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딸(1)
* * *
세아니아 대륙이 왜곡이라는 이름의 암운에 삼켜질 무렵,
유피테르는 오스티안과 프레이야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레아의 이름을 잊었다고? 너희들은 교황과 성녀잖아.”
―아하하. 그렇게 정곡을 찌르시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요.
―뭔가 이상해. 우리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에키드나의 짓이다, 라고 유피테르의 직감이 속삭였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행보가 전부 계획된 거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만약, 혹시, 약혹(若或)
이런 가정들은 결국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었다.
약점을 없앨 수만 있다면, 모두가 육각형의 고른 능력치를 가지게 되기에. 그야말로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신의 딸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에키드나가 또 몇 걸음이나 앞서간다는 게 느껴지자, 유피테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젠장.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지.”
―대행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유피테르? 그럼 바로 내가 갈게!
마나가 희미해 유피테르의 얼굴까지는 담지 못해도, 분위기는 그대로 전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교황은 놀라 자빠질 뻔했고, 성녀는 당장이라도 싸우려는 듯 박력을 뽐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게 드러나는 말투에 유피테르는 간신히 분을 삭이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문제없다.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건지나 설명해줘.”
―모두가 창조신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레아 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깨닫고는 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마저도 그랬습니다.
―아카데미 쪽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마나 감소증을 겪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는데.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유피테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신이 되기라도 한 거냐, 에키드나?’
레아의 이름을 잊는 것과 마나 감소증의 폭발적인 증가.
양쪽 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신의 딸이라고 해도 저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바실리가 보여주었던 ‘기적’들도 저런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같은 신뿐이었다.
물론, 레아는 유일무이한 창조신이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신의 딸인 에키드나였다.
버림받은 아픔과 슬픔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분노로 폭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순간,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몬스터들의 경향은 어떻지? 아카데미의 정보만 들어온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잠시만, 바로 알아볼게.
달의 몰락 이후 소중한 사람이 많이 생겼다.
바실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안전을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얼음성의 결계를 부순 건 유피테르였다.
오리지날과 동일한 마법식을 사용했어도, 나이아드와 같은 위력을 낼 리 만무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이아드는 바실리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가 만드는 기적을 따라 하는 건 유피테르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신의 축복을 받았을 뿐,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니까.
유피테르의 말이 도화선이 되기라도 한 걸까?
수정 구슬 너머로 성녀와 교황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다는 이야기를 정말로 할 건가? 대행자께서는 본인의 의무를 하고 있을 거란 말일세!
―유피테르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구! 오스티안 세상에 숨길 수 있는 일은 없어.
‘여전하군.’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걸 들은 유피테르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치지직!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더 커져 잡음이 발생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유피테르가 입을 열었다.
“말할 수 없는 거라면 넘어가. 나도 시간이 널널한 건 아니니까.”
―…으음.
프레이야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대륙 곳곳에서 던전에 마나가 과도하게 쏠렸어.
“몬스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제니.”
―…응.
“리투아 제국도 예외는 아니겠지?”
프레이야가 주저하는 게 느껴지자, 유피테르가 대신해서 쐐기를 박았다.
―맞아. 얼음성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들었어.
“….”
가족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들으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유피테르는 얼음성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가주였기에 당연했다.
‘현재 전력으로는 막는 데 급급하겠지. 아직, 결계에 이상은 느껴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달의 몰락을 겪으며 마법사단은 궤멸했다. 양과 질 모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원들이 꽤 많이 남았으나, 단장급이 사라진 게 뼈아팠다. 그나마 1 단장이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이런 일이면 나서야 하는 거 아냐?
아무 말 없던 유피테르가 걱정되기라도 한 듯, 프레이야가 넌지시 화제를 바꾸었다.
“이 사건의 원흉… 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역시 대단하네. 믿고 있었다고. 그래서 얼마나 걸릴 거 같아?
프레이야의 말투에는 근심 따윈 하나도 없었다. 유피테르가 어렵지 않게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듯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간단히 주고받았다.
타르타로스에 온 이후 목말라 있던 정보들이 물밀듯 쏟아져도 유피테르는 전부 이해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알게 된 유피테르는 이 둘만이 해낼 수 있는 부탁을 전했다.
“성국이 주도해서 국가를 하나로 모아줘. 이번 몬스터들은 이전과는 다를 거다.”
―내가 있는데도?
프레이야가 가슴을 탁―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게 눈에 선했다.
유피테르는 표정이 풀어지려는 걸 참으며 말했다.
“맞아. 성녀 프레이야가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겠지. 거기에 대륙인들이라면 성국의 도움 요청을 거부할 리가 없다.”
낙원교 사태 때, 대국들은 모두 크레이타를 외면했었다. 대부분 레아교도였는데도 말이다.
당시 느꼈던 죄책감은 대륙을 하나로 묶을만한 명분이 되었다.
“부탁한다. 프레이야, 오스티안.”
