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화 (8/211)

지저 도시(4)

사실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조차 예상은 했다.

어떻게 예상했냐고? 이런 양반 밑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걸 모르는 게 병신 아닌가? 나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여동생도 다 알고 있을 거다. 다만 겉으로 티를 내는 건 나뿐이다.

"아들 진로까지 생각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나요?"

"부모의 책무는 단순히 자식을 양육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나쁜 길에 든 아이를 엄하게 훈계해야 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교육도 신경써야 하지. 똑똑한 너라면 이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는다."

"아뇨. 안 믿는데요."

"......"

"그냥 아들이라는 놈이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자기가 정해둔 선로를 걸으려 하지도 않으니까 기강좀 잡아보겠답시고 강경하게 나오시는 거잖아요? 제가 비록 대학 졸업까진 못 했지만 그래도 군대는 다녀온 성인입니다 아버지."

"그래서 너의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와 프로필 경력란에 써넣기도 민망한 인생이 네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게냐?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이 신도시에서 네 가치는 HR-05 등급도 아깝다."

"그런 등급도 아까운 아들의 지저 도시 동반 입주를 허가할 만큼 자신은 관대하고 착한 아버지다, 라는 걸 어필하고 싶으신 거라면 이미 충분하니까 됐습니다."

한결같았던 아버지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아무래도 맹랭한 내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다. 아버지가 꼰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철저하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수직적 상하 관계로만 보기 때문이다.

아니면 사람과 애완동물? 장인과 도구 같은 관계 정도인가?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제 태도나 경력란에 써넣기도 부끄러운 민망한 인생이 과연 이 신도시에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죠. 그럼 저도 반대로 묻겠습니다."

나는 의료진의 치료를 받아 새로운 붕대가 감겨 있는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전세계적 재난 사태가 발발했다는 사실을 잠에서 막 깬 뒤에야 깨닫고, 얼마나 남았을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제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모든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응해서 자력으로 안전지점까지 복귀할 수 있는 사람. 이 신도시에서 저 말고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군대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 이런 일이 닥칠 줄 알고 처음부터 대비하고 있던 종말론 신봉자? 타고난 서바이벌리스트?

그런 사람들이야 전세계를 기준으로 놓고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겠지. 당장 한국만 기준으로 잡아도 내가 상상하는 이상의 숫자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신도시에 한해서는 내가 유일하다. 왜냐고?

정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 현역 군인들 제외.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빨리 정부의 지저 도시 입주 통보를 받고 미리 움직인 선택받은 자들 제외. 혹시 모를 국가 비상 사태에 대비해 미리 지저 도시에 입주한 상태였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제외.

그래. 심지어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던 일행조차 다들 움직이는 속도만 느렸을 뿐, 누구 하나 '철저하게' 준비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가벼운 옷차림의 여대생, 패션 감각을 고수한 진상 아줌마, 돈 깨나 처바른 보디가드가 상시 붙어있는 꼬마, 척봐도 상류층 엘리트인 안경남, 그리고 노인이면서도 고작 외출복만 껴입고 느릿느릿 나타난 노신사까지.

누구도 바깥의 비상시국에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했거나, 나처럼 북한산국립공원에 도착하기 전에 우여곡절을 겪은 기색이 없었다.

오직 나만 그런 일을 겪었고, 그런 악조건들 속에서도 자력으로 지저 도시 입주 막차를 탔다.

"다른 건 다 틀렸지만 딱 하나, 아버지 말씀이 맞은 게 있긴 해요. 제가 이 신도시에서 HR-05 등급에 머무르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거죠."

왜냐? 난 잘났으니까.

태생적으로 타고났으니까.

"아버지는 이미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해 책상머리 앞에 앉는 것외엔 다른 일을 하실 수 없으시지만, 전 어떨까요? 젊고, 건강하고, 심지어 감각적으로 타고나기까지 했죠. 한 마디로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아마 제가 비굴하게 아버지 다리에 메달려서 어떻게든 HR-05 등급을 벗어나는 그림을 그리셨던 것 같은데, 먹물 뿌려서 죄송하다고 미리 사과부터 드려야겠네요."

시원스럽게 쏘아붙이자 지난 나날동안 잔뜩 쌓여있었던 웅어리들이 너무나도 쉽게 깨지고, 흩어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한국인들이 욕을 하면서도 삼류 막장 아침 드라마는 꼭 챙겨보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였다.

내가 초신성의 패기를 보여줬다면, 아버지는 이미 걷잡을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집어삼킨 블랙홀이었다.

"그래도 내 교육이 아주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고작 말 한마디만으로 가볍게 아들의 반항을 받아넘겼으니까.

"네가 자립심을 키운다면 좋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서 대단한 사람이 된다면 그또한 부모로서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인생은 혼자 살아갈지언정 사회는 혼자 만들어나갈 수 없다. 좀더 사람과 교감하고 친분을 다지는 예의범절을 배워야겠구나."

"이미 머리가 굳어서요. 조기 교육 실패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러려니 하세요."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끝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하물며 한창 때인 네가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가족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게끔 알아서 처신 잘 할 거라 믿는다."

자신의 가족이기도 하면서, 마치 자신의 가족이 아닌 양 협박 도구로 써먹는 태도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인간 밑에서 배울만한 점이라곤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 뿐이다. 오히려 조기 교육이 실패해서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그럼 이제 몸 쓸 날만 남은 제가 소중한 재산인 몸을 좀 쉬게 해야겠는데,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겠죠?"

