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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57화 (257/265)
  • 에키드나의 소원(4)

    * * *

    ‘…확인해야만 해.’

    이대로 현실에서 눈을 돌려봤자 변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에키드나의 계략에 이리저리 휘둘릴 뿐.

    그건 원하던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유피테르는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명석한 두뇌가 유례없을 속도로 돌아갔다.

    결론은 간단했다.

    에키드나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제일 나았다. 이것 이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후퇴한다면 영영 바실리와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야 뭐라도 하며 부딪쳐보는 게 더 나았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스르륵.

    유피테르는 고개를 돌려 에키드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고맙게도 그녀는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을 즐기기만 했다. 정말 바실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다 알고 있다는 미소를 보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네가 바실리가 아니라 에키드나라는 증거를 어떻게든 찾아낼 거다. 나를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는 걸 똑똑히 알려주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머리카락이었다.

    잘 관리된 검은색의 머리칼은 윤기를 뿌리며 살랑거렸다. 이 부분은 이전과 하나도 달리진 게 없었다.

    다음으로 그의 눈이 향한 건 바로 눈동자였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눈동자의 색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에.

    마족임을 증명하는 붉은 색 눈동자 옆에 있는 건….

    “은색이라니. 그건….”

    유피테르의 목소리는 숨이 막히기라도 한 듯 사그라들었다. 에키드나는 그런 그를 꼭 안아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나를 제대로 봐주는구나?”

    “….”

    달콤한 에키드나의 목소리에 유피테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의 버려진 딸이라면 감각을 속이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피테르는 곧바로 에키드나를 떨쳐냈다.

    “쉽게 넘어오지는 않네?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하다니 정말 인간이기는 한 걸까.”

    에키드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한없이 다정하던 눈동자에 어느새 장난기가 감돌았다.

    유피테르는 그녀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저 마족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분명히 에키드나야. 바실리라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안도의 날숨과 놀라움의 들숨이 섞여들어 묘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에키드나라는 걸 확신하자 갈 길이 명확해졌다.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실토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힘을 써서라도 말이다.

    탓!

    유피테르는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서는 곧바로 마법을 준비했다.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이쪽에 좋은 감정만 있을 때 기습해서 끝을 보는 게 좋았다.

    비겁한 짓이었으나 바실리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오욕은 뒤집어서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피테르식 특제 마법 – 별빛 나비

    별빛을 품은 나비들이 유피테르의 마나에 반응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결계의 나비들과는 사뭇 달랐다. 지키기보다는 공격하기에 걸맞은 존재들이었다.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반격을 알지 미리 읽어야 했기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그는 나비들에게 날아가라 명령했다.

    휘이익!

    나비들은 훨훨 날아가며 공간을 뒤덮었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게 움직였고, 압도적인 수는 피할 곳조차 없게 만들었다.

    “아직 날 에키드나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건 조금 틀린 답인데.”

    에키드나는 기다리다 나비들이 코앞에 도달하자 그제야 마법에 대응했다. 유피테르처럼 거리를 조절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손만 휘휘 저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어두침침한 나비들이 날아왔다. 유피테르와 마법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녀석들이었다.

    에키드나의 나비들은 그대로 유피테르의 나비들에게로 날아가, 용감하게 맞섰다.

    퍼어엉!

    두 나비 세력은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폭사했다. 똑같은 겉보기처럼 위력도 완전히 같은 듯했다.

    “바실리의 힘이군.”

    유피테르는 이전에도 저 기술을 본 적이 있었다. 충격적인 기억이었기에 뇌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법의 복사

    그건 바실리가 직접 선보인 기적 중 하나였다. 천칭의 마도사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거였다.

    그가 현재 마법의 틀을 보란 듯 깨부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의 덕이었다. 워낙 마나에 민감한데 그 흐름을 하나하나 보여주니 못하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궁금하다고 하니 하루는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보여주겠다고 했었지.’

    그녀의 교육이 늘 자비로웠던 건 아니었다. 정말 반려자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혹독하기도 했다.

    당연히 직접 마주 서 싸우는 것 역시 들어 있었다.

    고작 인간이 신의 딸을 상대로 이길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 있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무섭다고 도망치기만 해서는 현실이 변할 리는 없었으니까.

    “동생의 힘을 빼앗아서 사용하니 행복해? 고작 그걸로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에이, 설마. 이래 보여도 신의 딸이라구. 그런 구분을 하지도 못하는 걸로 보여?”

    “그렇게 보인다만.”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에키드나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웃어넘겼다.

    “아하하하! 재밌네. 역시 내 사랑이야. 정말 가지고 싶어진다고.”

    에키드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느낀 순간 그림자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유피테르의 몸을 구속했다.

    “고작 생각해낸 게 이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바실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데도 에키드나는 여전히 그림자의 힘에 얽매이고 있었다.

