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드나의 소원(3)
* * *
바실리가 잠들어 있는 수정 앞에 다가간 에키드나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가시밭길은 이제 끝났다.
이 수정의 힘만 있으면 창조신 레아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닌 바실리를 고른 걸 후회하게 할 자신이 넘쳤다.
그뿐만 아니라 유피테르에게 사랑받을지도 몰랐다.
생각했던 대로만 흘러가면 그의 사랑은 분명 자신에게 돌아올 게 분명했다. 거짓된 관계는 절대로 오래갈 수 없었으니까.
‘아냐.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상대는 신이니까.’
에키드나는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떨쳐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티폰은 말했었다. 정작 그 말을 지키지 못해 죽긴 했지만, 가치가 있는 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에키드나는 수정에 손을 갖다 댔다. 차려진 밥상을 거부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유피테르는 그걸 참지 못하고 발작했다.
“그 손 멈추지 못해? 더러운 마족의 손으로 신의 딸을 만지려고 하다니. 그러니 레아 님께 버림받은 거라고.”
언뜻 들으면 협박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만이 남아 있었다.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은발을 지닌 이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신도 그런 얼굴을 할 때가 있구나.’
신을 운운하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게 뻔히 보였다. 전혀 그 같지 않은 모습에 실소가 나올 것만 같았다.
유피테르는 늘 차갑게 행동하거나 분노를 터트리기만 했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한 사람의 억장이 무너지는 걸 구경하던 에키드나가 입을 열었다.
“힘이 없으면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안 그래?”
“…그런 말도 했었지.”
“역시 제대로 기억하는구나. 운명이란 참 기구하네. 그때와는 상황이 정반대잖아. 나는 누구처럼 티폰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지만 말야.”
“남편의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가. 신이 되어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가겠다고? 그게 쉬울 것 같나.”
“마음대로 생각해.”
유피테르의 말과 달리 에키드나는 복수심에 불타오르지 않았다.
티폰을 사랑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마족의 일원이 될 수 있게 받아들여 준 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에키드나에게 반한 티폰은 태초의 세 마족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널리 퍼트렸다.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였으나 시간이 흘러 타르타로스에 갇히며 상황이 바뀌었다. 대륙 전쟁으로 오래된 마족들이 전부 죽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있을 자리를 만들어 준 연인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휙!
에키드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서는 수정에 다시 손을 댔다.
우우우웅!
신에게 버림받았어도 그 피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던 걸까.
수정은 신성한 빛을 발하며 반응을 보였다. 속도가 빠르다고 할 순 없었으나, 봉인이 풀리고 있는 건 확실했다.
“마, 말도 안 돼. 네 손으로 그게 가능할 리는 없어!”
그에게만 허락된 일이 에키드나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자 유피테르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에키드나는 외마디 비명을 적당히 무시하고서는 수정에 천천히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걸 사용하는 건 레아에게 버림받은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보다 더 다루기 쉬웠다.
그랬다.
이게 그녀가 누렸어야 할 진실한 힘이었다. 단지, 운이 좋았던 동생이 그 자리를 빼어갔었을 뿐.
“그만 꿈에서 깨어나렴, 잠꾸러기 여동생아.”
그 순간.
수정이 붉게 변하며 어마어마한 기운을 발산했다.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기운이 마나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정처 없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마나 때문에 갑자기 마나 폭풍이 일어났다.
“나를 언니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니?”
중얼거리던 에키드나는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대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 * *
마나 폭풍이 한바탕 시원하게 쓸고 지나간 후.
유피테르는 몸을 옭아매던 신의 기운이 옅어진 걸 눈치챘다. 탁월한 마나 감지를 가지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한 차이였다.
‘끝난 건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도 유피테르는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수정의 봉인을 푸는 마지막 단계라고 확신했기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별빛 마나를 뿌리며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수정까지 도달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지금 구해줄게.”
유피테르는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참고 수정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바실리가 가르쳐준 방법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늘 이 순간을 그려왔었으니까.
별빛 마나가 머리를 쓰다듬자 잔뜩 화가 난 듯 붉었던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영롱한 은빛 기운이 대신 채워나갔다.
은빛을 보자 유피테르의 초조한 마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아르테미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은색은 원래 바실리의 것이었기에.
맞는 길을 택했다는 확신이 생긴 그는 마나의 출력을 최대한 높였다.
마나를 모두 고갈하면 죽는 건 상식이었다. 하지만, 바실리의 봉인을 풀어주는 게 더 급했다.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신의 시련이 만만할 리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물론 타르타르스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형벌의 무서움을 끝내 인지하지 못했다.
유피테르의 간절한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수정에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까득!
거대한 알처럼 단단한 표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거침없이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내 사랑이라고 해도 다 된 밥을 채가려는 건 용서할 수가 없어!”
