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0화 (10/211)
  • 지저 도시(6)

    인간에게 빛이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 빛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빛이 없으면 앞을 볼 수 없고, 안전을 장담할 수도 없으니까.

    바깥에서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 기껏 암순응이 되었던 눈은 다시 쓸모가 없게 되었다. 대신 손전등 불빛을 잠깐 비춰서 확인했던 내부 구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걷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처럼, 나또한 발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게끔 고양이처럼 움직였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덮는 부드러운 페인트 마감재가 발끝에서 확실히 느껴질 만큼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아까 잠깐 살폈을때 지하 1층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간처럼 보이지 않았어. 그렇다면 지하에 매설된 전선과 수도, 가스관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게끔 설계되어 있을 거야. 경비업체 직원들 말처럼 당연히 비상발전기도 여기 있을 거고.'

    그외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이미 그 사태가 일어났지만- 사람들이 임시 피난처로 쓸 수 있는 공간 정도일 것이다. 기계실을 제외하면 비상물자가 보관된 창고나 비품실이 전부일 터.

    나는 창고 앞을 곧장 지나쳤다. 빛이 사라지기 직전에 확인한 내부 구조는 방진 대책인 지 거대한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내 걸음걸이의 방향이 맞다면, 그리고 내 보폭이 일정하다는 가정하에 기둥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면 아마도 깔끔하게 배치된 도관들이 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손전등을 0.5초 정도 켜서 확인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기계실의 위치는 조금 전에 이미 파악했으니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 외부에서 내부로 연결된 모든 '라인'은 결국 깔끔한 정리를 위해 특정 구간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계실처럼.

    비상발전기가 정상적으로 가동했다면 지금쯤 덜덜거리는 시동음과 함께 건물에 전력이 공급됐겠지만, 이곳은 기분나쁜 정적과 어둠만이 짙게 내리깔린 낯선 공간으로 변모한지 오래였다.

    달칵 하고 전방을 향해 0.5초 정도 손전등을 한 번 더 켜서 기계실의 문 위치를 확인한 나는 조금 당황했다. 놀랍게도 문은 반쯤 열려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기계실 안에 들어갔다는 얘긴데, 정작 내부에서 불빛이나 소음이 새어나오지 않았으니 굉장히 거슬렸다. 끈적끈적한 불쾌함이 서늘한 등골에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다시 정적과 어둠뿐. 상층에 비하면 체감 온도가 훨씬 낮은 것을 눈치챈 나는 몸이 굳지 않도록 손가락과 발가락을 끝없이 움직여야 했다. 땀을 흘렸기 때문에 체온을 더 빨리 상실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찝찝하다. 내 생각이 맞으면 안 된다. 어떻게 찾은 피난처인데.

    혹한과 무질서, 그리고 정체모를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지상과 달리 지하 12km 만큼은 안전할 거라고 굳게 믿고 내려왔다.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다.

    조심스럽게 기계실 앞에 접근한 나는 행여나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무턱대고 문부터 열지 않았다.

    대신 반쯤 열려있는 문틈으로 고개만 빼꼼 들이밀었다. 혹시 안쪽에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먼저 대화를 나눈 다음 다시 손전등을 켤 생각이었다.

    간신히 얼굴 하나쯤 들어갈 문틈으로 고개를 기울이던 찰나, 나는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섰다.

    "......"

    문 틈을 스친 얼굴에 느껴지는 서늘하면서도 축축하고, 진득한 감촉이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읽혔다.

    손전등 불빛을 비춰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물기라곤 없는 이 신축 건물 지하에서 인간의 피부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액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되니까.

    '기름이겠지.'

    비상발전기 탱크에 상시 기름을 넣어두는 건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준비가 덜된 건물의 비상발전기라면 더더욱 기름이 들어가있을리가 없다. 아마 시설관리인과 경비직원들이 급하게 기름을 넣기 위해 행동만 앞서다 문 앞에서 부딪혀 기름을 엎거나 묻혔겠지.

    이정도면 내 추리도 제법 아닌가? 한국에서 합법이 된 사립탐정이나 해보면 그럭저럭 장사가 잘 될 것 같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희미한 비린내를 애써 떨쳐내며, 결국 얼굴을 좀 더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기게실 내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손전등 불빛을 한 번 더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달칵.

