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9화 (19/211)
  • 어둠 속에서(4)

    지상에 나오자마자 만난 생존자라 반가워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심상치않음을 읽고 경계했다.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는데 지정된 대피소나 지하 방공호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남은 이들이다. 심지어 불도 없이 어두컴컴한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조잡한 무기까지 만들고서.

    "기, 김 수위님. 여긴 좀 그러니까...일단 아래로 내려가죠?"

    "그래요. 일단 얘기를 하더라도 내려가서 하는 게......"

    "여기서 당장 얘기하면 안 될 거라도 있나보죠?"

    내가 아니라 수위를 잡아끄는 두 사람의 행동을 지적하듯 묻자 돌아온 것은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사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위로 올라오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데 바깥에서 총성이 들리길래 혹시 군대가 와준 건가 싶어서 확인하러 온 건데......!"

    "군대는 이미 각지에 흩어진 군 기지나 지하 방공호로 철수했겠죠. 아니면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수용소를 방어하고 있거나. 전 오히려 당신들이 왜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우리라고 좋아서 여기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도 마음 같아선 지하 방공호나 수용소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고요......"

    여자의 말을 넘겨 받은 남자가 반쯤 호소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공포와 혼란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작 3일이라는 시간이 평범한 민간인의 목을 죈 것이다.

    "자자, 다들 진정하십시다. 거 바깥에서 들어온 양반은...딱봐도 군인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랑 같이 내려갈 겁니까?"

    "저랑 같이 가면 위험할 텐데요."

    "바깥의 그것들을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것들은 소음과 불빛에만 매우 민감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수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본관 아래에 대형 시청각실이 있습니다. 2030년을 준비해서 학교 이사장님이 몇 년 전에 새로 만든 공간인데 방음이 잘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숨으면 그것들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 합니다."

    "...그럼 저것들이 제게서 관심을 끊을 때까지만 잠시 신세지겠습니다."

    아무리 방음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한없이 고요한 세상에 총성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터뜨렸다. 당연히 시청각실에 숨어있던 이들도 깜짝 놀랐겠지.

    나는 그들을 따라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1층 입구는 튼튼한 셔터가 내려져 있었는데, 다행히 디지털식이 아니라 열쇠로 열고닫는 아날로그식이었다. 평소에는 학생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셔터를 닫아두는 모양이었다.

    본관 지하층은 그들이 말한대로 대형 시청각실과 비품창고, 그리고 화장실과 기계실이 전부였다. 다만 복도는 여전히 어두컴컴한 것으로 보건대 비상발전기는 가동시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물 내부라고 해도 꽤 추운데 비상발전기를 안 켰네요?"

    "...사태가 벌어진지 이틀째에 비상발전기를 가동시키긴 했습니다. 첫날까지만 해도 전기가 잘 들어왔었는데 이틀째가 되자마자 갑자기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나더군요. 학교에 남아있던 교사들이 학생들을 챙겨서 대피소로 떠나려다 그대로 발목이 잡혔습니다. 갑자기 전기는 안 들어오지, 바깥은 고작 이틀만에 영하 기온으로 떨어졌지, 준비도 안 된 어린애들을 데리고 안전도 확보 안 된 길로 무작정 떠날 수도 없지. 그래서 일단 학생들은 기숙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고 선생님들과 제가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켰습니다. 그런데...후우."

    "......"

    나는 수위가 말을 끝맺지 않았음에도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다.

    칠흑같은 어둠으로 잠긴 도시. 그와중에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켜서 다시 전력을 확보한 학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학생과 교사들. 기숙사에 찍혀있던 흙먼지 묻은 발자국.

    "놈들이 불빛에 반응하는 걸 그때 아셨군요."

    "...예. 저흰 꿈에도 몰랐습니다. 설마 그것들이 불빛을 보고 달려들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유감입니다."

    나는 어지러웠던 기숙사 내부를 떠올리며 목구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에게 습격을 받은 기숙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을 것이다. 본관을 지키고 있던 수위나 선생들은 미처 손쓸 틈도 없었겠지.

    내가 기숙사에서 혈흔이나 시체를 찾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피해자들이 그것과 같이 변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옷에 소독제를 퍼부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정말로 전염성이 있는 위험한 체액이라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멀쩡했다.

