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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4화 (4/211)
  • 흑야(4)

    "여기서 하차합니다. 탑승객 여러분은 모두 하차해주시길 바랍니다!"

    운전병의 말에 나를 포함한 탑승객들이 각자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와중에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꼬마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살짝 옅은 한숨을 쉰 중년 보디가드가 짐과 함께 꼬마를 챙겨서 먼저 일어났다. 꽉 조이는 정장 안쪽에서 꿈틀대는 근육이 자신은 베이비시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나는 가장 늦게 탑승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내릴 수 있었다.

    차량의 따뜻한 난방덕분에 안정되었던 몸이 바깥 추위와 접촉하기 무섭게 다시 으슬으슬 떨렸다. 만약 두꺼운 옷과 패딩을 입고 나오지 않았다면 여기에 오기도 전에 저체온증으로 쓰러지지 않았을까?

    차량 바깥에서 우리를 맞아준 것은 중장갑보병과 전신방호복을 착용한 검사관들이었다. 설마 본인 확인 절차를 또 해야 하나 싶어 서둘러 신분증을 꺼냈지만, 검사관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왔다.

    "지저 도시에 입주하시기 전에 마지막 확인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준비되신 분부터 위생 부스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검사관이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위생 부스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또 다른 검사관이 이름모를 의료기기나 일회용 주사기를 가득 준비해둔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귀찮은 절차가 하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행들 중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출하는 사람이 나왔다.

    "이보세요! 우리 남편이 디그러쉬의 이사라는 건 알고서 하는 소리예요?! 하 참나! 사람을 이 엄동설한에 세워두기나 하고......!"

    "죄송하지만 마지막 확인 절차는 반드시 거치셔야 합니다. 설령 대통령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실제로 대통령 본인께서 가장 먼저 이 절차를 거치셨습니다."

    "그럼 미리 통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죠! 당신들은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럼 사모님께서 먼저 확인 절차를 받으시고 빨리 입주하시는 것이......"

    "하! 딱봐도 수상해보이는 절차를 누가 믿어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봐야 믿겠어요!"

    겉으로는 명품을 잔뜩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해서 자신이 상류층 인간이라는 걸 뽐내고 싶어하는 여자인줄 알았더니, 그냥 어디에나 흔히 존재하는 진상 아줌마였다.

    "아 진짜! 추워죽겠는데 시간 더럽게 끄네."

    화장을 다 고친 여자가 대뜸 짜증을 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두툼한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는 아줌마의 어깨를 툭 치고 나온 건 덤이었다.

    "저, 저 되바라진 년이......!"

    "뭐래 아줌마가."

    생긴 그대로 쿨하게 진상 아줌마를 무시한 여자는 가장 먼저 위생 부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급조한 위생 부스 치곤 그럭저럭 방음 효과가 있는지 그녀가 검사관과 나누는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시원스럽게 소매를 걷어부치고 한쪽 팔을 내미는 것으로 보건대, 역시 피를 뽑는 모양이었다.

    '혹시 환자를 찾는 건가?'

    혈액 검사는 질병 진단에서 기본중의 기본으로 꼽힌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DNA)가 담긴 정수가 바로 혈액인 만큼, 혈액 검사만으로도 질병 유무나 건강 상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염성이 강한 질병에 걸린 환자를 무턱대고 지저 도시에 입주시켜봐라. 제대로 된 인프라가 구축되었는지도 모를 지저 도시에서 전염병이 퍼지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즉 이건 방역이다. 지저 도시는 자격만 갖춰야 입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건강하기까지 해야 입주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사람을 선별한다는 건 역시 내부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거겠지.'

    대한민국 인구 6천만에서 지저 도시 입주 자격을 얻은 행운아는 대체 몇 명일까? 10만 명? 100만 명?

    잘은 모르겠지만 당초 계획대로라면 자급자족이 가능하게끔 도시를 굴리기 위해서 꽤 많은 사람들에게 입주권을 뿌렸을 것이다. 자리가 비좁은 것과는 별개로 노동력이 없으면 조직은 망하니까.

