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59화 (259/265)
  • 버려진 딸, 새로운 신(1)

    * * *

    팟!

    에키드나의 도움을 받아 카르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곳은 유피테르와 바실레이아의 신혼집 근처였다.

    화려하게 퇴장한 것 치고는 이동 거리가 짧았다. 어떻게 보면 바로 옆으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주변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 카르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에키드나의 손을 놓았다.

    ‘이게 공간 이동인가. 이로써 초대 가주에게 한 발 더 다가간 거군.’

    지금껏 스스로 공간 이동을 성공시킨 적은 없었다.

    실전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늘 아바라치아의 힘을 빌렸었다. 마족에게 있어 공간 이동은 숨을 쉬듯 간단한 거였기에.

    마나 역류에 휘말리지 않도록 에키드나의 힘을 빌렸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카르멘이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자, 마나 감지가 믿기 힘든 사실을 알려왔다.

    “마나가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흥미롭군.”

    몸을 관통하는 환희조차 잠시 접어둘 만큼 놀라웠다. 신이 만든 마나는 세계의 기둥이었기에.

    마나가 없다는 건 곧 신의 미움을 샀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유피테르처럼.

    에키드나는 탐구심에 불타는 카르멘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이곳은 신의 땅이야. 마나가 겁을 먹고 도망갈 만하지.”

    “신의 땅?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만.”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카르멘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벽을 부수지 못했을 거니까.”

    “그렇군.”

    카르멘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가주의 비밀 정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에키드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다른 멍청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게 뻔했다.

    두 번의 대륙 전쟁 이후 찬란했던 문명은 한 줌의 모래가루가 되어 버렸기에. 현재의 인류는 과거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이런 허허벌판에서 뭘 할 거지? 새로운 신이 될 준비는 모두 마쳤다고 하지 않았나.”

    협력자이긴 했으나 카르멘은 에키드나의 계획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와 같은 큰 그림은 알았다. 하지만, 세부 사항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서로를 이용하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였으니까.

    “맞아. 거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무서워서 도망가지 말고.”

    “하, 도망이라고?”

    카르멘은 코웃음을 쳤지만, 에키드나는 그를 무심히 지나쳐 더 앞으로 나아갔다. 확신에 찬 눈동자를 하고서.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걸어가던 에키드나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쯤이었나?”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한 듯,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이 에키드나의 발밑에 펼쳐졌다.

    우우웅!

    마법진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거운 기운을 토해냈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이건가.’

    카르멘은 그제야 에키드나가 나름대로 걱정을 해줬다는 걸 깨달았다.

    저 마법진은 마법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마나가 아닌 기운이 흘러넘쳤으니까.

    창조적 파괴.

    굳이 표현하자면 이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힘이었다.

    카르멘은 에키드나의 집중을 깨트리지 않으려 조심스레 물었다.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게 네가 말해주었던 신의 힘인가.”

    “맞아. 범접할 수 없는 창조신 레아의 권능 그 자체지. 네가 죽고 못 사는 마나도 이 권능 중 하나야.”

    어머니는 마나를 장난감이라고 생각했지만ㅡ이라고 에키드나는 덧붙였다.

    ‘장난감이라… 얄궂군.’

    초대 가주의 힘에 매료된 이후, 카르멘은 서슴지 않고 인연을 버렸다.

    가족, 가문, 인류.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했는데, 이런 식으로 폄훼되니 씁쓸했다.

    레아의 관점에서 그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그걸 자꾸만 밀어냈다.

    카르멘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착잡함에 삼켜지는 건 삼류의 방식이었다.

    일류의 마법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과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걸로 족했다.

    ‘에키드나가 신이 되면 다 해결될 일이다.’

    마족의 방법으로도 서드 서클로 거듭나는 건 무리였다.

    불완전하게나마 서드 서클을 돌파하기는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아바라치아가 큰 도움이 되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난 뒤였다.

    하지만, 에키드나가 신이 되어 권능 중 하나를 빌려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카르멘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는 동안 에키드나는 착착 준비해나갔다.

    신의 딸이었었기에 이 모든 과정이 익숙했다.

    마족으로 변해버린 몸뚱아리가 아프다고 신음했지만, 이런 고통 따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모든 절차를 끝낸 에키드나는 자신의 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나오렴. 이미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안단다.”

    * * *

    아깝게 에키드나를 놓친 유피테르 일행은 서둘러 비밀 거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놀라운 손님이 그곳에 미리 와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온 거지?”

    “신의 유산을 지키는 임무는 어떻게 하고 여길 온 거야?”

    “에, 에, 에, 에나스 언니?”

    유피테르, 트리아, 테세라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칼리스토의 맏언니를 반겼다.

    유피테르는 칼리스토들을 거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향이 좋은 홍차를 준비했다.

    “뚫렸어.”

    오랜만에 만난 에나스는 홍차에 대한 감상 대신 알쏭달쏭한 말을 꺼냈다.

    “그거 정말 큰 일이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유피테르는 알아서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이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좀 해주지.”

