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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3화 (13/211)
  • 세컨드 라이프(3)

    엑소스켈레톤의 보정을 받는 내게 일일노역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엑소스켈레톤 면허를 가진 사람은 나름 고급 기술직 대우를 해주기도 하거니와, 그런 주제에 맡기는 일은 대부분 단순 노동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고작 땅을 파는 일에 불과하지만 굴삭기 면허를 가진 사람과 삽만 든 일반 노동자의 대우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도 지정해준대로만 하면 딱히 복잡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엑소스켈레톤 면허 소지자는 페이를 좀더 쳐줬다.

    첫 일을 한 것치고 받은 일급은 18만 포인트.

    아무래도 신도시는 기존의 한국 화폐를 더이상 사용할 생각이 없는지, 지저 도시 입주자들의 계좌 내역을 보유하고 있는 각 은행들의 데이터베이스에 약간 손을 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1대1 비율로 원(₩)을 포인트(P)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마 더이상 지상에서 사용하던 한국 화폐를 사용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 방침이리라.

    이왕 신도시로 들어왔겠다, 신도시에 들어온 놈들끼리 지지고볶으면서 어떻게든 잘 살려면 통화 개혁과 내부 문제 개선이 필수적이었겠지.

    일일노역을 끝낸 나는 지저 도시 기준 저녁 5시에 퇴근 체크를 했다. 디그러쉬는 꽤 선진적인 회사였기 때문에 점심 시간도 근로시간으로 쳐줬다.

    그렇게 9시간 일하고 시간당 2만 포인트를 받은 거다.

    노역에 지친 아재들은 자신들의 전자계좌에 정확히 입금된 포인트를 확인하고는 북부 단지로 향했다. 나도 그들의 행렬에 섞여들었다.

    북부 단지는 지저 도시 입주 얘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이미 지저 도시를 개발하고 있던 사람들 때문에 인프라가 우선 개발되었다. 당연히 상권도 존재했고, 내수 경제도 어느정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어제 자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입주하면서 각자 챙긴 보급 물자를 가져왔고, 우리가 오기 전에도 잔뜩 쌓여있던 물자로 장사를 하고 있었을 거다. 북부 단지는 먹을 게 많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식량 사정에 따라 북부와 남부의 차이가 급격하게 갈리겠지만, 식량 사정이 안정화된다는 전제하에 가장 시끄러운 곳은 북부단지가 될 거다.

    대다수의 서민들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고, 가장 먼저 인프라가 구축된 만큼 편의성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셔틀 버스를 타고 가보니 예상대로 북부 단지는 내가 사는 남부 단지와는 때깔부터 달랐다.

    남부가 도심 속에서 정적인 자연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한 결과라면, 북부는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느껴지는 시장통 같은 느낌이었다.

    건물의 크기나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딱봐도 인구밀집도가 높아보이고, 소음 공해나 쓰레기 배출 문제로 말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어딜 어떻게봐도 남부보단 좋다. 사람과 물건이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화폐인 포인트도 끝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 구매와 판매, 소비와 생산이 기가막히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상업 지구가 바로 북부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냐고?

    기회를 의미한다.

    이곳은 기회의 땅이다.

    지저 도시라는 거대한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 같은 땅.

    언젠가 반드시 정체되고 도태당할 수밖에 없는 이 절망의 도시에서 피어난 한 줄기 희망.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북부 단지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군인은 거주지가 다른 특정 직급의 민간인이 다른 지구에 입장하려면 일정량의 통행세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벌써부터 '세금 걷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같은 HR 등급의 인간들은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을 방문할 것이다. 북부는 이미 개발이 다 끝났으니까. 남은 건 토지 개척을 하면서 조금씩 땅덩어리를 넓혀나가는 것 뿐인데, 그건 당장 할 계획은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지. 처음부터 지저 도시에 빈 손으로 들어온 사람, 모종의 이유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 벌 궁리를 할 거야.'

    전자거래로 1천 포인트를 지불한 나는 도때기 시장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북부 단지에 발을 들였다.