    혹시 내가 그것들처럼 변할 조짐이 느껴진다면 깔끔하게 내 입에 총구를 박아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여깁니다. 난방을 켜지 않아서 좀 춥긴 하지만...그래도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안내받은 시청각실의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는 배터리로 작동하는 캠핑용 램프 불빛으로 환했다.

    역시 학교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구호 물품이나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던 거다.

    "학생들은 이게 전부입니까?"

    최대한 냉기를 피하고자 시청각실의 넓은 바닥에 겹겹이 깔아둔 방수포와 부직포.

    그 위에는 어린 학생들이 방수포를 이불 삼아 덮은 채 새끼 펭귄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실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켰을 때 운좋게 저희 교사들과 함께 본관에 남아있던 학생들입니다."

    남학생 7명, 여학생 4명, 그리고 수위 옆에 붙어있는 남교사와 여교사를 제외하고도 두 명의 여교사가 더 있었다.

    즉 이 학교에서 살아남은 실질적인 생존자는 16명이라는 얘기다. 학급 하나를 채우지도 못하는 숫자다.

    여기가 기존의 방학중학교와 신방학중학교를 합친 통합방학중학교라는 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바깥에서 터뜨린 총성에 놀랐는지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 불안을 해결해줄 수 있는 현역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내가 군인이나 경찰이었다면 민간인보호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든 이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키려 했겠지.

    현실은 그냥 지저 도시에서 개인의 가치를 증명하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 밀수범이 되길 선택한 놈이다. 그게 인간 박한성이다.

    '이들도 북한산과 가까운 만큼 지저 도시에 대해 알고 있겠지.'

    여기서 불과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지저 도시 입구를 이들이 모를리가 있겠나. 당장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만 해도 이 주변에 어마어마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내게 모여든 시선을 하나씩 살폈다.

    나는 총을 들고 있고, 군용 배낭을 짊어지고 있으며, 제법 다부진 체격에 그럴싸한 복장까지 갖췄다.

    군복이나 경찰복만 입지 않았을 뿐, 누구라도 나를 구조대원으로 착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저 도시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안전을 고려해야 제한적인 민간인만 받아들였지만, 곧 지저 도시의 현실을 깨닫고 인력난을 걱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생존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역시 물자 부족 때문이겠지.'

    아직 지저 도시에서 식량 자급자족은 어려운 상황이고, 갑작스럽게 몰려든 대규모 피난민들 때문에 기존에 준비되어 있던 물자들도 배급 형태로 풀고 있다.

    지저 도시가 좀 더 그럴싸해지면 천천히 추가 입주자를 받아들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 일손이 부족할지언정 입이 늘어나는 건 막아야 하니까.

    나는 말없이 유지되고 있는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위해서.

    오랜 고심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다들 안전한 장소, 제한적이지만 생존에 필요한 물자도 원하시는 거죠?"

    "역시 저흴 구하러......!"

    "아뇨. 이거 하난 분명하게 합시다. 전 여러분을 구해주러 온 게 아닙니다. 이렇게 커다란 학교니까 생존에 필요한 물자가 있겠거니 싶어서 뒤지러 온 좀도둑이죠.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표현이 다소 거칠었는지 교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중학생 꼬꼬마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서로 교환합시다."

    "교환이라뇨? 우린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전 이 학교가 크다는 걸 알지, 이 학교에 정확히 어느정도의 물자가 쌓여 있는지, 또 도봉구에 지리도 잘 모릅니다. 대신 서울시가 도시 방공화 계획을 통해 모든 지하철역을 대규모 피난처로 만들었다는 건 압니다. 실제로 많은 생존자나 군인, 경찰들이 서울 각지의 지하철역에 머무르고 있을 거고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저한테 정보를 주시고, 저는 여러분들을 가장 가까운 역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닙니까?"

    이들은 학교에 쌓여있는 대량의 물자를 깔끔하게 포기하는 대신 안전을 택하고,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학교에 쌓여있는 대량의 물자를 취한다. 덤으로 이 지상의 정보도 함께.

    서로의 기회비용을 최대한으로 고려한 조건인 만큼, 어느 한쪽만 크게 손해볼 것 없는 윈-윈 거래였다.