    손전등 불빛으로 빠르게 확인한 기계실 내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동시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라는 것도 알았다. 인기척이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1층으로 돌아가서 경비업체 직원들에게 말할까? 아니면 여기까지 내려온 김에 내가 직접 발전기를 돌리고 올라가서 말할까?'

    그렇게 기계실 문에 몸을 반쯤 넣은 채 고민하고 있던 찰나.

    콰아앙!

    넓은 지하 공간에서 고막을 찢을 기세로 울려퍼지는 소음에 나는 하마터면 손전등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래도 꼴에 배운 건 있어서, 일단 무작정 자세부터 낮추고 봤다. 소음의 진원지는 내가 들어왔던 비상계단 입구 방향이었다. 혹시 몰라서 활짝 열어둔 금속문이 무언가에 의해 거칠게 닫힌 것이리라.

    '1층에 있는 사람들은...당연히 듣지 못 했겠지.'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다 건물 바깥에선 연이어 총성이 울려퍼지고 있다. 지하에서 조금 큰 소음이 울렸다고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설령 들었다고 해도 희미한 총성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2개 뿐이다.'

    지하와 1층을 이어주는 중앙 계단과 엘리베이터.

    하지만 전력이 공급되지 않은 탓에 엘리베이터는 작동 중지 상태였고, 1층과 지하를 이어주는 중앙 계단은 아직 미개방 상태라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누가 와서 직접 셔터 잠금을 해제하지 않는 한 중앙 계단은 사용할 수 없다.

    결국 남은 건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켜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방법 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비상구로 되돌아가느냐 인데......'

    그 계획은 1초도 고려할 필요없이 깔끔하게 포기했다. 유일한 출입구를 '닫은 것'과 '닫힌 것'은 엄연히 큰 차이가 있다.

    나는 머리에 꽃밭만 들어찬 놈들처럼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할 뿐.

    결국 나는 손전등을 켠 채 기계실로 들어간다는 선택지를 내렸다.

    끼이이이......

    예상대로 철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자아냈다. 나는 재빨리 신발 한짝을 벗어서 저 멀리 힘껏 던졌다.

    신발이 천장의 금속배관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음을 낸 순간, 나는 주저없이 기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굳게 닫았다. 내가 신발을 던진 순간 바깥에서 스스스스스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건 기분 탓이리라.

    "허억...허억...허억......"

    지금까지 참았던 숨을 토해내고 다시 들이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뇌가 부족한 산소를 더 달라고 보채는 통에 몇 번이나 거칠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시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당장은 안전하다고 판단한 나는 기계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계실 내부에는 기계실이란 명칭에 걸맞게 다양한 설비가 존재했다. 난방 관리 시스템부터 수도와 가스 관리 시스템, 그리고 입주민 모두 간절히 원하고 있는 비상발전기까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비상발전기 앞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기름통을 발견했다. 아직 사용한 흔적도 없는 말끔한 기름통을 집어들자 제법 묵직했다. 그런 기름통이 안쪽에 몇 개나 놓여 있었다.

    비상발전기는 문자 그대로 비상용 발전기이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도 쉽게 가동시킬 수 있게끔 자체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다.

    비상발전기에 표면을 살펴보면 우선 기름탱크 내부의 기름잔량과 연결된 배선 상태를 확인하라는 그림이 존재했다.

    다음으로는 비상발전기에 사용하는 기름의 용량을 확인해야 한다. 이만한 규모의 건물에 일시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름이 쓰일 것 같은가? 100리터? 200리터? 놀랍게도 그 이상이다.

    내가 집어든 기름통 하나가 대용량 30L 짜리였고, 기계실에 널브러져 있는 기름통을 다 모아보니 딱 10개였다. 즉 300L가 확보된 셈이다.

    '이정도 양으로는 그리 오래 버티기 힘들겠는데.'

    건물 규모가 규모인 만큼 잡아먹는 전략량이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당장 300L의 기름을 다 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를 포함한 아파트 거주민들과 경비업체 직원들에게 필요한 건 잠깐의 빛과 시간이었으니까.

    기름 탱크의 주유구를 찾은 뒤엔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이 기름 먹는 하마에게 300L의 기름을 몽땅 채워넣는 것. 내 몸이 남들에 비해 훨씬 단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30L 대용량 기름통을 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건 조금 많이 힘들었다.