    피를 뽑은 여자는 소독용 거즈를 팔에 댄 채 더 안쪽의 대기 부스에 들어갔다. 안쪽 좌석이 널널한 걸 보니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검사하기 위해 만든 부스 같았다.

    "다음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중년 보디가드가 스마트폰을 만지작대고 있는 꼬마를 끌고 위생 부스로 들어갔다. 꼬마는 자신의 팔뚝에 주사 바늘이 꽂히든 말든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여대생(추정)과 꼬마, 중년 보디가드까지 차례가 끝나자 드디어 믿을만하겠다고 판단했는지 안경남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역시 생긴대로 지능 수치가 매우 높았는지 검사관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눴다. 서로 입만 벙긋대는 게 보였지만 안경남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으로 보건대 중요한 얘기가 오간 것 같았다.

    이윽고 안경남 역시 피를 뽑고 대기 부스로 향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말없이 서있는 멋들어진 노신사와 진상 아줌마, 그리고 나뿐이었다.

    이쯤되면 나도 괜찮을 것 같아서 움직이려던 찰나, 뒤쪽에서 튀어나온 지팡이가 내 앞길을 막았다.

    "젊은이한테 미안하지만 이 노인네한테 먼저 양보좀 해주겠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추위때문에 삭신이 쑤시는구만."

    "안 될 거 없죠."

    슬쩍 비켜주니 노신사가 가볍게 목례를 하곤 위생 부스로 들어갔다. 역시 사람은 나이를 곱게 먹어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노신사도 안경남처럼 검사관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의외로 튼튼한 팔을 내밀어 피를 뽑았다. 이제 남은 건 나와 진상 아줌마뿐.

    나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나에게도 예의범절을 따질까 싶어 진상 아줌마에게 슬쩍 차례를 양보하려 했으나, 그녀는 두꺼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위생 부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모피코트 성능이 좋아서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모양이다.

    '싫으면 내가 먼저 해야지 뭐.'

    이번에야말로 내 차례라고 생각해서 위생 부스에 들어가자 짙은 소독약 냄새가 나를 반겨주었다.

    안전을 위해 검사관 바로 옆에 서있는 중장갑보병은 특이하게도 다른 중장갑보병과는 달리 방독면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반갑습니다 박한성씨. 지저 도시 입주권을 가지고 계신 박한화씨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가족 동반 입주 특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혈액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만......"

    "당연히 해야죠. 절차를 따라야 지저 도시에 입주할 수 있잖아요?"

    "얘기가 빨라서 다행입니다. 아, 그런데 채혈을 하기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그러세요."

    "좋습니다. 혹시 최근 들어 몸에 이상을 느겼다거나, 원인모를 발작이나 경련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모종의 불편함 때문에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 일개 대학생이 할 일이라곤 친구들과 만나 술퍼마시는 것과 PC방에 가서 10시간 가까이 게임만 하는 것 뿐이다.

    집에 고성능 PC를 들여놓으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일부러 좁은 원룸에 공부용 책상 하나만 놔뒀기 때문이다.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는 오피스텔에서 편하게 자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겠다고 하셨지만, 그건 내가 거절했다.

    아버지는 겉으론 가정에 충실한 따스한 남편이자 능력있는 아버지인 것 같아도, 사실은 자신이 상대에게 해준 만큼 돌려받기를 원하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집에 생활비를 많이 가져다주면 그만큼 어머니에게 완벽한 가사를 바라셨다. 무려 가정부도 쓰지 않는 넓은 집에서.

    여동생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면 그만큼 좋은 성적과 유흥이 적은 모범적인 생활을 바라셨고, 나에게도 대학 등록금과 오피스텔 지원을 언급할 때 그런 생각을 품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 풍족한 중산층 집안 자식이었음에도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아버지의 노골적인 무언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디그러쉬에 입사하기 전에도 국내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는데, 디그러쉬에 입사한 후부터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숨이 턱턱 막힐 수밖에.

