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드나의 소원(1)
* * *
에키드나는 세 개의 열쇠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신이 만든 열쇠는 끈적끈적한 마족의 마나가 달갑지 않다는 듯 몸부림쳤다.
세 개의 열쇠에서는 각기 다른 색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가벼운 반항이라고 치부할 게 아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느낌이 달라. 뭘 노리고 있는 거냐, 에키드나.’
본 적 있는 광경에도 유피테르는 긴장했다.
성에서 만났을 때, 에키드나는 열쇠의 힘을 강제로 끌어냈었다. 그 덕에 바실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다.
‘그때와는 다른 반응이라니….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군.’
에키드나는 신의 힘을 어렵지 않게 다뤘다. 태초의 세 마족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실리조차 신의 힘을 다루는 걸 벅차했었으니까.
애초에 창조주와 창조물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건 실례였다.
유피테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키드나는 마음껏 행동했다.
그녀의 두 손은 피아노를 연주하듯 허공을 수놓았고, 그 흐름을 따라 그림자들이 춤을 췄다.
치지지지직!
두 힘은 조금 더 맹렬하게 부딪쳤다.
검은 마족의 마나와 빛나는 신의 힘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마치, 이게 세계의 운명을 가리는 싸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나를 장악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자 에키드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생각보다 어렵네에에에에.”
“고작 마족 주제에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우습군.”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의 헛된 발악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예로부터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정해져 있었다. 성검도 그랬고, 자신에게 깃든 힘도 같았다.
“신의 선택을 받아서 선민의식이라도 생겼다는 거야아아? 어차피 당신도 인간에 불과해에에에.”
“그러는 넌 마족이지. 신의 자식이면서도 신의 사랑을 거부한 바로 그 종족이라고.”
“무의미한 사랑 따위 이쪽에서 거절이라구우우우.”
“선택받지 못한 이들이 꼭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않나. 마족도 똑같나 보군.”
유피테르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화려한 언변은 남을 도발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심리전은 아르테미스 가문의 주특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는 물보다 더 진했다.
“….”
에키드나는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유피테르를 사랑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이대로 말씨름을 계속하다간 집중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나를 향하게 될 거야아아. 아아…. 정말 갖고 싶어, 내 사랑.’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 될 테니까.
* * *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에키드나를 관찰했다.
‘날 상대하는 데 그럴듯한 방어막 하나 치지 않는다고? 정신을 놓아버린 거냐.’
그녀는 방어막은커녕 결계도 치지 않은 채 신의 기운과 맞서는 중이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저울은 천천히 신의 기운 쪽으로 기울었다.
감히 신의 권좌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신의 딸도 묵묵히 벌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까.
유피테르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불러들였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가만히 두고 볼 그가 아니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이기는 게 더 중요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기둥
쿵! 쿵! 쿵!
푸른 마나는 냉기를 머금고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특정한 법칙 따윈 없었다. 그냥 변칙적으로 모여 원형의 기둥을 만들었다.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얼음의 세계로 초대하면서.
유피테르의 방해가 들어오는 순간, 에키드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며 은색을 담아냈다.
“예상대로야아아아.”
“뭐?”
놀라워할 시간은 없었다.
유피테르의 마나는 천천히 그림자의 색으로 물들었다. 원래 그랬다는 것처럼.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그렇게 놀라아아아. 이곳은 타르타로스야아아. 당신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오오.”
유피테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론상으로는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당해보니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신의 딸의 반려자라고 하더라도 이곳에선 낯선 이에 불과했다.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힘을 이용해 신의 기운을 억눌렀다.
인간과 마족의 힘이 융화한 혼돈의 힘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파지직! 파지지직!
신의 기운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생겨난 지 오래였다.
결국, 열쇠는 꼬리를 내리고 큰 흐름의 일원이 되는 걸 선택했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조화 마법을 통해 신의 힘을 잠재운 건가.”
“어차피이이. 이 열쇠에 담긴 신의 힘은 진짜가 아니니까아아아. 내 사랑도 그걸 알잖아아아?”
그랬다.
열쇠는 신이 직접 만든 아티팩트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 속에는 티끌만큼의 기운만 남아 있었다.
신과 직접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피테르는 얼음 기둥을 해제했다.
이미 원래의 목적을 잃었기에. 이대로 가다간 에키드나의 꿈만 이루어주게 될 판이었다.
“어라아아? 마나를 더 안 주는 거야아아?”
“헛소리 그만하고. 준비된 수를 꺼내 보시지. 신의 열쇠로 저번과 같은 걸 할 생각인가 본데.”
계획을 방해하는 걸 실패했어도 유피테르는 자신감이 넘쳤다.
가진 패를 전부 보이지 않은 건 같았으니까. 그의 사전에 패배란 없었다.
“에이 설마아아아, 그렇게 뻔한 짓을 하겠어어어?”
에키드나는 묘한 웃음을 뿌리며 양팔을 넓게 펼쳤다. 그러자 엄청난 수의 마법진이 그녀를 에워쌌다.
