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52화 (252/265)

칼리스토(2)

* * *

슈우우우!

에키드나가 주머니에 찔러준 아티팩트가 불길한 기운을 발했다.

마족의 마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탁하고, 사나웠다. 길길이 날뛰어서 잠재우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놀란 건 디오였다.

가볍게 던져 준 선물이 이런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마, 마나가 저러는 건 처음 봐.”

“단순한 소환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 않아?”

에냐와 엑시는 성격대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에냐는 상식선에서 감상을 내놓았고, 엑시는 눈에 불을 켜고 무슨 현상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아티팩트가 펼치는 기이한 현상이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이걸 참는다면 마도 공학자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티팩트가 그런 걸 신경 써줄 리 없었다.

제 갈 길을 가더니 최후에는 에키드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어머. 이건 또 재미있는 조합이네에에.”

에키드나는 소환되자마자 예의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워할 뿐이었다.

“왔나.”

유피테르 역시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동시에 은은한 마나가 오두막 안에 서리를 잔뜩 피워냈다.

에키드나는 그런 유피테르의 태도를 알면서도 무시했다.

“내 사랑이 있는 곳에 가는 건 당연하지이이.”

“여전하군.”

“그런데에에. 여기 조금 좁지 않아아?”

에키드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법을 완성했다.

파아아아아!

그녀의 발치에서 자라난 자그마한 그림자. 그건 순식간에 자라나 오두막을 단번에 삼켰다. 거대한 뱀이 개구리를 꿀꺽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단 몇 초 만에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버렸다.

오두막이 있던 곳은 나무 하나 없는 광활한 평지였다.

덩그러니 놓여있던 건물마저 사라지자, 폐허가 된 도시처럼 음산했다.

“고, 공간 이동?”

“아니. 좀 달라 보여. 주위를 봐. 오두막만 사라진 거잖아.”

“이게 태초의 마족이 사용하는 그림자 마법이야? 생각보다 무서운데.”

에냐가 호들갑을 떨자 디오가 담담하게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이번에도 엑시는 남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마도 공학자의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키드나는 완전히 뒤바뀐 풍경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으음. 한결 낫네에에.”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군. 죽여달라고 이곳에 온 건가?”

유피테르는 천덕스럽게 웃는 에키드나를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4번째 열쇠를 빼앗아 한 방 먹여줬어도 여전히 그가 더 불리했다. 하나가 부서졌다고 해도 에키드나에게는 2개가 남아있었으니까.

“역시 당신의 모든 걸 갖고 싶어어어.”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어떤 거어어?”

난생처음 받아보는 유피테르의 관심에 에키드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열쇠 하나를 부순 목적이 뭐지. 그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았나.”

“고작 그거야아아?”

필요 없는 부분을 전부 쳐낸 날이 선 말에 김이 팍 식어버렸다. 적어도, 자신과 관련된 걸 물어볼 줄 알았기에.

에키드나는 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알고 싶어어?”

에키드나의 말과 행동에는 색기가 묻어져 나왔다. 계산되지 않고 자연스러워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뛰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의 자리는 한 톨도 없었다.

“순순히 말해줄 리 없을 테지.”

“누구보다 날 잘 안다니까아아. 알고 싶으면….”

두 사람만의 공간이 형성되는 분위기가 되자 엑시가 짜증을 냈다.

“잠까아아아아아안!”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엑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 에키드나를 불러왔어. 그러니 4번째 열쇠부터 건네주는 게 맞지 않아?”

유피테르와의 협상 조건은 이미 만족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약속을 지킬 때였다.

받은 게 있으면 그만큼 선물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니었던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하군”

“그게 뭔 개소리야!”

유피테르의 말에 엑시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에키드나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디오 언니가 불러왔고. 그럼 이야기 끝. 틀려?”

울부짖는 듯한 엑시의 말에 유피테르가 입을 열었다.

“틀리지 않았다.”

“그럼 빨리….”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열쇠를 주겠다고는 말한 적 없다.”

콰가아아앙!

엑시의 마음속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그랬다.

유피테르는 얄밉게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젠장,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이런 실험을 싫다고.’

미친 듯이 계획을 세울 때는 좋았다. 딱히 구멍이 보이지도 않았고, 디오 언니도 괜찮다고 해줬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이 되자 하나도 맞물려 돌아가지 않았다.

상정했던 것보다 변수가 움직이는 게 더욱 빨랐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왜 그러지? 전장에서 그렇게 멍하게 있으면 죽는다고 배웠을 텐데.”

“당신에게 배운 건 하나도 없어! 그렇게 뻗대지 말라고.”