"가서 쉬어라."

실로 오랜만인 판정승을 거뒀지만 이기고도 진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족회의라는 이름의 가족청문회가 성황리에 파하자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뱀을 수천마리는 집어삼킨 듯한 늙은 여우로부터 해방되자 너나할 것 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못 올 줄 알았어."

자기 방에 가는 척 하면서 내 방에 따라들어온 여동생 박하나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반골의 상을 가지고 있지만, 조기 교육에 실패한 나와는 달리 하나는 조기 교육에 성공했기 때문에 감정 표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불꽃같은 본성과 후천적으로 주입받은 예절 교육이 끝없이 서로를 상쇄했기 때문이다. 말은 저렇게 평탄스럽게 해도 속으로는 분을 삭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시트 커버도 벗겨내지 않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심신이 부드러운 침대의 감촉과 뻣뻣한 섬유유연제 냄새 덕분에 빠르게 풀렸다.

"못 올 뻔 하긴 했지."

사실상 1분 차이로 민간인 막차를 탔다. 만약 오는 길에 겪은 자잘한 사건들이 내 발걸음을 조금만 더 늦췄더라면, 나는 눈앞에서 지저 도시 입구가 닫히는 걸 봐야 했을 거다.

솔직히 아버지 앞에서 제 잘난 맛에 떠들긴 했지만 행운이 적잖게 작용했다.

마트 근처에서 중년 가장과 말다툼을 벌이다 몸싸움까지 했더라면, 스쿠터를 훔치다 정비센터 직원에게 들켰더라면,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여자를 주유소까지 태워다주기 위해 되돌아갔다면, 싱크홀에서 급가속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당연하게도 나는 충분히 좆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좆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내 실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반쯤 허세좀 부려본 거지.

"그래서 하늘 같은 오빠님은 최하층 밑바닥 계급인데 넌 뭐 받았냐?"

"DR-5. 디그러쉬 사에서 경리직 인턴부터 시작하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시네. 자식들도 다 갖다바치시고. 누가보면 아브라함인줄 알겠어."

하나는 아직 고3이다. 그것도 수험을 앞둔 고3. 공부머리는 워낙 좋았기 때문에 예정대로였다면 무난하게 인서울 명문대 현관 걷어차고 들어갔겠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사실상 고졸자 취급 받는 미래의 사무직 노예가 된 것이다.

'사실상 성인이나 다름없는 고3이긴 해도 법적으로는 민짜인데 인턴으로 부려먹으시겠다.'

이 경우 생각해볼 것은 신도시의 인력난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도시 규모에 맞지도 않게 꽤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였겠지만, 미완성 도시라서 오히려 인력난에 허덕이게 된 셈이다.

농담이 아니라 나같은 HR 직군은 정말 많은 일에 끌려다닐 것 같았다.

'미완성된 도시의 완성을 위한 마무리 시공,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농지와 목축지의 꾸준한 관리, 건설 자재 확보를 위한 개간과 채광 작업, 미완성된 자동화 공장에 단순작업으로 손보태기.'

당장 생각나는 것들만 늘어놔도 이정도다.

거기에 나는 수색대 출신에 따끈따끈한 예비군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군대는 나같이 건강한 남자들이 놀고 있는 걸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 절대로.

'여차하면 군에 차출되어서 치안 유지를 담당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신도시는 끊임없이 굴러가야 한다.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그러려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먹고자고싸야하는데, 비축품이 언제까지 버텨줄까?

정답은 1년도 못 버틴다였다. 식량이야 어찌어찌 자급자족할 수 있다쳐도 사람이 어떻게 삼시세끼 맨밥만 먹고 살겠나. 그런데 지저 세계에는 대다수를 만족시킬만한 다양한 필수품들이 없네?

없으면 어떡하지?

'가져와야겠지.'

바깥에서.

부랴부랴 지저로 숨어들어오긴 했지만 사달이 난 지상에는 남아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온갖 물자들이 널려있다.

편의점이나 마트, 백화점은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금방 민간인들에게 털리겠지만, 민간인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한적한 지방이나 시골의 공장, 군수물자가 쌓여있는 수많은 군 보급 기지, 해외에서 잔뜩 들여왔고, 또 내보낼 예정이었지만 반나절만에 올스탑된 인천항과 부산항의 컨테이너 박스들.

그렇게 남아있는 물자들은 민간인이 쉽게 가져갈 수도 없고, 장기간 보관이 목적이기 때문에 기회만 된다면 두고두고 꺼내먹을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미완성 상태인 지저 도시의 완공.

2. 인력 확보.

3. 물자 확보.

4. 지저 세계 개척

5. 외부 정보 수집 및 이상 현상 파악.

안전하게 숨어든 두더지들치곤 하루도 쉴 수 없는 숨막히는 스케줄이 코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보단 네가 더 낫다."

"왜? 나도 오빠처럼 HR 직군으로 내려달라고 떼라도 쓸까?"

"헛소리 하지말고 네 방으로 가. 나 잘 거야."

"...그래."

하나는 불같은 성격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방 문을 닫고 나갔다. 아버지가 아직 집에 계신다는 증거였다.

"내일부터 죽어나겠네."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군대 일과 작업처럼, 지저 도시 긴급 입주 이틀째 날이 밝는 순간 제 2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3단계로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천장등을 눈에 피로가 오지 않는 은은한 1단계로 맞춘 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 한해서 절대로 들려선 안 될 소음이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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