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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55화 (255/265)
  • 에키드나의 소원(2)

    * * *

    유피테르가 정확히 답을 맞히자 에키드나는 제 일처럼 기뻐하며 두 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맞았어! 그럼 이제 내 사랑의 전 여자친구를 이곳으로 불러와 볼까?”

    “전? 헛소리를 길게도 말하는군. 누구 마음대로 그딴 헛소리를 하는 거지.”

    “열쇠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아? 빨리 협조해줘. 그렇지 않으면 영영 바실리를 보지 못할지도 몰라.”

    “급한 건 네 쪽 아닌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꿈꾸던 소원을 이룰 수 없겠지.”

    말도 되지 않는 일방적인 요구에 유피테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체 어디서 들은 거지? 봉인을 푸는 조건은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바실리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먼저,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네 개의 열쇠를 찾아야만 했다.

    제대로 된 단서조차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열쇠를 찾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다음으로 유피테르와 함께해야만 했다.

    바실레이아의 봉인은 사실 유피테르에게 내리는 신의 벌이었다.

    용서를 비는 데 본인이 없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사해달라고 할 수 있을 거 아닌가.

    ‘우습게도 두 개 다 갖춰진 상태인가. 정말로 바실리의 봉인이 풀리면….’

    말과 달리 유피테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바실리와의 재회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유피테르의 생명 그 자체였으니.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에키드나의 계획에 휘둘리기만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봉인 속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생각을 마친 유피테르는 명확한 거부 의사를 보이며 에키드나와 거리를 뒀다.

    “듣기 좋은 말이 몸에는 좋지 않지.”

    “역시 유피테르야. 당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줄 알았다구.”

    “그게 무슨….”

    에키드나는 놀란 그를 뒤로하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당당한 걸음걸이에 유피테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녀가 상상치도 못한 곳에 도달하자 안색이 새파래졌다.

    “네. 네가 어떻게 거길 아는 거지. 그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란 말이다!”

    “그걸 묻기 전에 이 집을 찾은 방법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닐까? 나는 당황하는 당신의 모습도 좋아하지만 말야.”

    유피테르와 바실리가 살았던 집에는 비밀 공간이 많았다.

    에키드나가 가려고 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심지어, 바실리가 연구실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도 유피테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나?”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과, 피해를 보더라도 에키드나의 발을 저지하는 것.

    유피테르는 후자를 선택하고서는 마나를 쏘아냈다. 마법보다 약할지언정 세세한 제어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마나가 움직이질 않는다니.”

    마나는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마치, 고유 결계 속에 갇힌 것처럼 묵묵부답이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에키드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이 없는 남자인 줄 몰랐는걸.”

    “그 짧은 사이 고유 결계를 펼쳐냈을 리 없다. 더구나 이곳에는 바실리의 기운도 남아 있을 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그 질문의 답은 나중에 해도 될까? 지금은 바빠서.”

    에키드나는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피테르와 퀴즈 놀이를 하면서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드디어 끝이 보여.’

    용케 여기까지 온 자신을 아플 때까지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신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많은 걸 포기했으니까.

    아니, 아직이었다.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임시 방편으로 유피테르의 힘을 막아놓은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에키드나는 허공을 주시했다.

    마나 감지조차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문이 있을 거라고 믿고 계속 지켜보자, 허공에 손잡이가 나타났다.

    그걸 본 유피테르가 소리쳤다.

    “그만둬! 지금이라면 신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어. 마족이 신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레아를 무서워했다면 처음부터 이 일을 계획하지 않았어.”

    에키드나는 망설이지 않고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문을 열었다.

    ‘멸망할 운명이라면 적어도 내 손으로 결정짓겠어. 다른 누가 아닌 내 삶이니까.’

    * * *

    달깍! 끼이익!

    숨겨진 공간은 너무나도 쉽게 에키드나의 침입을 허용했다.

    “거기서!”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지만,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의 뒤를 쫓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반격의 기회가 올 거라고 굳게 믿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사라졌었던 네 개의 열쇠가 홈에 벌써 들어가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유피테르와 에키드나가 방 안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10초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이게 의미하는 건 딱 하나였다.

    “나를 속인 건가?”

    “어때. 연극은 마음에 들었어? 이제 내 마음을 받아줄 준비가 되었을까.”

    “웃기지 마!”

    그제야 유피테르는 에키드나가 얼마나 앞서 나간 건지 깨달았다.

    그녀는 열쇠만 먼저 찾은 게 아니었다.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도 전부 꿰뚫고 있는 듯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이 전부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유피테르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진실을 확인하려 입을 열었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건가?”

    “어머. 그건 아니야. 운 좋게 이곳을 발견하고 저기에 열쇠를 넣은 것뿐이야?”

