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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65화 (265/265)

두 명의 딸(完)

* * *

휴우우!

유피테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에키드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한낱 인간이 신의 권능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미워 죽을 것만 같은 어머니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창조신 레아의 사랑을 받아도 결국 종(種)의 한계를 극복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마지막에 뭔가 좀 이상했는데. …아니겠지?”

유피테르가 사라지기 직전.

그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에서 빛이 번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일 거야.”

유피테르는 마나가 고갈돼서 방어막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인간과 마족의 마나 회로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저 상태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만든 공간 속에서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스르륵!

에키드나는 의구심을 털어버리고 고개를 돌려 세계의 기둥을 쳐다보았다.

그리우면서도 슬픈 감정이 벅차올랐다. 입가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신이 되었다.

바실리의 힘을 성공적으로 흡수해 기둥을 가동했고, 신의 ‘격’마저 얻어냈다.

그러나 완벽한 복수를 했다고 말하기에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신의 격이 되었어도, 아직 반쪽에 불과했으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막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창조신 레아를 어머니 그 이상으로 모셨었다. 바실리나 성녀가 보았다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을 보좌하며 언젠가 권위를 물려받을 날을 기다리는 착한 딸이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아직도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해, 어머니?’

떠오르는 건 딱 하나.

창조신 레아가 절대로 건들지 말라는 세계의 기둥에 놀러 간 거였다.

하지만, 이는 불가항력이었다.

창조신 레아가 사는 곳은 대륙과는 별개의 공간이었다.

그녀가 호흡할 때마다 신력(神力)이 뿜어져 나오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곳이었다.

이 신의 공간과 대륙을 연결해주는 게 기둥의 또 하나의 역할이었다.

이 때문에 우연히 기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통치하게 될 대륙이 어떤 모습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뭔가 느낌이 팟-하고 오지 않았다.

‘내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분노만 쏟아냈지 아마.’

창조신은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 존재일지 몰라도 좋은 부모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초지종도 듣지 않고 에키드나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존재로 낙인찍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유피테르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 걸지도 몰랐다. 그 역시 만들어진 상황의 피해자였으니까.

과도한 관심은 곧 집착과도 같은 사랑이 되었다. 물론, 그녀가 유피테르를 아프게 했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고서.

하지만, 이 서러움도 곧 끝이었다.

유피테르가 지닌 신의 축복만 빼앗으면 창조신의 자리까지 위협할 수 있었으니까.

“네 말이 맞을지, 내가 맞을지 결과가 말해줄 거야.”

* * *

번쩍!

정신이 든 유피테르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확인했다.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한 습관 때문이었다.

“여긴 어디지.”

낯선 곳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이질적인 공간에 유피테르는 마나 감지를 사용하려다 그만두었다.

마나 회로에서 미칠 듯한 고통만 느껴졌기에.

“무리해서 내려진 벌인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꽤 버틸 만하군.”

유피테르는 피식 웃은 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묘한 공간이긴 했으나 적의가 없다는 게 느껴졌기에.

“에키드나의 기술이겠지.”

유피테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은 바로 에키드나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승리를 확신했다는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걷다 보니 문득 아공간이 떠올랐다.

아티팩트 중에선 마나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종류들도 존재했다.

위력은 상당히 약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번보다 더 막막한 상황이군. 마나는커녕 아공간도 열리지 않는다니.”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황에 낙담한 유피테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기에 강한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무게감 있게 행동했었으나 이게 진짜 그였다.

타인에게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기대감을 버렸을 뿐.

오직 바실리만이 이런 모습을 알고 있었다.

난감해진 유피테르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있는 거라곤 고작 이 검 하난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제야 이름 없는 성검에 관심이 생겼다.

성검 오를레앙과는 다른 느낌이었으나,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이걸 내게 왜 준거지. 에나스? 고대 정령인 네가 이유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겠지.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나.”

유피테르는 에나스를 믿었다.

고대 정령은 신뢰를 보낼 만했다. 신의 딸만큼은 아니었어도 세계의 법칙을 수호하는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더구나 그녀는 세계의 기둥을 지키는 이였다.

