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드나의 소원(5)
* * *
에키드나는 따분함을 참지 못하는 듯 하품을 하다 유피테르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악독하기로 소문난 마족이라고 해도 그 모습은 부끄러웠던 건지 바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미묘한 간극에 유피테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 데. 지금 나를 비웃는 거야?”
“비웃다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위대하신 신의 버.림.받.은 딸께서 한낱 인간을 상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유피테르는 포인트 부분을 한 글자씩 끊으며 에키드나의 속을 박박 긁었다.
이런저런 말로 치장되었으나, 뇌만 있다면 속에 담긴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의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일부러 쉬운 표현을 골랐으니까.
빛 좋은 개살구
그의 말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나, 에키드나는 딱히 분노하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상태는 조금 특별했으니까.
‘뭔가 꾸미고 있구나?’
유피테르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의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늘 그를 좇았기에 포션을 마시는 거보다 더 쉬웠다.
그 결과, 지금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도 대처법이 부족했다.
‘어떡할까?’
유피테르보다 오래 산 신의 딸이라고 해도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에키드나는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아냈다.
무언가 반격의 수단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걸 사용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바꿔버리면 그만이었다.
“내 사랑 유피테르. 우리 거래 하나 할까?”
“거래라니. 또 무슨 개소리를 뱉으려…. 아니, 아니야. 한번 말이나 해봐.”
세상에 몸을 묶어두고서 성립되는 거래가 어디 있는가.
유피테르는 할 말이 많았지만, 꾸역꾸역 참고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았다.
“당신이 필요한 건 바실리고. 내게 필요한 건 신의 딸의 증표잖아?”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된다. 용건만 이야기해.”
이런 상황에서까지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유피테르의 모습에 에키드나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내 사랑은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야.”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을 텐데?”
“체엣. 감상할 시간은 줘야 신사라구. 별건 아냐. 바실리의 힘을 빼앗고 있으니 이게 다 끝나면 육체는 당신에게 돌려줄게. 그럼 만족해?”
“…뭐?”
유피테르는 원래 에키드나가 무슨 소리를 해도 적당히 받아넘길 생각이었다.
그녀의 작전이라는 건 늘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세상이 도와주기라도 하는 듯, 우연에 우연이 겹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뿐이었다.
‘신의 딸이라서 그런 거였나.’
이제야 오랜 의문이 풀렸다.
원래 존재의 격이라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신의 딸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오고 마족으로 타락했더라도 말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마나들은 에키드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친근함이 느껴져 은근히 도와줬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지금 이딴 건 중요하지 않아. 바실리가 문제지.”
에키드나의 말에는 절대로 웃어넘길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바실리의 힘을 흡수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으나, 같은 신의 딸이라면 무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생각을 정리한 유피테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의 딸은 인간과 다르게 마나로만 이뤄진 생명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거겠지?”
“아아― 그걸 알고 있었구나?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에.”
에키드나는 이전에 썼던 말투까지 쓰며 아쉬워했다. 유피테르는 더는 참지 못하고 별빛 마나의 출력을 최대한 올렸다.
파지지짓!
별빛을 닮은 마나가 미친 듯이 흩날리며 그림자를 떨쳐냈다. 그림자는 손을 여러 갈래로 뻗으며 어떻게든 그를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의 기행을 쳐다본 에키드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정신이야? 자칫 잘못하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고. 바실리가 그렇게 소중해?
“내 힘은 내가 더 잘 안다. 네게 걱정을 받을 이유도 없어. 바실리는… 내 생명 그 자체다.”
“그렇구나.”
에키드나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바로 마법을 펼쳤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별빛 창
별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창들이 에키드나의 주변에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에키드나는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유피테르의 공격이 더 빨랐다.
슈우우웅!
별빛 창은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소멸의 마나에 중력의 힘까지 합쳐진 창의 힘은 어마무시했다.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던 기운마저 몸서리를 치며 도망갈 정도로.
“와아. 너무 이쁜데?”
의외로 에키드나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고 공격이 오는 걸 기쁜 눈으로 쳐다보았다.
‘웃는다고?’
유피테르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공격이 닿으면 에키드나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몰릴 거였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마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에키드나의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와 여러 겹의 방어막을 펼쳐냈다.
“숙녀에게 그런 식으로 마법을 쓰는 거 아니다. 멍청한 놈아.”
“…너무 늦었잖아, 카르멘 비제.”
아버지가 갑자기 등장해도 유피테르는 마법을 유지했다.
우우웅!
별빛 마나가 방어막을 소멸시키면 카르멘은 그에 발맞춰 새로운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공작 무기를 들고 있어서인지 쉽게 억누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출력을 확 올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에키드나가 삼킨 바실리에게도 영향이 갈 테니까. 그런 일만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유피테르는 하는 수 없이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지키듯이 에키드나의 앞을 가로막았던 카르멘도 옆으로 이동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빌어먹을 아버지.”
“곧 피날레가 올 테니 주인공을 데리러 왔다.”
“그새 말이 많아지셨네?”
카르멘은 대답 대신 에키드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준비는?”
“전부 끝났어. 이동하기만 하면 끝이야.”
