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53화 (253/265)

칼리스토(3)

* * *

턱 하고 숨이 막혀오는 순간.

에키드나의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상상이 울창한 숲처럼 자라나는 중이었다.

‘역시, 당신은 이런 모습이 잘 어울려. 그날처럼 숨기고 있는 자신을 전부 보여 달라구우우.’

앞이 보이지 않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에키드나는 에키드나였다.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누구보다 그 감정을 잘 알았다. 심지어 눈치 보지 않고 그걸 탁월하게 이용했다.

어차피 다른 존재들은 길가에 널려있는 몬스터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거대한 요새처럼 단단한 심미안을 뚫을 존재는 너무나 적었다.

꽈아악!

유피테르는 손에 더 힘을 주며 으르렁거렸다.

“왜 그러지. 너답지 않은걸. 새로운 취미에 눈이라도 뜬 건가? 아니면 이제 와서 내 손에 죽는 걸 택하는 건가?”

그림자 마법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창조신의 세계에서 그림자가 지지 않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즉, 온갖 곳에서 마법을 펼쳐내는 게 가능했다.

마족들이 시트시거보다 에키드나를 더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바로 그 순간.

툭.

에키드나의 손에서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소리로 볼 때 그리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함정이군. 너도 결국 다른 마족과 같은 수를 쓰는 건가.’

유피테르는 뻔하디뻔한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길을 걷는 걸 택했다.

우우우웅!

사방을 뒤엎는 어마어마한 냉기와 함께 얼음 화살이 생겨났다.

하나, 둘, 셋….

고개를 빼꼼히 내민 화살들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마나가 허락하는 한 무한히 수를 불리고 싶은 것 같았다.

유피테르는 얼음 화살을 바로 쏘아내지 않고, 에키드나의 바로 앞에 멈춰 세웠다.

“반항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럼 열쇠를 돌려주실까.”

“…!”

열쇠 이야기를 꺼내자 에키드나가 혼을 실어 몸부림쳤다.

하지만, 유피테르의 악력이 더 위였다.

그는 시에라 제국의 검사보다 더 많이 훈련했다. 얼음성의 누군가가 그걸 원했기에. 마나를 되찾은 이후에도 이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의 마법사는 고대 시대와는 달리 접근전에도 능해야 했으니까.

에키드나라면 눈치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헤라클레스 가문의 비전 마법도 사용했다.

피와 눈물이 담긴 메르카르트는 마족의 강인한 신체 능력마저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유피테르의 말도 안 되는 마나 제어력이 덕이었지만.

‘체엣. 쉽게 놔줄 생각은 없다는 걸까아아.’

에키드나는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꽤나 진심을 담아 몸을 흔들었는데도 목을 잡은 손은 풀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숨 가빠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아직 여유로웠다.

마족의 신체 구조는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잠깐 호흡하지 못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았다.

‘저 마법은 무섭네에. 여기선 그걸 사용해야 하나아아아.’

오히려 문제는 유피테르가 만들어낸 화살들이었다.

‘정지’의 속성을 지닌 저 마법에 꿰뚫리는 건 사양이었다. 잘못 맞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게 될지도 몰랐다.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아까워도 ‘그걸’ 사용하는 게 맞았다.

결단을 내린 에키드나는 방금 전보다 더 격하게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읍읍읍!”

“생각보다 멍청하군. 네 목숨이 있어야 열쇠도 가치를 가지게 되는 거 아닌가.”

유피테르는 조소하며 얼음 화살들에게 전진을 명했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얼음 화살들은 천천히 에키드나에게 다가갔다.

할 수 있는 한 느린 속도였다.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다는 유피테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에.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까드드드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에키드나의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서서히 얼어붙었다.

유피테르의 얼음 마법은 마족에게도 먹혀들었다.

신성 마법 정도로 상성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

에키드나도 지독했다.

얼어붙는 와중에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입은 굳게 닫혔고, 붉은 두 눈동자는 유피테르를 똑바로 보았다.

에키드나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고통을 참자 유피테르는 서서히 공격의 빈도를 늘렸다.

물론, 최대한 통증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짜증 날 정도로 잘 참는군. 마족이 대단한 건가. 아니지, 네가 특별한 걸지도 모르겠군.”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에키드나를 보며 유피테르가 중얼거렸다.

얼음 화살이 기본적인 마법이긴 했다. 하지만, 그 점이 유용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아슬아슬하게 고통을 줄 수 있었으니까.

고문이나 협박을 하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마족을 고문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게 사실이었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바실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인간보다 마족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게 더 어렵다고 말했었다.

당시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말이 정확했다.

그때, 에키드나의 상태에 이변이 발생했다.

사아아아아아악!

얼음 화살 밑에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갑자기 생겨났다.

각각의 그림자는 점점 몸집을 불리더니 얼음 마법을 그대로 먹어 치웠다.

파아앙! 파아아앙!

얼음 화살을 파훼한 그림자들은 사정없이 터져 나갔다.

유피테르의 마법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뭐든 잘못 먹으면 배탈 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에키드나의 공격이 시작되자 유피테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래. 그날의 너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봐라. 진정으로 신이 되고 싶다면 말이야.’

