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7화 (17/211)
  • 어둠 속에서(2)

    "방학중은 지금 방학중. 흐흐흐...흐켁!"

    "한 번만 더 그딴 개그하면 진짜 죽여버린다."

    김명호가 실없는 소리를 하던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다시 내게 시선을 던졌다.

    정말로 여기서 가장 가깝고, 다양한 물자들이 쌓여있는 편의점이 아니라 학교로 가야겠냐고 되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차도식의 오른팔라 그런지 그는 무턱대고 목소리만 높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통합방학중학교는 도봉구에서 대학교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부지와 많은 건물을 자랑합니다. 중학교임에도 기숙사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체능과 과학고, 외고 진학을 위한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하는 차세대 교육기관이죠."

    "그거랑 지금 작전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런 학교니까 고작 편의점따위보다 훨씬 더 많은 물자가 쌓여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다들 학교에 있는 게 교과서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학교에 교과서만 있는 거 아니었어?' 하고 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올겁니다. 기숙사를 운영하는 거대 중학교, 수많은 학생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각종 생필품과 식자재, 그리고 학교에 설치된 매점이나 자판기에 공급하기 위한 상품들. 그것들이 고작 소규모 편의점보다 못할 것 같습니까?"

    "...상당한 양의 물자가 쌓여있겠군요. 형님이 왜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였나 싶었는데 이젠 좀 이해가 됩니다."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들은 김명호가 여전히 이해못한 부하들을 다그치며 재촉했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통합방학중학교, 통칭 '통방중'의 건물 외벽에 붙어섰다.

    남녀 각각 100명씩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기숙사를 운영하는 학교인 만큼 외벽 근처에는 엄청난 수의 CCTV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냥 CCTV가 아니라 동작감지형 CCTV였기 때문에 불빛한점 없는 어두컴컴한 밤에, 칙칙한 옷을 입고 접근해도 즉각 라이트를 밝히는 능동 감시 시스템이 탑재된 CCTV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CCTV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더이상 전력이 공급되지도 않고, CCTV에 내장된 별도의 배터리도 추위때문에 방전된 까닭이었다.

    거대한 교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도둑들은 문이 닫혀있고말고를 신경쓰지 않는다.

    적당히 주변의 받침대가 될만한 물건들을 끌어와 쌓아서 벽을 타넘었다.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물자 회수보다 정보 습득이 우선인 정찰이니까 몰려다니는 건 효율이 좋지 않습니다. 한 명, 혹은 두 명 단위로 흩어져서 최대한 많은 물자를 찾아보죠."

    "뭐, 어차피 선발정찰조인 나나 그쪽은 형님이 보장한 개인 소유권이 있으니 작전중에 뭘 주워서 가진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겠지. 하지만 같은 팀인 만큼 서로 정보를 감추거나 하진 맙시다."

    "그럴 거라면 제가 왜 비싼 포인트까지 내면서 팀에 합류했겠습니까? 그건 걱정말고 이 더럽게 넓은 학교나 얼른 수색하죠."

    약간이지만 나를 경계하는 김명호를 상대로 가볍게 능청을 떨어주고, 우리는 2, 2, 1 포지션으로 갈라졌다.

    김명호는 자신의 부하 한 명을 데리고 먼저 가장 가까운 급식소로 향했다. 급식소에는 대량의 식자재가 쌓여있을 것이고, 마침 외부 기온이 영하라서 어지간한 식자재는 아직 상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머지 두 명의 부하들은 급식소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남학생 기숙사로 향했다.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남학생들이 어른(교사)들의 눈을 피해 뭘 꿍쳐두고 다니는지, 양아치인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면서.

