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열쇠(2)
* * *
유피테르 일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후대야.”
“무슨 일이지. 선조님.”
“오흐트의 상태는 어떠하냐.”
“문제는 없는 듯한데, 일어나질 못하고 있어.”
“그러한가….”
트리아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오흐트가 잠든 방을 바라보았다.
유피테르가 만든 결계가 방을 든든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타로타로스를 맴도는 마나는 그녀에게 독이었으니까.
한참을 바라보던 트리아가 다시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테세라는 어디로 간 거냐?”
“주변 시찰 겸 자기 부하들 관리하러 갔어. 마족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지도 모르니까.”
“에키드나라면 이미 알았을 가능성이 큰데. 원래 그런 마족이지 않으냐.”
“그건 테세라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유피테르가 칼리스토들의 마스터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지는 않았다. 설령, 신의 딸이 만든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그때, 테세라가 호수 밑 거점으로 돌아왔다.
“마스터. 트리아 언니. 나왔어. 오흐트는 좀 어때?”
“어서 와라. 좀 늦었군.”
“여전히 그대로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지.”
유피테르와 트리아는 테세라의 귀환을 반기며 소파에 자리를 내주었다.
“역시 가족이 최고네!”
테세라는 고마움을 표시한 뒤, 자리에 탁 앉았다. 부들부들한 촉감이 최고였다.
그녀가 앉자마자 유피테르는 아공간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내며 물었다.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나? 공작급이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될 텐데.”
“아. 그거 솔직히 상관없어. 내 부하들은 알아서 움직이니까.”
“그런가?”
“응. 에키드나 님도 그런 스타일이야. 시트시거 님이 오히려 특별한 경우인걸?”
마족 공작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마족들은 본능적으로 싸움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힘을 숭배하기도 했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위치에 있는 자에게는 차마 덤빌 마음을 먹지 못했다.
태초의 마족이 아니더라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테세라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찻잔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유피테르의 차 맛에 홀딱 빠져버렸기에.
쪼르르륵―
유피테르는 조심스럽게 차를 따라주었고, 테세라는 채워지자마자 찻잔을 비워버렸다.
“역시, 마스터의 차 맛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트리아는 놀란 눈을 했다.
“그거 뜨거운 차 아니니?”
“언니도 참. 난 마족이라고 이 정도로 혀가 아프거나 하진 않아.”
“그, 그렇구나.”
아르테미스 출신답게 표정 변화가 많지 않았던 트리아. 그러나 정체를 밝힌 이후 작은 미소를 짓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이런 식이었어. 그러니까 아직, 에키드다 님은 내 배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 같아.”
“무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에키드나는 남들과는 다른 관점을 지녔지. 티폰이 살아있을 때도 비슷했다. 이 거점도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을 거다.”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향후 계획을 세워나갔다.
“후대야. 테세라의 말을 들어보니 네 말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듯한데.”
“맞아. 마스터의 말 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만큼 저쪽도 4번째 열쇠를 원하잖아.”
지금의 유피테르 일행은 에키드나의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새로운 세계의 신.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진심으로 노리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던 유피테르가 말했다.
“에키드나의 생각을 읽으려고 하는 게 잘못된 거야. 그리고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어.”
“그쪽엔 카르멘도 있으니까 말이지.”
아르테미스 가문을 잘 알고 있는 트리아도 힘을 보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테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니의 말을 곱씹었다.
그것에 집중한 나머지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음…?’
유피테르의 섬세한 마나 감지는 미약한 진동을 바로 잡아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혹시나 싶었던 유피테르는 두 사람 몰래 성국의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우웅!
아티팩트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전해주었던 정보들이 모두 진실이 되자,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테세라가 그의 편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 태도가 너무 답답했다.
어쩔 수 없이 유피테르는 직접 관련 화제를 꺼냈다.
“테세라.”
“…?”
“아까부터 다리를 떨던데. 혹시 제대로 말하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었나.”
딱 걸렸다는 표정을 지은 테세라에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른 해. 그런 걸로 화를 내진 않는다.”
이미 배신의 아픔을 겪은 유피테르는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 가감 없이 사실을 이야기해줘야만 앞으로 걸어갈 길을 정하는 게 가능했다.
유피테르의 부드러운 협박에 테세라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게… 손님이 있어.”
“손님?”
“응. 마스터를 만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더라고.”
손님이라는 말에 유피테르는 머릿속에 치유사를 떠올렸다 지웠다.
마족에게 치유라는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녀와는 상극이었으니까.
오흐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존재는 창조신 레아, 한 명뿐이었다.
“그 손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 * *
한편, 타르타로스에는 3번째 세력이 몸을 웅크린 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키드나… 대체 뭐 하는 마족이야? 마스터가 된 것처럼 명령이나 내리고”
에냐의 투덜거림에 답한 건 마도 공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엑시였다.
“살아 돌아왔으니 된 거야. 디오 언니는?”
“저기 오네.”