그보다 더 먼저 에키드나의 침입을 알아챘던 거라면, 이 성검이 사건을 해결할 열쇠가 될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유피테르는 성검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마나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특별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눈앞이 깜깜해진 유피테르는 초월적인 존재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신의 딸이 한 명 더 있다면 미리 알려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장모님.”

장모라는 표현을 입에 담자 메마른 웃음이 절로 나왔다.

레아의 모습을 본 적도 없었고,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기에.

축복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서글픈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

성녀나 교황에겐 신탁을 잘만 내려주면서.

그는 하나뿐인 바실리의 반려자였다.

얼굴이 궁금해서라도 구경하러 올 줄 알았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한 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자, 점점 더 우울해졌다.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처럼.

최악의 상황이 연속되는데도 신탁하나 내려주지 않자 울화통이 치민 유피테르는 성검을 집어던졌다.

“이번에도 무시할 수 있을지 보자고. 신이 내린 시련이라고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결국, 난 인간에 불과하니까.”

오흐트나 프레이야가 있었다면 불경하다고 지적받을 정도의 폭언.

그러나 지금의 유피테르에게는 거칠 것 없었다. 버림받았다던 에키드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듯했다.

팅! 팅! 팅구르르르!

성검은 멀리 나아가 땅에서 몇 번 구르더니 기세를 잃고 멈췄다.

“…이래도 반응이 없다 이건가. 하. 창조신이시니까 인간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 이거시군.”

날이 서 있는 유피테르의 말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외로이 울려 퍼졌다.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피테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만든 존재였기에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되었다,

신은 역시 무정했다.

레아가 정말로 그의 편이었다면 한 번쯤 도와줄 수 있었다. 유피테르의 삶은 그 어떤 창조물보다 굴곡이 컸으니까.

휘이이이익!

그때, 저 멀리 날아간 성검이 빛살처럼 날아왔다.

무시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에 유피테르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신성 마나가 아닌 신력을 내뿜고 있다고? 그런 아티팩트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놀라운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우우웅!

성검의 목소리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가주의 펜던트가 빛을 발했다.

예전에 보았던 아르테미스의 푸른색과 다른 별빛 마나의 색이었다. 심지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청명(晴明)한 기운이었다.

“이게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유피테르라고 해도 이런 흐름은 처음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눈동자만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아티팩트들은 제 할 일을 했다.

어느새 유피테르의 앞에 언젠가 본 적 있는 흑과 백의 소녀가 나타났다.

“펜던트에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들?”

―신의 딸의 반려자여….

―…오랜만이구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던 유피테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난 너희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만족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백의 소녀는 유피테르의 말을 무시하고 날아오던 성검을 가볍게 잡았다.

기교 넘치는 광경을 지켜보던 흑의 소녀가 대신 입을 열었다.

―나이아드 님의 안배.

“초대 가주가 이걸 예상했다고? 그래봤자 그 사람은 인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축하려던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나이아드 아르테미스가 바로 바실리였다는 트리아의 말이었다.

“잠깐. 너희들은 나이아드가 바실리, 바실레이아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유피테르의 질문에 두 소녀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나이아드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

―…태양이 없을 때 세계에 빛을 쏘아주는 존재.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유피테르는 간신히 참아냈다.

고대 정령들과의 대화는 원래 이런 법이었으니까. 에나스와 한 번이라도 대화해본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 질문을 달리하지 이제 와 나타난 이유는 뭐지? 난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힘도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한계치까지 마나를 써버렸기에 어린 시절과 완전히 동일한 상태였다.

회복기가 있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백의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성검을 그대로 유피테르에게 주었다.

말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해도 유피테르는 군말 없이 검을 받았다.

굳이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건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유피테르가 검을 받아들자 소녀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달의 심장. 반역자의 목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무기.

“반역자라면 에키드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두 소녀 중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이 모든 게 환영이라는 듯이.

“고대 정령들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로군.”

유피테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을 쥐었다.