    나는 학교 본관에서 비교적 가까운 여학생 기숙사부터 본관을 차례로 훑기로 했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 것이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에겐 최소한의 여성 용품이 필요했다. 생리대나 세안제, 피부 트러블 걱정이 없는 BB크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학생들이라고 해서 절대 남학생들보다 얌전한 건 아니다. 남학생들사이에서 양아치가 있다면 여학생들 사이에도 양아치가 엄연히 존재하는 법. 일탈 행위를 즐기는 건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밖에도 가져갈만한 건 고데기나 머리빗, 화장지, 그리고 양아치들이 몰래 숨겨뒀을 술이나 담배 같은 것들이군.'

    쓸만한 여성 용품과 사치품을 챙기고나면 곧장 학교 본관으로 들어가서 매점과 자판기를 털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학교 내부에 쌓여있는 비상 물자도 찾아볼 생각이고.

    다들 전쟁이 터지면 지하철이나 지하 방공호를 피난처 1순위로 꼽지만, 의외로 규모가 큰 학교들도 피난처에 속한다. 실제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두는 학교들이 꽤 있다.

    전례없는 태풍으로 인한 홍수, 그로 인해 발생한 수재민들이 어째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피난처 삼겠는가? 학교들이 다 대비를 해두기 때문이다.

    '민간인들에게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구호 물자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있겠어.'

    텐트용 천막, 구급 키트, 보관기간이 매우 긴 비상 식량 등등. 지금의 지저 도시에는 하나같이 꼭 필요한 것들 뿐이다. 설령 당장은 필요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격이 급등하겠지.

    나는 여학생 기숙사 1층 창문들 중 잠기지 않은 것을 찾았다. 예상대로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던 학생들은 3일 전에 급히 빠져나간 탓에 문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다. 그나마 현관문만 자동도어락 때문에 잠겼을 뿐.

    이미 찬바람이 들어 냉골이 된 기숙사에 들어서자 내부가 상당히 엉망진창이라는 걸 알았다.

    여기저기 막 널려있는 옷가지나 속옷, 미처 챙기지 못한 개인 용품따위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마음이 급한 탓에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졌는지 자잘한 기물파손의 흔적도 보였다.

    나는 남의 손때 묻은 물건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필요한 물건만 찾아서 챙겼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자주 밖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예비 용품을 쌓아둔다.

    "화장솜...이런 것도 쓰려나?"

    화장솜을 마치 신문물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는 남자들을 보고 여자들은 한숨을 쉬겠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대다수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화장품이란 BB크림이나 로션이 전부였고, 세안제고 나발이고 대충 마트에서 싸게 사온 비누 팍팍 문질러서 얼굴 슥 닦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마스크팩? 보습제? 영양 크림? 그딴 건 모른다.

    양아치 여학생들이 꿍쳐둔, 아직 뜯지 않은 담배나 술도 몇 병 챙겼다. 이것들은 모두 선행 정찰조인 내가 개인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배분받을 내 몫과는 별개로.

    몇몇 방을 돌면서 개인적인 용무를 끝마친 나는 기숙사 복도에 남겨진 혼란의 흔적들을 유심히 살폈다.

    각기다른 흙묻은 신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었고, 신발자국들이 향하는 것은 대부분 복도 끝이었다. 출입구인 현관문이 아니라 기숙사 복도 끝.

    '보통 그만한 소동이 일어나면 가족과 합류하려고 집에 돌아가는 게 정상 아닌가?'

    당장 나만해도 두 번 다시 돌아가기 싫었던 가정에 복귀했다. 하물며 세상물정 모르는 애들이 집단 패닉을 감당할 수 있었을리가 없지.

    나는 한 손에 손전등을,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쥔 채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뚜벅뚜벅, 묵직한 군화가 대리석을 밟을 때마다 짧고 강렬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내가 발에 힘을 주면서 최대한 발소리를 낮추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발자국들이 계단에도 있다.'

    정확히는 현관에서부터 들어온 발자국들이 새하얀 대리석 복도에 찍혀 있었다. 청소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지 않아서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바깥으로 나간 발자국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학교 운동장은 모두 인조잔디가 깔려있어. 러닝용 도보도 따로 깔려있었고. 화단이 있긴 했지만 교사들 몰래 담배피는 양아치들이 아니고서야 굳이 화단에 들어갈 놈들은 없지. 그럼 이 흙먼지들은 다 어디서 온 거지?'