    "...그렇게 합시다."

    "김 수위님!"

    "인정합시다 선생님들. 여기서 3일째 머무르고 있지만 외부에서 도움이 올 기미는 없고, 바깥에는 그 끔찍한 것들이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총을 들고 있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지금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차하면 지금이라도 혼자 몸을 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굳이 우리한테 기회를 준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우리가 외부 도움없이 언제까지 여기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식량은 둘째치고 여긴 안전하지가 않아요. 차라리 물자를 포기하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낫습니다. 저 어린 것들 생각도 하셔야지요. 그게 교사라는 직업 아닙니까?"

    수위의 호소가 통했는지 교사들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은 생활을 지속하느니, 차라리 하루빨리 안전한 곳에 가서 몸을 위탁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결정됐으면 먼저 거래부터 하죠. 이 학교에 정확히 어느 정도의 물자가, 어디에 쌓여있습니까?"

    "...일단 저희가 여기에 모아둔 건 본관의 매점과 지하 비품 창고에서 가져온 것들이에요. 16명이 잘 아껴쓰면 몇 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죠. 하지만 제대로 된 식자재는 급식소 대형 냉동고에, 그리고 국가재난사태나 환경재난 사태에 대비해서 쌓아둔 구호물품은 대강당 지하 창고에 있어요. 기숙사나 본관에 있는 매점 물자도 그렇게 적은 건 아니지만, 그 둘에 비할 바는 아니죠."

    남교사의 말에 나는 충전해둔 스마트폰을 꺼내 정보를 따로 저장해두었다.

    "그럼 이 주변에서 대량의 물자를 얻을만한 곳은 있습니까?"

    "그건 제가 이 근처에 살아서 알아요."

    남교사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여교사가 손을 들고 나섰다.

    내가 한 번 말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곤, 이내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저희 학교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시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있어요. 다른 지역의 어지간한 아파트단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규모가 크죠. 주변에 학교가 많아서 주거구역이 크게 개발됐거든요. 최근에도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추가되서 물자조달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규모가 제법 큰 한일병원도 있어요. 아, 역과 가까울수록 주상복합아파트나 고층빌딩, 그리고 대형 마트나 백화점도 많고요. 주변 도로도 워낙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헤맬 필요도 없을 걸요?"

    "좋아요. 그정도면 된 것 같네요. 이제 다들 짐 챙겨서 떠날 준비하세요."

    나는 미리 설정해둔 손목 시계의 타이머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이미 작전 시간이 2시간 정도 지났다. 이들을 가장 가까운 방학역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온다면 얼추 6시간 제한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사들은 솔선수범해서 학생들의 책가방에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물자들을 챙겨넣었고, 학생들은 교사들의 지시에 따라 체육복 위에 롱패딩을 걸쳤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라 자식 사랑에 극성인 학부모들이 미리 보내준 방한용품이 제법 많았다.

    학생들도 이렇게 답답하고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에 머무르긴 싫었는지, 어느때보다도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준비를 하는 사이, 나는 수위에게 다가가 혹시 기름이 남은 게 있냐고 물었다.

    "기름통이라면 기계실에 몇 개 남아있긴 합니다만......"

    "잘 됐네요. 어차피 더이상 쓸모도 없을 테니 제가 좀 쓰겠습니다."

    수위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기름통을 챙긴 나는 1층 현관으로 나섰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교사와 학생들이 본관의 모든 출입구를 잠궈버렸다고 했으니 본관에 그것들이 숨어들어왔을리가 없다.

    만약 놈들이 기어이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면 벌써 내가 눈치챘겠지. 아마 우회로를 찾다가 그냥 흥미를 잃고 다시 흩어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기름으로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놈들이 빛에 민감하잖습니까. 학교 전체를 환하게 밝힐 만큼 밝은 조명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냥 이 학교에 남아있는 놈들의 이목만 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죠."

    "그럼......?"

    "예, 제가 일을 끝마치면 다같이 본관 뒷문으로 나가서 학교를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 길로 방학역까지 가는 거죠."

    나는 수위에게 건네받은 마스터키로 잠겨있던 현관문과 셔터를 열었다. 다행히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기름통 2개를 양손에 쥐고서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 중앙으로 곧장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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