공간 이동의 빛을 흩뿌리며 도착한 디오. 타르타로스임에도 거리낌 없이 활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사였다.
엑시는 그런 디오에게 물었다.
“자매들을 설득하는 건 성공 했어?”
“전혀. 여기 왔을 때 그대로야.”
유피테르의 추측과는 달리 자매 전부가 그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2의 디오
5의 펜데
6의 엑시
7의 에프타
8의 에냐
이렇게 5명이 에키드나와 손을 잡았다.
물론, 바실리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계약 위반으로 존재 자체가 소멸하였을 거였다.
‘유피테르. 당신의 방법으로는 너무 늦어. 바실리 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계실 거라고. 그걸 알고 있긴 한 거야?’
엑시는 유피테르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후, 자신의 의견에 찬동하는 자매들을 최대한 많이 모으려 노력했다. 이런 일은 수로 밀어붙이는 게 제일이었으니.
무기를 수리해주거나 할 때 은근히 말을 꺼내니 술술 넘어왔다. 마도 공학자로서 발견한 새로운 방법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고개를 젓는 이들이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네 사람은 끝까지 못 했네.’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첫째 에나스. 그리고 그 뒤를 단단히 받치는 정보 담당 트리아.
타르타로스 안에 있다는 테세라와 유피테르를 끔찍이 아끼는 오흐트까지.
엑시는 굳이 이들에게 말을 걸 생각이 없었다.
너무나도 위험했기에. 괜히 말을 꺼냈다가 계획만 탄로 날 수도 있었다.
아슬아슬한 길을 걷게 되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디오는 생각에 빠진 엑시를 현실로 끌어냈다.
“네가 펜데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정확히는 달라. 호문쿨루스지. 한없이 인간에 가깝지만,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는 생명체야.”
“그건 되었고, 에키드나는 뭐래?”
디오의 의문을 풀어준 건 에냐였다. 그녀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섭섭한 점을 쏟아냈다.
“마스터랑 만나보라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다시 만나면 우린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이 본심을 내면 우린 상대도 되지 않잖아.”
“진정해. 뭐라고 했는데 그래.”
속사포 같은 말에 디오는 두 손을 내밀며 에냐를 진정시켰다. 말속에 은근히 마나를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에냐는 순간적으로 놀라더니 주눅이 들어버렸다.
“…유피테르랑 만나서 교섭하래. 4번째 열쇠를 그쪽이 가지고 있다고.”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야. 4번째 열쇠를 거의 다 얻었다고 하지 않았어?”
디오가 분개하자 엑시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언니도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왜 너희들 쪽에 붙었는데. 그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랬다.
사실 디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엑시의 손을 잡지 않았었다.
자존심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바실리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지만, 수단이 이상했다.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해낸다면 바실리가 기뻐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상대가 상대야. 언니도 그건 알고 있잖아.”
에냐의 말에 디오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마스터. 아니, 유피테르라면 타르타로스에 돌입할 방법을 찾는 것도, 열쇠를 찾는 것도 쉽겠지.’
유피테르는 진심이 아니었다. 적어도, 디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천칭의 마도사라는 신분도, 아르테미스 가문의 대공자라는 신분도 제대로 사용하지를 않았다.
유피테르가 마음만 먹으면 세아니아 대륙을 샅샅이 뒤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원이 다른 속도로 열쇠의 단서를 얻고 찾아낼 수 있었을 거였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유피테르를 만나면 문전박대당할 게 눈에 선한데.”
“고민 중이야.”
대담한 선택을 한 엑시라고 해도 고민만 깊어질 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미래가 뒤바뀔 수 있는 문제였기에.
그 순간,
엑시가 신탁이라도 받은 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종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
마나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으니. 그녀의 마법은 그 정도로 마도 공학에 특화되어 있었다.
엑시가 미친 듯이 행동하자 에냐는 기겁하며 그녀를 말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디오의 손이 에냐의 손을 꽉 잡고 있었기에.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엑시는 늘 저런다고.”
“저, 저게?”
“넌 처음 볼지도 모르겠네. 엑시는 거의 연구실 안에만 있으니까.”
엑시의 행동은 10분 동안이나 지속되다가 끝이 났다. 이미 그 주변은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로 가득했다.
엑시는 공포에 질린 에냐와 그런 그녀를 지탱하는 디오를 향해 떠오른 생각을 설명했다.
“어차피 열쇠를 얻어야 바실리님도 구하잖아?”
“그, 그걸 누가 몰라. 근데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난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뭘 어렵게 생각해 테세라 언니를 이용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 * *
테세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유피테르는 회합 장소로 달려나갔다.
공간 이동이 훨씬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었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그곳에 어떤 함정이 도사릴지 몰랐으니.
사람을 한 번 배신하는 게 어렵지, 두 번째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죄책감도 덜하고 묘한 자기 합리화까지 곁들어지기에.
“여긴가?”
목적지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마나를 갈무리하고서 허름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