    이만한 규모의 학교인 만큼 정기적으로 인조잔디와 화단을 관리하는 외부 인력이 따로 있을 것이다. 즉 이 학교내에서 신발 밑창에 흙먼지를 잔뜩 묻히려면 화단에서 마구 뒹굴었거나, 처음부터 학교 바깥에서 들어왔어야 한다는 얘기다.

    '발자국들은 하나같이 작아. 전부 학생들이겠지. 큰 발자국은...딱 하나 있군.'

    큰 발자국은 학생들을 인솔한 교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계단을 오르내린 발자국들에서 차이점을 발견했다. 계단 위로 올라간 발자국은 흙먼지가 묻어있었지만, 계단에서 내려온 발자국들은 흙먼지보다 훨씬 더 색이 진했다.

    손전등 불빛을 좀 더 가까이 들이대고나서야 나는 그것이 단순한 흙먼지가 아니라 신발밑창에 눌러붙은 어떤 액체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발자국들은 결국 복도 끝에 위치한 기숙사 지하 계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온 발자국들은 뭔가 달라.'

    이제 나는 기숙사 위층부터 살펴야할지, 기숙사 지하층부터 살펴야할지 선택해야 한다.

    '모든 발자국이 복도 끝 지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되돌아나온 발자국이 없어.'

    지저 도시에선 건물 전체에 긴급하게 빛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계실에 들어가서 개고생을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도 개고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첫째로 여기엔 내 가족들이 없고, 둘째로 지저 도시와 달리 여기엔 즉각 나를 도와줄 군대나 경비업체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위층으로 향했다.

    기숙사는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방마다 2명의 룸메이트가 거주하는 형태였다. 2층 중앙에는 비교적 넓은 휴게 공간과 바로 옆에 소형 매점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매점은 사건 당일에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셔터가 내려간 상태였다.

    '검은 발자국들이 2층과 3층을 꽤 돌아다녔군.'

    3층으로도 이어지는 흔적과 2층 복도를 굉장히 많이 누빈 발자국들이 발견되면서 나는 적잖이 긴장했다.

    권총의 세이프티는 이미 풀어뒀고, 언제든지 발포할 수 있게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뒀다.

    총기 안전수칙상 세이프티를 풀더라도 오인사격에 대비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면 안 되지만, 그건 지금 내가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각 방마다 열린 창문으로 칼바람이 들어오는 탓에 휘이이잉, 하고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소음이 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검은 발자국들이 모든 방을 헤집었다.'

    나는 2층 복도를 참 열심이도 돌아다닌 검은 발자국을 따라 방문을 하나씩 열었다. 어떤 방은 굳이 내가 열 필요도 없었다. 문 손잡이가 통째로 뜯겨나가 있었으니까.

    검은 발자국이 방문한 방들은 놀랍게도 1층과는 달리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1층보단 훨씬 더 정돈되어 있었고, 훨씬 더 정적이었다.

    나는 깨져버린 방의 창문과 더이상 주인이 없는 침대를 번갈아보았다.

    침대에는 누군가가 누워있었던 흔적은 있었지만, 이미 온기나 체취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만 나는 방의 중앙에서 좌우 끝에 배치된 싱글 배드 2개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내가 침대 위에서 어떤 흔적을 찾고 있을 때, 문득 흘러내린 침대보 사이로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싱글배드 아래의 좁은 공간. 일반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숨겨두기 좋아하는 장소.

    특히 사춘기를 한창 겪고있는 이맘때의 학생들은 책상 서랍보다 침대 아래를 훨씬 더 비밀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비밀스러운 장소에는 오직 물건과 비밀만을 보관하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직접 보관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손전등은 진즉에 껐다.

    철컥.

    잠금 장치가 박살난 문이 반쯤 걸치듯 닫힌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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