에키드나가 유피테르에게 집착하는 만큼, 그 역시 에키드나를 잘 알았다.

바실리가 따로 교육해준 건 아니었다.

마족 중에서 가장 잘 마주쳤으니 그렇게 된 것이었을 뿐. 슬픈 어린 시절 덕에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이런 유피테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키드나는 마나 폭발을 이용해 유피테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방심을 이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마나의 흐름을 강제로 바꿔버렸을 뿐.

신의 반려자가 선택한 유피테르라고 해도 전능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마나를 흩트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키드나는 사레 걸린 듯 기침을 한 뒤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켁켁. 이런 플레이는 조금 싫은데에.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아아.”

“너랑 그런 관계가 된 적은 없다만?”

“우리는 이미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동료잖아아아.”

“헛소리 마.”

유피테르는 그 말을 바로 부정했다.

사실, 에키드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신이 되기 위해선 바실리를 풀어줘야만 했으니까.

“어차피 바실리를 구해주는 건 내 사랑이 아닌 나일 텐데에에에.”

“닥치라고 했지!”

에키드나가 굳이 한 번 더 그 말을 입에 담자, 유피테르도 더는 참지 않았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발톱

유피테르는 분노에 차 마나를 쏘아냈다.

푸른 마나는 세 갈래의 발톱으로 변해 에키드나에게 날아갔다. 파괴적인 기운이 넘실거리며 붉은 눈의 마족을 찢어발기려 했다.

하지만, 손과 발이 자유로워진 에키드나는 이전과는 달랐다.

에키드나 식 그림자 마법 – 그림자의 동굴의 축제

그녀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넓어지더니 동굴을 만들었다. 칙칙한 느낌의 굴에서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본 드래곤, 슈페리어 트롤, 미노타우르스, 그리고 얼음새….

하나하나가 던전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중 압권은 미노타우르스였다.

소를 닮은 괴물은 육중한 도끼를 휘두르며 유피테르의 마법을 갈라버렸다.

에키드나는 거대한 새 위에 올라타 하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환희에 떨었다.

“그래. 그 모습이야! 아주 좋아! 더!”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이런 마법으로 대응하다니. 여전히 그날 밤에 머물러 있나 보군.”

재앙이 범람하는 상황에서도 유피테르는 냉정하게 대처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그건 평범한 얼음 마법이 아니었다.

세계를 정지시키는 얼음 마법에 유피테르의 별빛 마나가 깃드니 두려움 그 자체가 되었다.

뼈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는 사방을 잠식하는 것로도 성에 차지 않는 듯, 그림자 군단의 생명까지 뺏어갔다.

“쿠오오오오!”

“쿠에에에에에에에!”

“우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그림자의 군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에키드나의 힘으로 한층 더 강해졌다고 해도 별빛 마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인도 피하는데 부하들이 제대로 대응하는 걸 바라는 건 사치였다.

유피테르는 시야에서 몬스터를 싹 쓸어버린 뒤 물었다.

“네가 자랑하던 군세도 별거 아니군. 이제 열쇠를 줄 생각이 들었나? 지금이라면 목숨만큼은 살려서 보내주지. 찾아줬으니까 말이야.”

“설마아아아.”

에키드나를 태웠던 새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에키드나는 새에서 내린 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그림자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유피테르를 보았다.

“신의 딸이 그렇게 소중해에에?”

“바실리는 내 생명이다.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너도 티폰이 없다면…. 아니지, 이건 의미가 없는 말이었군.”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의 남편이었던 티폰의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마왕의 목숨을 뺏은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열쇠라아아아….”

에키드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공간을 열었다.

태초의 마족이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드넓은 아공간이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손을 집어넣었고 열쇠를 전부 꺼냈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경악했다.

‘세 개라고? 저번 싸움에서 하나를 부쉈잖아. 카르멘이 붙어있다고 해도 저걸 만들 수는 없어.’

유피테르는 에키드나가 한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의 한숨이 담긴 열쇠의 기운을 유피테르가 모를 리 없었다. 누구보다 민감한 마나 감지를 지녔으니까.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시선을 만끽하며 열쇠를 흔들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아아? 세 개가 되어서 신기한거야아아?”

“어째서지?”

“으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아아.”

“네가 부순 건 진짜 열쇠였다. 내가 틀릴 리 없어!”

“흐으응. 꽤나 자신감이 넘치네에.”

말은 그렇게 해도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힘을 인정하고, 또 좋아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따라다닐 리 없지 않은가.

에키드나는 세 개의 열쇠를 공중에 띄운 후, 말을 이었다.

“이건 말이지이….”

“….”

유피테르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마법에 대해 설명해주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약점을 알려주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으니까. 유피테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에키드나였다.

상식으로 재단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기대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열쇠에 대해서라면 유피테르보다 에키드나가 몇 발자국 앞서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껏 해왔던 일들이 단순한 헛고생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쓰는 거야아아아아!”

하지만, 에키드나는 나쁜 의미로 유피테르의 상식을 벗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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