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딸(2)
* * *
허탈감과 탈력감이 카르멘의 몸을 지배했다.
어떻게든 서 있으려 힘을 쥐어 짜보아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순리에 따라 무릎을 꿇는 것만이 가능했을 뿐.
한으로 가득한 카르멘의 외마디 비명을 들은 에키드나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할 말이 있으면 손을 들고 저요―라고 말해야지.”
“나를 초월자로 만들어주기로 약속했을 텐데. 허헉.”
카르멘은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지 오래였다.
울컥!
입에서 쏟아져 나온 피는 적어도 한 움큼보다 더 많았다. 시작의 신호탄이라도 되는 건지, 피는 끝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카르멘은 힘겹게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도도한 에키드나의 표정이 그대로 들어왔다.
“당신이 했었던 시험은 대단하네. 심장이 없어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어!”
명백한 비웃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그녀의 말속에 숨겨져 있었다.
심장.
카르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키드나가 들고 있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펄떡! 펄떡! 펄떡!
피하나 묻지 않고 깨끗한 심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힘차게 뛰었다.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이라면 한 번도 구경할 수 없는 장기.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카르멘은 어떻게든 토해내려고 했으나, 찐득한 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게 내 삶의 끝이라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몸은 정직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눈이 점점 감겼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기억들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때, 이상함을 눈치를 챘어야 했나.’
탁!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던 주마등이 멈췄다.
그곳은 얼마 전이라고 하기는 힘든 과거였다. 바로, 에키드나와 바실레이아 간의 밀약 시간이었다.
정말로 죽을 때가 다가온 것인지 두 사람의 대화가 또렷하게 생각났다.
* * *
에키드나의 그림자가 연신 꼬물거렸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던 그림자는 어느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스르륵! 파앗!
헤엄치던 그림자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나왔다.
언뜻 보면 세계 창조의 빛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보다는 격이 낮다는 게 확연했다.
눈이 멀 것만 같은 환한 빛은 점차 은색으로 바뀌었다.
그 광경을 본 카르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은색이라니. 그건 아르테미스의 색일 텐데. 바실레이아라는 자는 대체….”
나이아드 아르테미스가 가문을 세운 이후, 은색은 그들만의 색이었다.
리투아 제국 북부를 지키는 괴물의 코털을 건드릴 멍청이는 없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은색 빛은 조금씩 줄어들고, 그림자의 속에서 한 여인이 빠져나왔다.
허리까지 오는 은색의 머리칼은 은은한 달빛을 닮았고, 눈동자에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신의 딸 바실레이아.
그녀가 다시 한번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이 광경을 노렸던 건지 에키드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사랑스러운 내 동생.”
“난 당신 같은 사람 모르는데. 처음 보는 사이에 너무 친근하게 굴지 않아 줬으면 좋겠네요.”
“고집부리는 것도 귀엽구나.”
“하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요.”
톡톡거리며 말싸움을 하는 것뿐인데도 급이 다른 마나가 주변에서 일렁였다.
‘이게 신의 딸인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감이군.’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벌린 카르멘은 쥐 죽은 듯 침묵을 지켰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였기에.
마족의 마나로 실험을 계속해 이전보다 더 강한 마법사가 되었으나, 저들 앞에선 의미가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흐으으음. 꽤 오래 자서 몸이 뻐근하네요.”
바실레이아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몸을 풀었다.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간단한 운동과 함께 뭉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상황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여동생을 보며 에키드나가 물었다.
“내가 무섭지는 않니, 바실리?”
“오히려 묻고 싶네요. 당신을 왜 무서워해야 하죠? 어머니께 버림받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데.”
“들었던 것보다 앙칼지구나.”
“바실리라고 부르지 말아 주시죠. 그건 한 사람. 아니, 친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애칭이니까 말이죠.”
“유피테르?”
에키드나가 도발하듯 반려자의 이름을 부르자 바실리가 바로 행동에 나섰다.
마법식도 마법진도, 주문도, 심지어 시동어조차 없었다.
바실리가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에키드나가 모으던 마나가 흩어졌다.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변을 감싸던 힘이 사라졌는데도 에키드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신의 딸의 힘이구나?”
“언니도 한때 신의 딸이었으니 잘 알겠네요. 권능 없이 제게 덤비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지. 근데 이걸 어쩌나.”
“…?”
자신만만한 에키드나의 태도에 바실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의 딸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창조신 레아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였기에.
레아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게 ‘신’이 아닌 ‘창조신’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이 경우, 기존의 세계를 통치하는 게 바로 신의 딸들이었다.
즉, 나름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고작 저 수준으로 신의 딸을 자칭하는 거야?’
언니라고 주장하는 에키드나의 힘은 형편없었다.
저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유피테르의 아버지가 볼 때는 강하겠지만.
그대로 그림자 속에 가둬놓았다면 조금은 불리할지도 몰랐다. 봉인에서 풀린 직후라 제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굳이 자신을 세상에 꺼내준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에키드나의 몸속에 자리 잡은 은색의 기운의 출처도 들어야만 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인질이라면 어떨까? 너와는 달리 그는 결국 인간에 불과하잖니.”
“유피테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유피테르의 이름이 거론되자 분위기가 변했다.
신의 딸이라는 위치에 맞는 태도를 보이던 바실리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최대한 참으려고 해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걱정이 계속 솟아났기에.
‘너도 유피테르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건가.’
카르멘 역시 에키드나의 생각이 궁금했다.
보아왔던 대로라면 그녀는 유피테르를 많이 사랑했다. 집착이라고 해도 문제없었다.