“좋다.”
둘만 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적의 태도에 유피테르가 마나를 쏘아내며 말했다.
“굳이 내 앞에 모습을 보였다는 건 죽여달라는 신호겠지. 안 그래?”
이번에는 카르멘이 아니라 에키드나가 나섰다.
그녀는 그림자를 모아 유피테르의 공격을 가뿐하게 받아냈다. 그리고서 또다시 기술을 복사해 돌려주었다.
신의 잔향이 담긴 기운이었지만, 불안정했다. 유피테르가 자랑하는 소멸의 마나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이런 기술로 날 제압하려고 하는 건 좀 너무한데.”
“그러니까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직 쇼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구. 조금 더 기다렸으면 하지만. 내 사랑은 그러지 못하겠지?”
“당연하지.”
유피테르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에키드나는 카르멘에게 눈짓했다.
“시작해”
“이번만이다.”
카르멘은 들고 있던 공작무기에 마나를 넘치도록 부었다.
우웅!
이러지 말라는 듯 공작무기가 애처롭게 진동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에 받아들인 마족의 마나까지 쉬지 않고 퍼부었다.
‘이 좋은 걸 버리려니 아쉽긴 하군. 그래도 상관없나. 신이 되면 이런 무기보다 더 좋은 걸 만들어준다고 했으니.’
아티팩트는 원래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때문에 마법사들은 재산을 전부 탕진해서라도 손에 넣으려고 했다. 시장에 나타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싸울 정도로.
공작 무기 역시 신이 직접 하사한 아티팩트였다.
다른 것들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뛰어난 마나 반응력을 자랑했다. 마족 공작들이 숨겨둔 엄니라고 불릴 만큼.
이런 공작 무기의 한계까지 마나를 불어넣는다면…
‘마나 역류 현상을 노리는 건가.’
유피테르는 카르멘의 수를 재빨리 읽어냈지만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저자가 아티팩트를 희생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강함에 집착하던 카르멘은 아티팩트에도 탐욕을 부리고는 했었다. 탐욕의 공작 무기, 아바라치아의 소유자였음에도 그 버릇은 그대로였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티팩트들을 무수히 수집했다.
그때, 유피테르의 눈동자에 검은색과 은색의 오드아이를 지닌 에키드나가 들어왔다.
‘에키드나가 뭘 한 거군.’
확실했다.
에키드나는 이전에도 봉인의 열쇠를 멋대로 사용했었다. 물론, 복제품을 만들어 눈을 속인 거였지만, 자신이 모르는 방법이 있을 거라는 걸 배제해서는 안 되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공작 무기는 한계점에 다다라 폭팔했다.
콰아아아아앙!
신이 준 선물이 터지며 그 속에 들어있던 다양한 마나들이 뒤엉켰다.
탐욕의 공작의 마나와, 카르멘의 마나 거기에 에키드나가 선물한 마나까지. 하나하나가 턱이 빠질 정도로 위험한 기운들이었다.
마나들이 제각기 흩어지자, 조화로웠던 방 안의 마나에 균열이 생겼다. 엄청난 진동은 덤이었다.
유피테르는 육체 강화를 사용해 균형을 맞추고서는 선전 포고를 날렸다.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텐데.”
“별빛 마나를 맹신하는 건가.”
“당신이 지닌 그 더러운 힘보다는 낫지 않겠어? 저번에 졌으면 꼬리를 말고 도망이나 쳤어야지.”
으르렁거리는 유피테르의 목소리에는 그간 받았던 설움과 고통이 가득 들어있었다.
쿠구구구궁!
떨림은 점점 더 강해져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쁘지 않군. 그 의견대로 하지.”
“뭘 할 셈이지?”
“자랑스러운 아들의 의견을 따르는 거다.”
카르멘은 에키드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검은색도 푸른색도 아닌 색의 마나가 구체를 형성했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
그 공간은 이 진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싶더니, 이내 모습을 감춰버렸다. 안에 들어가 있던 자들도 함께.
“거, 거기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유피테르는 재빨리 카르멘이 있었던 곳으로 뛰었으나,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다.
번쩍!
허무하게 놓쳐버린 유피테르의 양옆으로 칼리스토 자매가 등장했다.
“후대야.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단 이 소란부터 해결해자. 트리아 도와라.”
“알았어요, 언니!”
트리아는 눈을 감고 혼란해진 마나를 잠재우기 시작했다. 테세라는 발을 맞춰 트리아를 지원했다. 두 사람이 지닌 마나는 달랐으나, 칼리스토였기에 문제없었다.
아르테미스 초대 가주 동생의 힘은 대단했다.
하나하나가 아플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으나 어렵지 않게 마나의 흐름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트리아는 한 번 더 점검하고서는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바실리 님은?”
“에키드나의 그림자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답지 않은 불확실한 표현에 조용히 있던 테세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림자 속이라니? 그럼 바실리님의 봉인을 풀어내는 데는 성공한 거구나!”
“일단은.”
트리아는 사건의 일면만을 보고 함박 웃음을 짓는 테세라와는 달랐다.
“에키드나에 함정에 빠진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