    'AVR(Auto Voltage Regulator) 발전기니까 일단 가동시키기만 하면 전력 공급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문제는 난데.'

    건물에 전력이 공급된다고 한들 나는 여전히 지하 1층에 홀로 남아있다. 혼자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일단 혼자라고 생각한다.

    덜덜덜덜덜덜!

    어렵지 않게 가동시킨 비상발전기가 곧 맹렬하게 엔진을 돌리면서 기름을 잡아먹고 전기를 뱉어냈다. 본격적으로 가동음이 터져나오자 어두컴컴했던 기계실에 전등 불빛이 돌아오며 주변이 환해졌다. 더이상 손전등은 필요없었다.

    콰아아아아앙!

    건물 내부에 전력이 공급되고 전등 불빛이 켜진 순간, 기계실의 문이 바깥에서부터 무언가에 의해 크게 찌그러졌다.

    "염병."

    꼭 일이 잘 풀릴 것 같을 때 이러더라. 스쿠터를 얻었을 때도, 어두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도, 지저 도시 입주를 앞두고 있을 때도.

    쾅! 콰아아앙!

    무언가가 문에 몸을 처박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문을 두들기고 있는건지, 통짜 금속문이 바깥쪽에서부터 크게 찌그러질 때마다 오븐 속에서 빵반죽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바깥의 무언가가 굳이 기계실만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를 고민했다.

    기계가 시끄러워서? 그럼 소음에 이끌렸다는 건데 바로 윗층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총성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 시끄러웠다. 그걸 듣고도 굳이 윗층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니 소음 때문에 여길 노리는 건 아니다.

    그럼 갑작스러운 불빛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기계실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에 내부의 불빛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을 거다. 따라서 굳이 기계실을 노릴 이유가 없다.

    혹시 '나'에게 반응해서? 이건 가능성이 꽤 높았다. 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조용히 움직였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움직이던 내 인기척 정도는 느꼈을 테니까.

    쾅! 쾅! 쾅!

    나는 점점 더 크게 찌그러지는 문을 보며,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짐작했다. 시간적으로는 대충 30초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다가 내부 공기 청정 시스템과 연결된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기계실 내부에 비치되어있던 공구함의 드라이버를 집어들고 환풍구 철창을 고정하고 있던 나사를 풀어냈다.

    쾅! 쾅!

    등 뒤에서 문이 거의 다 찌그러지고, 바깥의 무언가가 나를 포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성공적으로 철창을 들어낸 나는 곧장 환풍구로 뛰어 올라갔다. 작업용 사다리가 근처에 없었더라면 이것도 힘들 뻔 했다.

    '시발시발시발시발시발.'

    등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콰아아앙! 하고 문짝이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뭔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형용할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찢어질 것 같은 새된 음성은 마치 고통에 찬 절규 같기도 했고, 분노로 이성을 잃은 비명 같기도 했다. 어느쪽이든 나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고 팔꿈치를 움직여 좁은 환풍구를 기어나갔다.

    천장의 환풍구는 엘리베이터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전력이 돌아온 덕분에 엘리베이터 통로 내부에 비상등이 켜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는 걸 보니 경비업체 직원들이 아직 통제하고 있는 듯 했다.

    엘리베이터는 정비공들을 위해 통로 양옆에 사다리와 발판을 만들어둔다.

    환풍구 안에서 어렵사리 자세를 바꿔 철창을 미친듯이 발로 걷어찼다. 곧 떨어져나간 철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절벽같은 발판에 안착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빠른지, 내가 눈알 굴리는 게 빠른지 모를 만큼 마음이 급했다.

    허나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여 간신히 비상용 사다리를 붙잡았다. 그렇게 1층까지 타고 올라간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억지로 잡아열었다.

    잔뜩 지친 내 힘으로는 아주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중이던 경비업체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문 여는 것을 도와주었다.

    1층에 도달하자마자 바닥에 엎어진 나는 주변에 사람이 몰리는 와중에도 '지하에...지하에......'하는 말을 반복했다.

    호흡곤란 때문인지 극도의 긴장 때문인지, 곧 시야가 검게 물들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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