유피테르의 말에 엑시는 상처받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배신자들의 리더였다. 유피테르를 진정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내 사랑. 나를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를 보는 건 싫어어어. 아무리 부하라고 해도오.”

이번에는 에키드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어도 유피테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참는 건 어려웠다.

에키드나가 끼어들자 엑시의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어쩌다 보니 부하처럼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계약에 매인 관계였다. 누구도 위에 있을 수 없는 평등한 관계라는 말이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방향이 굳어졌다. 이걸 에키드나에게도 똑똑히 알려주고 싶어졌다.

“에키드나,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너의 부하가 아니라….”

엑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바로, 유피테르와 에키드나였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지.”

“여긴 네가 낄 곳이 아니야아아아.”

유피테르는 푸른 마나를 뿜어내며 엑시의 왼쪽을 장악했고, 에키드나는 검은 마나로 오른쪽을 지배했다.

열쇠를 사이에 둔 적이었으나 이럴 때는 또 마음에 맞았다.

“…그, 그만해.”

얼음 마법과 그림자 마법 사이에 낀 엑시는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이, 이게 살기라고?’

엑시는 마도 공학자였다. 그래서 전방에 나서지 않고 늘 후방에서 칼리스토들을 지원했다.

마도 공학의 산물을 이용하면 전투에 참여하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자매들은 적재적소라는 말과 함께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리더가 초월자들 사이에 갇혀버리자 디오가 에냐에게 소리쳤다.

“에냐!”

“알고 있어.”

에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직였다.

에냐 식 바람 마법 – 순풍(淳風)

그녀는 일직선을 그리며 엑시에게로 날아갔다. 동체시력을 가뿐히 뛰어넘는 속도였다.

자신의 마법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속도가 최대 장기인 마법답게 목표에 닿는 건 빨랐다. 손만 뻗으면 엑시를 구할 수 있었다.

꼴깍.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래도 긴장감에 타는 목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집중하자.’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었다.

신의 반려자인 유피테르 마왕비였던 에키드나. 누구 하나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에키드나는 최고로 집중력을 발휘해 빈틈을 찾았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 실수를 알아채려면 같은 경지에 있어야만 하는 게 문제였을 뿐.

‘공격할 생각이… 없잖아?’

가까운 거리임에도 유피테르와 에키드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엑시는 고민에 빠졌다.

한 걸음.

단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엑시와 함께 도망칠 수 있었다. 저 두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따라붙을 리 만무했다.

바람 마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졌으니까. 하지만, 둘이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틈을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선택을 잘못하면 죽을지도 몰랐다. 바실리 님을 다시 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건 사양이었다.

그 순간.

홀린 듯 유피테르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그를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어?’

그냥 가라.

착각이 아니라면 유피테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냐는 그와 함께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었다. 파르니소스 산 정상에서의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눈을 잘못 읽을 리는 없었다.

더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에냐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참을 달리던 에냐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엑시의 얼굴이 보였다.

구해냈다는 확신이 들어도 그녀는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저곳은 곧 범접할 수 없는 전장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또, 저 멀리서 디오 언니도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나았다.

* * *

“가버렸네에에?”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칼리스토들이 전부 사라지자 에키드나와 유피테르는 마나를 거두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예정이긴 했지.’

에키드나를 데려오라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유피테르는 이 그림을 그렸었다.

칼리스토는 마족들보다 훨씬 강했다. 신의 딸이 선택한 자들이었으니까.

마족 공작들과도 싸울 수 있었으나, 공작 무기를 꺼내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봉인을 해제하면 상대할만했지만, 그렇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또, 에키드나의 존재도 문제였다.

시트시거는 단순해서 상대해볼 수도 있었으나 에키드나는 달랐다. 그림자 마법은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피테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키드나와 너무 가까우면 정신적으로 힘들었기에. 애정이 담겼다고 해도 저 눈빛은 너무 무거웠다.

“왜 피해에에?”

“우리가 이렇게 가까울 사이는 아니지. 그것보다 내 질문에 대답하시지.”

“질무우운?”

“왜 열쇠를 부순 거지?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유피테르의 물음에 에키드나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내 사라아앙. 설마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유피테르는 놓친 게 있나 싶어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회상했다. 하지만, 딱히 의심되는 부분은 없었다. 에키드나의 행동은 그로서도 파악하기 어려웠으니까.

유피테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에키드나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모든 마법을 분석하는 힘도 쓸모가 없네에에. 바실리의 선택은 틀렸을지도오?”

화아아아악!

분노한 유피테르가 에키드나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마족 대공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재빨랐다.

“나를 욕하는 건 상관 없다. 하지만, 감히 네가 신의 딸을 모욕해?”

에키드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치, 생각해놓은 수가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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