    '그런 내가 이제와서 아버지의 그늘에 다시 기어들어간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박한성씨? 제 얘기 듣고 있습니까?"

    "아, 예! 듣고 있습니다."

    "그 상처 말입니다만, 언제 생긴 겁니까?"

    조금 전과 달리 검사관이 잔뜩 굳은 얼굴로 붕대가 감긴 내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건...여기에 오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제가 스쿠터를 타고 오는데 자세를 잘못 잡고 넘어지는 바람에 손바닥이 쓸렸거든요."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호기심에 싱크홀을 들여다봤다가 뭔가가 내 손에 상처를 입혔다는 말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친 놈 취급 받아서 행여나 지저 도시 입주가 거절되면 안 되니까.

    하지만 내 선택은 실수였는지, 중장갑보병이 대뜸 내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대기 부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어서는 게 보였다.

    검사관은 턱을 괸채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부터 제 질문에 신중하게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정말로 스쿠터를 타고 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손에 상처가 생긴 게 맞습니까? 혹시 다른 이유로 상처가 생겼는데 거짓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리가요. 뭣하면 지금 붕대 풀어서 확인해보시죠."

    내 손은 정말로 거친 아스팔트 도로에 쓸린 것처럼 피부가 벗겨지듯 찢어진 상태였다. 차에서 소독약을 뿌릴 때 진짜 울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니 이제와서 검사관이 확인한다고 한들 찔릴 것은 없었다. 따지고보면 손전등을 뺏기면서 쓸린 상처니까 크게 다를 것 없지 않은가?

    "지금 확인해볼테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저도 박한성씨의 안전을 장담해드릴 수 없습니다."

    "예."

    나도 눈치는 있다.

    검사관이 조심스럽게 서투른 솜씨로 붕대가 감겨 있는 내 오른손을 잡았다.

    이윽고 붕대가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흉하게 쓸린 손바닥이 드러났다. 이미 소독하고 연고까지 발랐지만 속살이 훤히 드러날 만큼 큰 상처였다. 지저 도시에 입주하면 바로 의료시설부터 찾아갈 생각이었다.

    "확실히 쓸린 상처가 맞군요."

    "그러니까 제가 말했......"

    "하지만 상처를 입자마자 곧바로 치료를 하신 건 아니군요. 운송 차량에 비치돼있던 구급 키트로 치료하신 것 아닙니까?"

    "그건...그렇죠. 워낙 경황이 없어서 여기까지 오는 것 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까요."

    "그럼 제때 상처를 소독하지도, 치료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데, 본 검사관이 세균 감염을 의심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요?"

    "......"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갑자기 펜라이트를 꺼내 내 눈에 이리저리 빛을 비춰보았다. 갑작스러웠지만 괜히 이상하게 반응하면 좆될 것 같아서 얌전히 있었다.

    내가 별 다른 반응없이 강한 불빛에 인상만 찡그리고 있자, 곧 검사관은 일회용 주사기를 꺼내들어 굳이 상처입은 오른팔에서 피를 뽑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박한성씨는 별도의 대기 부스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문제없다고 판명되면 그때 다른 분들과 함께 지저 도시에 입주하시면 됩니다."

    "만약 문제가 있으면요?"

    이보다 더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나는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흔들었다.

    검사관은 나와 중장갑보병을 번갈아본 다음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군을 전역하셨으니 본인이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대기 부스와는 다른 공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작 투명한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둔 별실이었지만, 정면에서 나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괜히 부담스러웠다.

    대기 부스의 반대편에는 곧장 지저 도시 입구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중장갑보병이 한 명씩 서서 문을 막고 선 상태였다.

    '침착하자. 별 일 없겠지. 그냥 상처좀 난 것 가지고 괜히 호들갑 떠는 것 뿐이야.'

    나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보낼 때마다 방안에 틀어박혀 명상하던 버릇이 지금까지 몸에 밴 것이다.

    체감상 대충 30초 정도 지났을까 싶은 그때였다.

    "악! 지금 뭐하는 거예요?! 당장 그거 안 치워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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