변화가 시작되자 에키드나가 뒤에서 쏜살같이 마나를 쏘았다.
“이 타이밍을 노리고 공격을 해오다니. 신의 딸이 아니라 마족에 더 잘 어울리는 거 아냐?”
유피테르는 황급히 궤도를 계산해 방어막을 만들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와 함께. 정신이 수정에 팔린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에키드나의 공격은 방어막을 잘근잘근 밟고서 유피테르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타악! 뒹구르르르르! 콰아앙!
그는 처참하게 날아가 지면을 몇 번이나 뒹군 후, 벽에 부딪혔다. 공격에 당한 걸 확인하고서 에키드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저리 꺼지라고. 그만 사라지란 말이다. 내가 바실리를 구하는 걸 방해 하지 마!”
허를 찔린 유피테르는 어떻게든 돌아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에키드나의 그림자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승리자인 거지.”
에키드나는 조소하며 수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격자가 아니면 거절할 수 있다는 거네. 그러면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신의 딸의 지위를 이용한 편법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해왔었으니까. 버려진 그 날부터 말이다.
탕!
에키드나가 발을 한 번 구르자 발밑에 그림자가 생겨났다.
마나를 배부르게 섭취한 그림자는 거대한 입을 벌려 수정을 통째로 잡아먹었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살아온 이유가 없어진 유피테르가 절규했으나, 에키드나는 멈추지 않았다.
수정이 있던 공간은 이내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공허로 변해버렸다.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처럼.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림자는 원래 있던 곳으로 유유히 돌아가 모습을 감췄다.
에키드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어쩌나. 바실리를 그렇게 보고 싶어 했었는데 이제는 못 보겠네?”
“뱉어.”
“뱉어? 뭐를 뱉으라는 거야. 여성에게 그런 말투는 실례라고. 귀족이면서 그런 것도 몰라? 카르멘은 그러지 않던데.”
명백한 도발에 유피테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의 자리에 도전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자신을 사랑한다고 집착할 때는 웃어넘겼다. 새로운 신이 되겠다고 할 때도 그러려니 했다.
설령 저 모든 게 진짜라고 해도 바실리를 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별빛 마나가 있는 이상 신을 제외한 어떠한 존재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화가 나는구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네게 바실리를 이용할 자격 따윈 없다고.”
두 사람의 말싸움은 계속되었다.
“자격? 그 자격을 누가 부여했지.”
“당연히 창조신 레아지.”
“창조신 레아는 너희들을 버렸어. 내가 마족이 된 게 그 증거지.”
“어떤 헛소리를 해도 난 넘어가지 않을 거다.”
에키드나의 말에 유피테르가 화를 쏟아내는 그 순간, 이변이 또 한 번 발생했다.
두근!
세계가 강하게 맥동했다.
수정을 보호하던 공간이 수축과 팽창을 이어나갔다. 마치,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읽어내는 유피테르라고 해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경지의 일이 아니었다. 설령, 마족이라고 해도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인간이나 몬스터와 비교했을 때 마족이 강했을 뿐, 신의 자리에선 그 무엇도 하찮은 것이었으니.
새롭게 만들어진 기운이 한곳으로 모여들자 유피테르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에키드나 쪽이라고?”
변화의 중심은 다름 아닌 에키드나였다.
그녀가 이 힘을 제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인 기운이 만드는 흐름에 에키드나가 휩쓸린 것 같았다.
마나로 만들어진 실은 에키드나를 차근차근 휘감았고 이내 거대한 고치가 만들었다.
공격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유피테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고치에서 바실리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화아아악!
고치가 찬란한 빛을 발하며 없어졌다. 그 안에서 에키드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뭐지 이 느낌은.’
일말의 불안감이 유피테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직감은 늘 맞아떨어졌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떨쳐내려 심호흡을 했다.
“유피.”
어느새 유피테르의 곁으로 다가온 에키드나가 사랑이 뚝뚝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만둬.”
“왜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한 거니.”
바실리와 똑같은 말투에 유피테르는 멍하니 그걸 지켜보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에키드나의 손이 그의 얼굴 얼굴을 훑는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실리라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곳에 있는 건 에키드나였다. 외모는 물론 마나 감지마저 그녀가 에키드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피테르의 창의력은 이 상황을 설명할 한 가지 가설을 재빨리 만들었다.
‘이 모든 게 에키드나가 준비한 함정이겠지.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럴 거야. 나도 쉽게 구하지 못한 열쇠를 다 모은 것부터가 이상했어.’
자기합리화.
유피테르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가 지금만큼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 살아 숨 쉬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구멍이 난 부분이 훤히 보이는 가설이었다. 그러나 끔찍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 보는 건 힘겨웠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애인의 일이었기에 유피테르의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에키드나는 그런 유피테르의 기분을 다 안다는 듯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이 같은 모습도 귀여워서 좋아. 유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