    저 멀리, 지상에서부터 쏘아올린 조명의 광채를 받아 빛나고 있는 거대한 기둥이 보인다. 동서남북으로 나뉜 4개의 지구마다 1개씩 존재하는 엘리베이터 통로였다.

    참고로 내가 타고 내려온 엘리베이터는 도시 정중앙에 위치한 북한산 정상 엘리베이터였다.

    "자자, 방한 용품 팝니다! 바깥에서 가져온 방한 용품! 메이커라 잘 헤지지도 않고 관리도 편해요!"

    "뭐든지 수리해드립니다! 개인용 엑소스켈레톤, 차량, 전자제품까지 모두 저렴한 가격에 모십니다!"

    "오늘 막 보급소에서 풀린 신선한 돈육과 우육! 인당 200g 판매 제한! 지금 안 사면 후회합니다!!"

    "휴대용 식량부터 서바이벌 용품까지! 어지간한 잡화는 전부 취급합니다! 매입은 최고가, 판매는 최저가로 책임집니다!!"

    아직 신도시에서 제대로 된 법이 개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칭 상인이란 양반들은 아무렇게나 판을 깔고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치품부터, 미리 꿍쳐두었던 생필품까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는 이곳은 실로 원시적인 시장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이었다.

    사람들은 일단 목소리 큰 양반부터 찾아본다음, 아니다 싶으면 상품 가짓수가 많은 이를 찾아갔다. 그러다 가격 흥정도 해보고, 상품 상태도 확인해보면서 나름 신중하게 거래를 한다.

    어차피 주변에 널린 게 상인과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굳이 상인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으나, 반대로 상인들은 사재기 방지 및 시장 활성화를 위해 담합하여 인당 구매 수량이나 가짓수를 제한했다.

    돈이 급한 쪽과 물건이 급한 쪽의 숨 막히는 눈치 싸움으로 자연스럽게 내수 경제를 활성화 시킨 것이다.

    "재밌네."

    열악한 환경, 없는 살림에도 인간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버둥 친다.

    당연하지만 이 광경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쯤은 다들 알고 있을 거다. 내수 경제를 밑받침하는 건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맞물려야 하는 법이니까.

    당장은 수요와 공급에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식량과 각종 생필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거다.

    지금도 서부 단지에서 고생중인 목장 주인이나 농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 내년 봄부터 가을까지 진정한 보릿고개가 시작될 거다.

    올 가을부터 내년 봄까지는 어찌어찌 버틴다 쳐도, 수확 시기인 내년 가을까지 버틸 방법이 요원하다.

    하지만 인간이 어떤 동물인가? 없으면 없는대로 만들고, 어떻게든 구해서 쓰는 동물이다.

    나는 이 북부에서 유일하게 지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엘리베이터 통로를 바라보았다. 각 구역의 치안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위 관료, 혹은 군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

    그들은 이미 막대한 이익을 취하면서 위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 거다. 설령 몰랐다고 해도 벌써 눈치빠른 장사치들이 호다닥 달려가서 알려줬겠지.

    '밖으로 나가면 돼.'

    어떤 상황이 도래했을지 모를 위험한 지상에 소수의 지원자를 받아서 올려보내고, 그들이 구해온 각종 사치품과 생필품 일부를 뇌물로 받는다.

    그렇게 내부 거래가 끝나면 남은 것들은 적당히 장사치들이 나눠먹게끔 내버려둔다. 그러면 내수 경제는 계속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거다. 세살짜리 꼬마도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과정은 어렵겠지만.

    '진상 VIP들이 잔뜩 몰려있는 남부는 어림도 없을 거고, 서부도 도시 전체의 식량 사정이 걸린 곳인 만큼 경계가 삼엄하겠지. 서부도 안 돼. 동부는 지상에서 얻어온 생필품이나 사치품따위보다 다양한 '데이터'를 원할 거야. 허구한 날 책상앞에 앉아서 데이터 뜯어보고 통계표 짜기 좋아하는 놈들 천지니까. 마지막으로 북부는 생필품과 사치품의 지속적인 공급이 간절할테니 말할 것도 없고.'