에키드나의 한을 잘 알고 있던 유피테르는 굳이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자 프레이야는 마지못해 그 말을 승낙했다.
―치이, 알았어. 그러니까 유피테르 너도 그쪽 문제를 박살을 내고 이곳으로 오라고.
―대행자께 레아 님의 가호가 있기를.
프레이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스티안은 바로 유피테르가 갈 길을 축복해주었다.
파드득!
수정 구슬은 제 역할을 다하고 부서져 버렸다.
마나가 희박한 공간에서 이렇게나 버텨준 게 더 용했다. 마나가 없다면 아티팩트를 발동하는 것도 무리였으니.
가루가 돼버린 수정 구슬을 뒤로 하고, 나아가려는 그 순간.
“하등한 인류랑 소꿉놀이하니 재미있어서 미칠 것 같아? 난 도무지 모르겠는걸.”
“…에키드나.”
최강이자 최악의 적이 유피테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은 아니지? 자, 뭐가 바뀌었는지 알아보겠어?”
“….”
유피테르는 빙그르르 도는 에키드나를 말없이 훑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기운 그대로군.’
시간이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륙의 몬스터들이 절찬리에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런 일을 벌일 경지라면 이전과 달라야 정상이었다.
유피테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군.”
“애정이 식은 걸까. 그럼 이걸 좀 봐주겠어? 좀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에키드나는 미소 지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다른 점이 눈에 한눈에 들어왔다.
아공간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에키드나가 사용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미친 건가. 저걸 신의 기운으로 착각하다니.’
잠깐이라도 신과 그녀를 비교한 일 때문에 유피테르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나름 신의 사위인데 이런 건 너무 했다.
“기운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즐거움은 이제부터야.”
에키드나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공간에서 사람 하나를 꺼냈다.
“…카르멘 비제?”
다름 아닌 유피테르의 아버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유피테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알았지만, 이건 도를 넘어도 너무 넘어버렸다.
유피테르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서 에키드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동료를 하나 더 늘린다고 변하는 건 없다만? 저번의 2차전이라도 할 셈인가.”
“내 마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거 같아 슬퍼.”
“그건 또 뭔 개소리지.”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시선을 즐기며 오른손에 묘한 기운을 모으고서, 카르멘에게 다가갔다.
그걸 본 카르멘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에키드나, 우린 협력자라고.”
“어머…. 그랬지.”
에키드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자 카르멘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도와주었으니, 이제는 네 차례가 아닌가. 계약을 지켜라. 에키드나 리벨리온.”
마족에게 있어 계약은 절대적이었다.
마족이 인간을 노리개처럼 부리더라도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초대 가주의 서고를 독차지했기에 이 법칙을 알았고, 어떻게 하면 이용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흐으으응.”
에키드나는 비음 섞인, 분간이 가지 않는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였다.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분명히 카르멘이었다.
‘이런 말은 없었지 않은가.’
카르멘도 유피테르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신이 되었다고 말하던 에키드나는 갑작스레 자신을 아공간에 처박았다.
마법이라면 눈뜨고 코 베 일리는 없었다. 마족의 마법이 몇 수 위라고 해도 마나로 만들어졌기에.
그러나 에키드나의 공격은 자연스러운 흐름 그 자체였다. 아공간에 갇히기 전까지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타박! 타박! 타박!
에키드나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줄기가 짜릿했다.
코앞에 도달한 에키드나나 빙긋 웃자, 카르멘도 어렵게 미소를 지었다.
늘 보여주었던 차갑디차가운 웃는 얼굴이었다.
‘이것도 필요한 일이겠지.’
카르멘은 에키드나가 아닌 마족의 계약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에키드나의 계획에서 꽤 큰 도움을 주었다.
유피테르의 마나를 뺏는 건 혈족 중에서도 자신만이 가능했다. 가문을 이을 대공자에게 손을 뻗는 건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귀찮아하던 고대 문자의 해석을 전부 해주었다. 모르는 부분은 그녀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죽일 기회가 여럿 있었는데, 굳이 지금 그러는 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에키드나. 이제 나를 초월자로 만들어주는 건가?”
선택지를 제거해나가니 남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굳이 유피테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게 해주는 것. 그녀의 말마따나 신이 되었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신의 대행자 앞에서 새로운 초월자를 만들다니. 이 얼마나 완벽한 반역 행위인가!
에키드나의 손이 힘이 모일수록, 카르멘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지금껏 꿈꿔왔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니 당연했다.
카르멘은 파괴적인 기운이 다가와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방해하지 않도록 아티팩트의 작동까지 멈추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창조신의 기운이 필요하다. 어서 나를 초대 가주님과 같은 세계에 넣어다오.”
“그렇고 싶은데 이거 어쩌나. 쓸모가 없어진 장난감은 잘 치워야 하거든.”
“뭐라고?”
“작별이라는 이야기야.”
푸슈욱!
에키드나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카르멘의 심장 쪽을 꿰뚫었다.
“…어째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