    “맞아요!”

    순식간에 대화에서 소외된 트리아와 테세라가 항의했다.

    정보 담당이었던 트리아가 제일 어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첫째, 에나스였다.

    그녀와 대화를 하는 건 고대의 암호를 푸는 것보다 어려웠다. 애초에 제대로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칼리스토들의 투정을 들은 유피테르는 에나스의 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나스의 임무는… 다 알고 있을 테니 넘어가고. 뚫렸다는 건 신의 유산의 결계가 부서졌다는 거겠지.”

    세아니아 대륙 곳곳에는 신의 유적이 잠들어 있었다.

    성국 크레이타도 원래는 그중 하나였다. 오를레앙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오흐트가 교황과 함께 찾아내기 전까지는.

    에나스의 임무는 신의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기둥’을 지키는 거였다.

    ‘기둥’은 세계의 법칙을 새로 덧쓸 수 있었기에.

    트리아와 테세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신의 결계가 부서질 수가 있어? 그건 소멸의 마나로도 어찌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맞아. 바실리 님께서 직접 말하셨었잖아.”

    유피테르의 별빛 마나는 무적이었다. 적어도 마나를 지닌 상대에게는.

    하지만, 신의 진정한 권능 앞에서 이런 것들은 전부 의미가 퇴색되어버렸다.

    그 누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선물을 웃는 얼굴로 주겠는가?

    “여기서 포인트는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했느냐겠지.”

    “…아!”

    테세라는 감탄을 터트리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유피테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트리아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주도했다.

    “범인은 에키드나겠네. 좀 놀라운걸. 태초의 마족이 무섭긴 해도 창조신의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인데.”

    아르테미스 초대 가주의 동생인 그녀는 마족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아드 언니 아니, 바실리 님이 없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신의 앞이라면 달랐다. 마족들은 그저 기어오르는 자식일 뿐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해도 그건 그저 져주는 거였다. 게다가 레아는 격이 달랐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존재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에키드나라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지.”

    뜬금없는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유피테르를 주목했다.

    “에키드나도 신의 딸이라고 하더군.”

    “누가?”

    에니스가 무표정하게 묻자, 유피테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인이 그러던데.”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후대야.”

    “말도 안 돼. 에키드나님은 그런 이야기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 애, 애초에 그분은 마족이잖아. 바실리 님과는 다른 느낌이었다고!”

    충격적인 발언이 계속되자 칼리스토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현실적인 트리아는 유피테르의 반응을 보고서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고, 테세라는 그럴 수 없는 이유만을 찾았다.

    ‘바로 기둥으로 갈 줄이야. 그렇게 급했나.’

    에키드나가 기둥을 노릴 거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가 신의 또 다른 딸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니. 마왕 티폰은커녕 바실리도 모르는 숨겨진 진실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에나스가 묘한 표정으로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신. 강림.”

    “…뭐라고?”

    유피테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공간 이동을 하려고 했지만, 에나스에게 저지당했다.

    유피테르는 발이 묶여버리자 진득한 살기를 담아 첫째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지?”

    “불필요.”

    “자세하게 설명해. 에키드나의 계획대로 진행되면 바실리가 소멸할지도 모른다고!”

    “바실리 님의 의지.”

    유피테르는 에나스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바실리가 잠에서 깬 거야? 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바실레이아가 눈을 떴다면 신호가 와야 했다.

    칼리스토와 패스가 이어진 것처럼 그녀와도 반려의 계약을 맺었기에. 신의 딸의 이름으로 이어진 계약은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었다.

    에나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간. 연약함.”

    “…네 말이 맞겠지.”

    유피테르는 부정하지 않고 그 말을 받아들였다.

    에나스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먼 옛날 마족의 대척점에 있던 정령 중 하나라고 들었다. 자연 그 자체와 다름없는 그녀의 감각은 믿을 만했다.

    새로운 신이 되기를 꿈꾸는 에키드나라면 신의 딸의 계약에 대비를 했을 거였다.

    “방법은 있겠지?”

    “당연.”

    에나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오흐트의 방으로 향했다. 유피테르와 다른 칼리스토들은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와본 적이 있기라도 한 듯 에나스는 거침없이 비밀 거점을 헤집고 오흐트의 방 앞에 도착했다.

    “…방해.”

    에나스는 트리아와 테세라의 힘이 합쳐진 결계를 가볍게 해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에나스의 행동을 지켜보던 유피테르가 물었다.

    “오흐트가 이 사건을 해결할 열쇠라고?”

    “조용.”

    에나스는 말 한마디로 유피테르를 침묵시키고는 오흐트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잠시, 여동생의 상태를 지켜보던 그녀는 정령의 힘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첫째 언니의 힘으로도 오흐트를 낫게 하는 건 어렵지 않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트리아와 테세라의 걱정은 기우였다.

    마족의 마나가 미쳐 날뛰는 타르타로스에서도 에나스의 힘은 굳건했다.

    오흐트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자, 에나스는 힘을 거두고는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성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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