연기라고 하기엔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 있었었다.
에키드나는 슬며시 운을 띄웠다.
“유피테르가 왜 마나를 사용할 수 없었을까? 아르테미스 가문은 원래 네가 만든 거잖아?”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네 자리에 있던 사람이야. 네가 알고 있는 건 대부분 알고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말해주시죠. 당장.”
바실리의 목소리에 노기가 감돌자, 에키드나는 두 손으로 화를 가라앉히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워워. 진정해. 그런 식으로 나를 협박하면 평생 말해주지 않을지도 몰라.”
주도권을 되찾아오는 강력한 한 방에 카르멘은 감탄했다.
‘잘도 저런 존재랑 대화를 할 수 있군.’
그녀가 분노하자 마나도 같이 분노했다. 심지어, 마나 회로에 흐르는 마나들도 동조했다.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에키드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 그 표정을 지어야지. 동생은 언니의 말에 따르는 법이니까. 자아. 그럼 옛날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에키드나는 그림자를 사용해 두 개의 인형을 만들었다.
검은색만 사용했지만, 미묘한 음영 덕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나로 인형들을 공중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여자아이는 슬퍼서 엉엉 울었지. 그러던 찰나에 희망을 찾아낸단다. 신의 시험을 받을 아이가 있던 거지.”
손을 얼굴에 두고서 우는 시늉을 하던 여자 인형이 일어나, 천천히 남자 인형에게로 향했다.
“이 아이는 신의 축복을 받을 운명이었어. 여자아이는 모든 힘을 잃었지만, 운명을 읽는 힘만큼은 빼앗기지 않았단다. 그래서 남자아이를 지켜보았어. 다른 이가 노리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단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바실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각각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에키드나는 신이 난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자아이의 운명을 읽은 여자아이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어. 그리고 그걸로 복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 아이의 아버지를 유혹한 거야.”
거기까지는 바실리도 아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피테르의 일거수일투족을 봤었기에.
그가 처한 냉랭한 현실에 눈물이 나오기도 했으나,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운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게 어머니 레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신의 딸이라고 해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바실리는 조심스럽게 에키드나에게 질문했다.
“유피테르의 마나를 빼앗은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 답은 저기 있는 카르멘이 알고 있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자신이 지목되자 카르멘은 식은땀을 흘렸다.
늘 냉철하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얼굴에 당황함만이 가득했다.
“나, 나 말인가?”
“그래. 네가 유피테르에게 뭘 했는지 그 입으로 설명해줘.”
인간계에선 최강이라고 불려도 이 둘 앞에선 한없이 작은 개미였다.
카르멘은 압박감이 느껴지는 두 개의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에키드나와 계약한 난 유피테르의 마나를 빼앗았다. 아르테미스 가문은 모두 푸른 얼음의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지. 하지만, 유피테르는….”
“달의 마나를 지닌 아이였겠죠.”
바실리가 그의 말을 받아주자, 카르멘의 목소리도 떨림이 멈추었다.
“유피테르의 마나는 그 무엇보다 정순했다. 떵떵거리는 레아교의 신자들보다 더욱.”
“핵심만 말하세요.”
에키드나의 독촉에 카르멘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에키드나가 건네준 아티팩트로 유피테르의 마나를 강제로 뽑아내고 그 자리를 그림자의 마나로 채워놓았다.”
“….”
더는 들어줄 수 없었던 바실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떻게 어버이가 되어 자신의 아이에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당시의 유피테르가 받았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사회적인 고통을 제외해도 마나를 뽑아내는 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다.
‘잠깐. 내가 그의 힘을 되돌려 주었을 때 그림자의 마나 같은 건 없었는데?’
유피테르의 실종.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진 일은 사실 유피테르와 그녀가 만난 날이었다.
에키드나가 수족을 부려 유피테르를 빼앗아가려고 하자 그녀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적을 모두 해치우고 그를 본 순간, 조심히 키워왔던 연심에 불이 붙었다.
그래서 기억을 왜곡하고, 그를 데려와 정화와 함께 신의 반려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바실리의 차가운 시선이 에키드나에게로 향했다.
“그림자의 마나? 유피테르의 몸속에 그런 건 없었어요. 이야기를 지어내지 마시죠.”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내 조건을 말할게. 유피테르를 내게 넘겨. 원래 내 것이라는 거 알잖아?”
“헛소리 마시죠. 유피테르가 목숨 바쳐 사랑하는 건 오직 저뿐이에요.”
“진실을 알아도 같은 대답이 나올지 정말 궁금하네?”
진실이라는 단어를 듣자 바실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의 딸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잊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애초에 유피테르의 운명은 고작 마왕비가 알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무엇 하나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어서 답답했다. 바실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유피테르를 넘기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죠?”
“음…. 간단해. 신이 된 이후 역사 왜곡을 일으켜서 유피테르의 기억을 바꿀 거란다. 네 기운을 어느 정도 흡수하고 복사도 했으니 문제는 없어.”
“신의 축복을 받은 이에게 그런 수가 통할 거 같나요?”
“너야말로 내 계획을 하나도 모르잖니? 그리고 똑바로 말하렴. 신의 딸의 왜곡이 아닌 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에키드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신의 딸이라고 해도 신이 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버림받은 자에게 그런 게 허락될 리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에키드나의 말에 바실리는 스스로 안일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그 약속은 지켜주셔야겠어요.”
“걱정하지 마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약속을 어기는 거고, 신뢰를 저버리는 거니까. 버림받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