“고대 마법진? 진심으로 신의 열쇠를 사용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아직 3개뿐이다. 바실리를 꺼낼 순 없을걸.”
유피테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열쇠는 에키드나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쥐 죽은 듯 가만히 있긴 했지만.
그러나 전부 모인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아공간에 묘한 반응이 왔다.
그곳은 완전한 사적 공간이었다. 그 누구도 아공간을 강제로 열거나 닫을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공간을 열었다. 뭔진 몰라도 이유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었기에.
피유웅!
아공간이 열리자마자 네 번째 열쇠가 쏜살같이 튀어져 나왔다.
유피테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열쇠를 빼앗기면 완전한 패배였다.
더는 뒤를 기약할 수도 없었다.
“닿아라아아아아아아아!”
유피테르는 육체 강화법을 가동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쓰는 데 자신 있는 시트시거가 보았다면 엄지를 치켜들 정도로 반응 속도였다.
하지만, 열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결국 에키드나의 곁에 도착했다.
“이걸 어째에에에. 이 친구는 내가 더 좋은 거 같은데에에?”
에키드나가 손짓하자 네 번째 열쇠는 다른 세 개의 열쇠가 모여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드디어 한곳에 모인 열쇠들은 원을 만들어 일렬로 섰다.
그러자 사방을 가득 메운 마법진들이 기다렸다는 듯 빛을 발했다.
형형색색의 마법진은 어마어마한 마나를 토해냈다. 마족이라고 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경지였다.
열쇠를 빼앗긴 유피테르는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었다.
에키드나가 무슨 짓을 해도 별빛 마나로 분석하고 지워버리면 끝이었다.
하지만, 바실리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힘 조절을 잘못하다가는 영영 바실리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키드나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내 사랑.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어어어.”
“일부러 네 번째 열쇠를 준 거냐. 이런 고통을 맛보라고? 제대로 엿맥이는 덴 성공했네. 축하해.”
“내가 내 사랑의 마음을 왜 아프게 하겠어어어?”
에키드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피테르가 반박했다.
“웃기지 마.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은 전부 날 화나게 만드는 거였어. 신이 되겠다는 것도 거짓말이겠지?”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갑자기 에키드나의 말투가 바뀌었다. 평소처럼 말끝을 최대한 늘이는 대신 딱딱하고 냉정했다.
유피테르는 그 변화에도 놀라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다양한 가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거 더 어색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그래. 어린 시절 당신을 괴롭힌 카르멘은 눈앞에서 치워줬어. 또, 당신은 제대로 찾지도 못한 열쇠를….”
에키드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야기를 이었다.
“이렇게 전부 모아줬잖아?”
“그, 그건….”
이번만큼은 유피테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키드나가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맛있는 부분은 전부 그의 몫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에키드나는 흥얼거리며 유피테르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유피테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후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네.”
“정말로 날 사랑했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 난 네 남편을….”
에키드나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는 검지를 들어 유피테르의 입을 막았다.
“쉬잇.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진정으로 원해야 할 건 찬란한 미래지.”
“….”
유피테르가 손길을 거부하지 않자 에키드나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유피테르의 코앞까지 갖다 대었다. 따뜻한 숨결이 코를 살랑였다.
“이 모든 게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거야. 즐겨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을 지배하는 마나가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이끌었다.
* * *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빛이 사라지자 유피테르는 슬며시 눈을 떠 주변을 확인했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습관처럼 마나 감지를 사용하던 찰나,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여긴 바실리와 마지막으로 있었던….”
열쇠를 모두 얻기 전에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정작 와보니 추억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곳을 봉인했었다는 사실까지.
“에키드나! 네가 이곳으로 날 데려온 건가? 어떻게 안 거지. 여긴 칼리스토들조차 모르는 곳이라고.”
유피테르가 확신을 갖고 에키드나를 찾자, 그녀는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뿐이지”
“웃기지 마!”
유피테르는 본능적으로 얼음 화살을 만들어 한 방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에키드나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멈췄다.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걸까?”
여긴 단순한 저택이 아니었다.
바실리와 함께 했던 시간 중 소중하지 않은 건 없었지만, 이곳은 그 이상으로 중요했다. 바실리의 봉인을 풀 장소로 갈 수 있었기에.
떠나기 전 굳이 봉인까지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유피테르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지?”
“그 좋은 머리로 생각해봐. 전부 알려주면 재미가 없잖아? 준비한 걸 완전히 즐기려면.”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의 분위기를 살폈다.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방비가 허술하지도 않았다. 주변을 맴돌던 열쇠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굳이 화를 돋을 필요는 없었다.
‘이걸 문제라고 내는 건가.’
유피테르는 수재가 아니라 천재였다.
머리가 좋긴 하지만, 여동생보다 뛰어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남들과 다른 방식을 곧잘 떠올린다는 거였다.
하지만, 에키드나가 낸 퀴즈는 정해진 답을 맞혀야만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답은 뻔하지 않나. 바실리의 봉인을 풀어달라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