    에키드나는 손가락 끝으로 열쇠가 꽂힌 자리를 가리켰다. 전후 사정을 몰라도 열쇠를 어떻게 해야 할지 훤히 보였다.

    “하나만 묻지.”

    “칼리스토들도 모르는 비밀을 어떻게 알았냐구?”

    “…그래.”

    속마음을 읽힌 유피테르는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에키드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내가 버려진 신의 딸이니까?”

    “뭐….”

    모든 일에는 전조 증상이 존재했다.

    화산이 터지기 전이나 거대한 해일이 오기 전에 지진이 나거나 동물들이 도망쳤다.

    누군가에게 계시를 받은 듯이.

    그러나 에키드나의 말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현재 살아있는 인류 중에서는 유피테르만큼 가장 역사의 조예가 깊었다. 신의 딸이 직접 사사하였으니까.

    유피테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마. 바실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 그것보다 마족은 신의 딸일 수 없어.”

    “왜?”

    에키드나가 여유 있게 반문하자 유피테르도 바로 타당한 근거를 내세웠다.

    “왜냐니. 마족은 신에게 반기를 들은 반역자들이잖아.”

    두 번의 대륙 전쟁.

    인간들에게는 끔찍한 시기로 기억된 재앙 속에서 마족들은 꾸준히 신의 자리를 노렸다. 태초의 세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티폰이 죽은 이유는 2차 전쟁에서 패하고 타르타로스에 갇힌 이후에도 여전히 레아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신의 딸은 제 분수를 모르는 마왕을 가만히 둘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유피테르에게만 상냥하고, 자비로웠으니.

    유피테르의 대답을 들은 에키드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질문을 냈다.

    “그럼 왜 마족은 신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그것도 인간의 손을 잡고.”

    “그걸 알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의 일원이었겠지. 안 그래?”

    “지금이라도 난 환영하는데.”

    에키드나는 두 팔을 벌렸다.

    진심으로 유피테르가 자신의 품 안에 올 거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 그가 그렇게 행동할 일은 없었다.

    그 대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바실리의 동생이라고?”

    “아쉽네. 조금 빗나갔어. 난 그 애의 언니야.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산 넘어 산.

    이 말이 가장 정확한 상황이었다.

    에키드나가 바실리의 자매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언니라니.

    바실리는 유피테르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그것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의 숙명이라면서.

    인간이 알면 안 되는 것들이라면 그렇다고 말을 해주었다. 괜한 호기심에 금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지만, 자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말이 거짓이거나, 바실리조차 모르는 숨겨둔 진실이거나 둘 중 하나인가.’

    지금 가진 단서로는 에키드나의 말에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었다.

    바실리가 단서라도 남겨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일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시답지 않은 걸로 시간을 낭비하는 연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의 딸이 두 명이라. 그것참 재미있는 농담이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몫이지. 아, 이제 시간이 다 되었나 봐.”

    에키드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이 만든 봉인이 풀렸다. 열쇠 구멍이 있던 벽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완전히 사라졌다.

    자그마한 진동도 발생하지 않았다. 인간이나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처럼 불완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벽이 사라지자 봉인석에 갇혀 잠들어 있는 바실리의 모습이 유피테르의 눈에 들어왔다.

    “바, 바실리!”

    두근.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기절했던 생선이 도마 위로 펄쩍 뛰어오르는 것처럼.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그와 똑같은 은발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에키드나의 함정에 빠져 무저갱으로 떨어졌던 기분이 단숨에 회복되었다. 좋다 못해, 에키드나의 만행을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유피테르는 손을 뻗으며 한 걸음에 달려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신의 기운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강대한 기운은 이쪽저쪽에서 용솟음치며 공간을 장악해나갔다.

    신의 반려자와 함께 살았고, 신의 선택을 받았어도 신의 힘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2차 대륙 전쟁 후, 신의 뜻은 성국과 바실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이게… 신의 힘인가. 웃음조차 나오지를 않네.’

    교황이나 성녀가 사용하는 기운도 신성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바실리가 간단히 보여줬던 힘과도 달랐다.

    신의 힘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왜인지 모를 경건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때, 에키드나가 생각났다.

    이 힘에 거역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을 예측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자신의 힘을 제한한 것처럼.

    슬쩍 오른쪽을 보자 에키드나 역시 압도적인 기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릎은 꿇었으나 고개만큼은 숙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적어도, 그녀가 먼저 나설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변은 곧 찾아왔다.

    “제가 당신의 딸이라는 걸 잊으셨나 보군요.”

    에키드나의 주변에 처음 보는 기운이 모여들었다. 늘 사용하던 그림자의 마나와는 결이 달랐다.

    그녀는 그 힘을 지팡이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갔다. 점점 더 압박이 심해지는지 무릎이 굽혀졌으나 결국, 바실리에게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당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지금 증명해주겠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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