 포기한 인간들은 용서가 안 되지."

    옆에 있던 아재가 초코바 하나를 침으로 녹여먹으면서 말했다. 어조가 은근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경력자 같은 느낌이라 나는 살짝 떠보기로 했다.

    "밀수좀 해보셨나 봅니다?"

    "흐흐...내가 중국놈들이랑 서해에서 크게 해먹긴 했지."

    "육지 밀수랑 바다 밀수랑은 성격이 좀 다를 텐데요."

    "육지 밀수든 바다 밀수든 높으신 분들한테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뭘. 근데 밀수업계라는 게 참 야박해. 신뢰라곤 개미똥만큼도 없는 범죄자 놈들이 자기 평판은 더럽게 신경쓰거든. 그래서 신뢰고 뭐고 없는 게 밀수업계지만, 막상 그 신뢰라는 게 없으면 물건 하나 떼오지도 못하는 병신이 돼. 참 모순적인 직업이지."

    밀수범은 엄밀히 따지면 직업이 아니지만.

    "즉 자기 평판을 스스로 깎아먹은 놈들은 자연스럽게 밀수업계에서 퇴출당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인신매매하는 놈이다, 마약 거래하는 놈이다, 이런 건 평판에 눈곱만큼도 영향 없어. 이 바닥에선 밀수범으로서 믿을만한가 아닌가가 중요한 거야."

    "범죄자들끼리 프로의식 운운하는 거네요. 좋은 거 하나 배워갑니다 선배님."

    "남들 다 걸어다니는 마당에 혼자 차 타고 나타난 후배님인데 당연히 이정도는 서비스 해드려야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는 전형적인 뱃사람이었다. 구릿빛 피부에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수염,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칼자국.

    서해에서 중국놈들과 붙어먹었다는 건 사실일 거다.

    "그보다 후배님은 뭐좀 아는 거 없어? 잠자코 얘기 듣고 있는거 보니까 뭔가 아는 눈치던데."

    "에이, 저야 운좋게 차 하나 건져온 놈인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 마당에 차 하나 건지겠다고 혼자 활동 반경을 넓힌 게 보통은 아니지. 비실비실한 다른 놈들이랑 다르게 후배님이랑은 죽이 좀 맞을 것 같거든?"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죠. 그럼 저도 약소하지만 서비스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 어플로 직접 타자를 쳐서 그에게만 슬쩍 보여주었다.

    -돌아다닐 때 불 켜지말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후배님 말이라면 믿어봐야지."

    나는 메모장에 적어둔 내용을 지워버리고 김명호 일행과 다시 합류했다.

    머지않아 격벽이 열리고, 지저 도시 입구앞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정찰조가 따뜻한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이미 겁먹어서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 밀수고뭐고 다 포기하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