    왜 신에게 버림받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유피테르는 조소를 머금으며 별빛 마나를 끌어올렸다.

    신이 준 선물은 마나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에서 영영 지워버리는 것마저 가능했다.

    “그대로라고?”

    유피테르의 별빛 마나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는데도 그림자는 여전히 강력했다.

    오히려 꺼림칙한 기운이 더 강해졌다. 그의 힘을 먹이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에키드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유피테르의 표정을 천천히 음미하며 고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모르는 건 내 사랑 쪽인 것 같네.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건 당신의 나쁜 점이라구.”

    “뭘 안다고 헛소리지.”

    “다 알지. 당신이 어떻게 동생과 만났는지도. 왜 동생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아, 언제가 첫 키스인지는 비밀로 해줄까?”

    바실리는 유피테르의 역린(逆鱗)이었다.

    그걸 건들자마자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에키드나를 협박했다.

    “죽고 싶은 거라면 똑바로 말해. 언제든 티폰의 곁으로 보내줄 테니.”

    “그렇게 묶여 있는 상황에서 무게를 잡아봤자 웃기기만 하다구. 그리고 말이야.”

    에키드나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구.”

    유피테르는 싱글벙글 웃는 에키드나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림자는 더욱 옥죄어왔기에.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바실리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에키드나의 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고 직감이 수도 없이 외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유피테르는 혼자서 에키드나를 상대하는 걸 포기했다. 그 대신 쓸 생각이 없었던 플랜 B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비밀 거점에서 대기하던 트리아와 테세라는 긴장감 반, 지루함 반의 생활을 보내는 중이었다.

    “조용하네.”

    “그러네요. 정말로 조용하네요.”

    “그나마 오흐트가 무사하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로 다행이에요.”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트리아는 오른손으로 여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콩!

    청아한 소리가 나며 고통이 느껴지자, 테세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혹시라도 혹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진심을 담은 건 아니었는지 머리는 멀쩡했지만, 당연히 기분은 곤두박질 쳤다.

    테세라는 씩씩거리며 물었다.

    “아니! 왜 때려요. 가만히 있는 것도 죄인가요?”

    “말을 따라 하지 말고 네 의견을 말하라고. 너도 일단은 넷째잖아. 마족 공작이기도 하다며.”

    트리아의 말은 지당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에 대한 걱정 때문에 테세라는 대화에 집중하지를 못했다. 말꼬리만 잡고 건설적인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그랬다는 것을 깨달은 테세라는 쭈뼛거릴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게 너무나 답답했던 트리아가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순간, 패스를 타고 유피테르의 전언이 전해졌다.

    -지금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라. 좌표는ㅡ

    그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의 표정이 180도 변했다.

    테세라는 한껏 진지해진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흐트는 어떻게 할 거예요, 언니?”

    “글쎄.”

    트리아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평소의 유피테르라면 오흐트를 어떻게 하라고 한 마디 덧붙였을 것이다. 작전에 참여하는 동료들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후대의 힘으로도 대처 못 할 상황이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고작 마족 공작이 소멸의 마나를 막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멸의 마나는 무려 신이 직접 내린 하사품이었으니.

    한참 동안 이것저것을 재보던 트리아가 의견을 내놓았다.

    “오흐트는 일단 여기에 두자. 저 상태로 전투에 참여하다간 죽을지도 몰라.”

    “배신자들이 패스를 읽고 이곳에 올 수도 있어요. 그러면 데리고 간 것보다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테세라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패스로 이어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존재가 그걸 막는 억지력이었을 뿐.

    그가 전투중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엔 오흐트의 생명이 위험했다.

    “에나스 언니에게 미리 연락해놓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 후대가 필요하는 건 아마 우리 둘인 거 같으니까.”

    “트리아 언니는 다 생각이 있었군요.”

    트리아의 입을 통해 타당한 해결책이 나오자 테세라는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흐트의 결계를 강화한 뒤, 유피테르가 알려준 좌표로 이동했다.

    * * *

    유피테르와 칼리스토들만이 가지고 있는 패스. 에키드나는 그걸 훔쳐보기라도 한 듯 속삭였다.

    “혼자서는 힘드니까 칼리스토들을 부른 거야? 당신답지 않은 선택이네. 정말 힘든 일은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닥쳐!”

    “슬슬 포기하는 게 어때? 칼리스토들이 전부 오더라도 날 막을 수는 없어. 게다가 배신자들도 있잖아?”

    “네가 뭘 안다고!”

    유피테르는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얼마나 분노에 찼는지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에키드나는 그런 그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이곳에 오는 건… 트리아와 테세라 정도일까. 뭐, 오흐트는 못 오겠지? 배신자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는 중이고. 아아― 재미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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