우우우우웅!

다른 기운을 불어넣은 것도 아닌데 성검에서 별빛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자연스럽게 유피테르의 몸에 흡수되었다. 오흐트의 치유 마법보다 몇 단계는 위인 듯 보이는 기적이었다.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바실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유피테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이 세상에서 내 편인 건 바실리 너밖에 없구나. 목 씻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에키드나 리벨리온.”

* * *

“꽤 시간이 지났는데?”

유피테르를 별세계에 가둔 에키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반항할 여력이 없다는 건 분명히 확인했는데도 초조함이 커졌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시곗바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째서 흡수가 안 되는 거야? 바실리 때에는 충분히 먹혀들었잖아.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강하단 말이야!”

“네가 세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자연스레 대답하려던 에키드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유피테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이곳에서 다른 이의 기운은 티끌만큼도 감지되지 않았다. 신의 딸이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니게 되었기에 확실했다.

지금 들리는 이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들리는 환청이어야만 했다.

그 순간.

쪄저저저적!

공간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유피테르가 튀어나왔다. 예상 밖의 일에 놀란 에키드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그 안에서 나온 거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당신은 별빛 마나도 잃었잖아.”

유피테르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실리의 힘이지.”

“말도 안 돼. 바실리는 나와 계약을 맺었어. 신의 딸이라고 해도 그걸 벗어나는 건 불가능….”

“아, 별빛 마나의 일부만을 가져가고 날 포기하겠다는 그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라면 의미 없을걸.”

“그, 그걸 어떻게?”

에키드나는 당황해서 뒷걸음을 치다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아니. 내 사랑이라면 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답을 찾았겠지. 그게 당신의 진짜 강점이니까.”

“무려 신께서 인정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유피테르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곧 너를 만날 수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 도움만 받는구나. 사랑해 바실리.’

운명을 읽는 기적을 지닌 바실리의 안배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가주의 펜던트도 이름 없는 성검도 전부 그녀의 계획 속에 있었다.

어디까지 내다본 것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도 저도 못 할 상황을 대비해 놓은 건 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이것도 막을 수 있으시겠지?”

유피테르는 성검을 위에서 아래고 그었다.

검사들이라면 누구나 이를 악물고 연습하는 베기. 자세가 정확하다는 걸 빼면 평범했다.

“힘만 뺏고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안 되겠네. 내 사랑은 방금 마지막 기회를 잃었어.”

에키드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안에 작은 세계가 펼쳐졌다. 그건 세아니아 대륙의 축소판이었다.

‘이게 세계라니 웃음만 나오네.’

창조신이자 어머니인 레아가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게 운명이라는 이름의 실로 미리 엮여져 있었다.

한 존재가 어떤 삶을 살지는 태어나는 순간 정해져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조차 모두 신의 뜻이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아니,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에키드나는 제멋대로인 신의 뜻에 역겨워지려는 기분을 바로잡았다.

그 후, 정신을 집중해 작은 세계에서 유피테르와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기운을 지웠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저런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에키드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불완전한 신이기에 권능을 쓰려면 이 과정을 꼭 거쳐야 했다.

불편하긴 했으나 유피테르의 일그러진 표정을 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는 그의 모습이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묘한 표정을 짓게 되는 건 건 에키드나의 쪽이었다.

분명 기운을 없앴는데, 묘한 감각이 자신을 베고 지나간 게 느껴졌다.

재빨리 상태를 확인했지만, 변한 건 없었다.

“어째서?”

“힘이 먹히지를 않으니 궁금할 만도 해.”

“난 신이고 신의 말은 절대적이야! 고작 인간이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거지?”

“명심해. 이 세상이 절대라는 건 없다고.”

유피테르는 씨익 웃으며 성검을 한 번 더 그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옭아매는 공포에 에키드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방어막을 쳤다.

‘일단은 막아내야 해.’

신의 권위 따윈 나중에 세워도 되었다.

가지고 싶었던 건 명성이 아니라 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었으니까.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었으나, 결과는 달랐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세계에 접속할 수 없어서 당황스럽나?”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게 신의 뜻이니까.”