    나는 기회를 얻으려면 이 북부에서 금싸라기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탁월한 눈썰미로 기회를 포착하고, 주변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면 대단한(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밥상머리에서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다.

    '뭐든 부족한 이 신도시에 생필품과 사치품은 아무리 많이 공급돼도 부족해.'

    인력난은 풍족한 자원과 쾌적한 환경만 조성된다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이곳에 몰려든 수많은 남녀가 서로 모른척 손가락만 빨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슬그머니 복잡한 시장통의 골목으로 빠져, 일반인이 비교적 접근하기 힘든 후미진 구역으로 들어갔다.

    북부는 워낙 주먹구구식으로 개발된 탓에 건물 배치도가 엉망이었고, 자연스럽게 미로같은 골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사업 계획보다 도시 개발이 우선이었던 정부를 대신해, 노동자들이 알아서 필요한 건물을 지었을 테니까.

    처음에는 일꾼들이 머무를 숙소, 그다음은 일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파는 편의점이나 슈퍼마켓, 혹은 이동식 판매트럭(포장마차), 나중에는 유흥을 위한 노래방이나 PC방이 등장했으리라.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개발지구란 이토록 복잡하고 정신없다.

    '이 신도시에 멀쩡한 인간들만 들어왔을리가 없지.'

    골목을 이잡듯이 뒤지던 나는 곧 분위기가 험악해보이는 인간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낡은 차고에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거나 개조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민간용 엑소스켈레톤에 덕지덕지 장갑판을 붙이거나,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무기를 탑재하는 중이었다.

    "형님, 정말 이거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이 새끼야. 그거 장갑 꼬라지좀 봐라. 넌 그게 군용 엑소스켈레톤처럼 보이냐?"

    "어...아니죠? 알류미늄합금 장갑판 붙인 거니까."

    "알면서 왜 물어? 있어보이게 도색도 좀 하고, 그 뭐시냐...헤드램프도 달아! 그리고 무장은 어떻게 됐어?"

    "군 부대가 긴급 피난하면서 몰래 챙겨온 예비 무장 일부를 좋은 가격에 팔아주겠답니다. 피난 중에 몰래 추가로 챙겨온 거라 장부에 걸릴 일도 없다던데요."

    "잘 됐네. 똑똑한 애들 몇명 데리고 가서 교환하고 와. 가격은 기존 그대로지?"

    "K-2 소총 한 정당 50만 포인트, 혹은 그에 준하는 식량이나 생필품. 탄약은 무조건 천발 단위로 거래한답니다."

    "새끼들 비싸게도 받아쳐먹네. 지들도 밀수하는 주제에 뭐 잘났다고 그렇게 받아먹어?"

    밀수. 험상궂은 인상을 자랑하는 중년 사내에게서 내가 원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새끼들 어제 저녁에 한 번 엘리베이터 가동해서 밖에 나갔다 왔다며? 어떻게, 루트는 확보 했대냐?"

    "북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은평구쪽으로 조금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데, 밖이 굉장히 춥다는 것 빼면 특별한 문제는 없답니다."

    "조오오오아아아쓰! 은평구가 서울에서 인구밀집도가 기가막히게 높은 곳 아니냐. 거기 털면 생필품이나 식료품 정도는 가득 나오겠지."

    "아니면 군인들이랑 다르게 의정부를 터는 방법도 있고요. 흐흐!"

    "그래그래. 근데 일단 우리도 준비가 돼야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챙겨오고, 밀수도 할 것 아니냐. 안 그래 형씨?"

    중년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렌치를 휙 집어던졌다. 렌치는 정확히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거대한 쓰레기 분리수거함 덮개를 맞고 튕겨나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그의 부하로 추정되는 인간들이 하나둘씩 연장을 들고 나왔다.

    아무래도 프리미엄 회원권을 구입하지 않으면 다음 얘기는 못 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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