신.

그 말이 나오자마자 에키드나는 이성을 잃었다.

유피테르의 트라우마가 카르멘이었다면, 그녀의 트라우마는 창조신 레아였으니까.

극복한 줄 알았는데 다시 앞을 가로막으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마.”

에키드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필살의 일격을 준비했다.

작은 세계를 통한 권능이 무력화된 건 큰 타격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격할 수단은 넘쳐났다.

왼손에는 마족의 힘을 오른손에는 신의 딸의 힘을.

에키드나 식 – 천지창조(天地創造)

그건 마법이나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일찍이 창조신 레아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기운. 바로 그것과 닮아 있었다.

스르르르륵!

에키드나의 기운은 빠르게 공간을 잠식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공간에 새로운 정보를 덧씌웠다. 그 기운이 흐르는 모든 곳이 에키드나의 의지로 변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야. 도와줄 거지, 바실리.’

―네 뜻이 곧 나의 뜻이야. 이미 알고 있잖아?

왠지 모르게 바실리가 옆에 있는 것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게 새로운 시대를 나아갈 성검―아르테미스다.”

유피테르는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의 검로는 마치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그대로 혼돈의 기운과 충돌했다.

별빛을 머금은 기운은 공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기회라고 생각한 혼돈의 기운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성검의 기운은 혼돈의 기운을 정화해 동료로 만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에키드나는 악을 썼다.

“새로운 시대? 성검 아르테미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세상은 신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어. 네 이야기는 이미 끝이야, 내 사랑.”

그녀의 뜻을 대변하는 것처럼 혼돈의 기운이 몸부림쳤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선 결코 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설령 모든 게 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게 인생이야. 이걸 모르는 게 네 패배의 원인이고.”

유피테르는 그렇게 말하며 성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휘이이이익!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기운이 혼돈들을 단번에 끌어안고서 등을 두드렸다.

고작 그것뿐인데 혼돈의 기운은 모두 별빛이 되어버렸다.

“이건 있을 수 없어. 난 신이라고! 내,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제 그만 쉬어도 돼, 언니. 이 세계에 신의 딸은 한 명이면 족하니까.

“바, 실리?”

에키드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여동생의 목소리에 굳어버렸다.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가운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푹 쉬라고.”

유피테르는 에키드나가 멈춘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으로 그녀의 곁에 다가가 심장을 성검으로 찔렀다.

“끄아아아아아악!”

에키드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어떻게든 성검을 몸에서 빼내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바실리가 개입했다는 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던 거네요. 어머니. 미천한 자식이 어찌 당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날까요. 지옥에서. 그래요, 지옥에 먼저 가서 기다릴 거예요.’

그러나 이미 심장을 꿰뚫어버린 성검을 빼내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속으로 신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한 에키드나는 초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결국 버리는 패에 불과했다는 거네. 그래. 내 패배야. 여동생과 행복하게 살아,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그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바실리가 준비해 놓은 힘과 유피테르 본연의 별빛 마나가 합쳐진 힘은 그대로 에키드나를 정화했다.

기둥의 힘을 장악한 게 아니라 정보를 덧씌워 사용했던 게 약점이었다.

신이라고 해도 불완전한 존재는 한계가 명확했기에.

에키드나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가더니 신의 딸의 힘과 마족의 마나로 변했다.

유피테르는 성검에서 손을 떼고 뒤로 몇 걸음 걸어간 후,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모여있던 기운이 세계로 뻗어나갔다.

신의 딸의 기운은 기둥으로. 마족의 힘은 타르타로스로. 별빛 마나의 힘은 세아니아 대륙 곳곳으로 퍼졌다.

각각의 힘은 틀어진 법칙을 치유했다.

유피테르는 그 장엄한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에키드나의 시체가 있는 곳에 익숙한 기운을 지닌 존재가 서서히 나타났다.

유피테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너무 보고 싶었다고 바실리.”

“이제는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 사랑해, 유피.”

《달도 포기한 대공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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