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의 계획(3)
* * *
카르멘은 ‘그날’을 떠올렸다.
유피테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에키드나가 카르멘을 찾아왔다.
“어라아아. 이런 시간까지 일하는 거야아아? 인간이란 참 귀찮네에에. 안 그래에?”
새벽 두 시.
모두가 잠이 들어 적막만이 감도는 시각. 집무실에 들어온 불청객은 제집인 양 집무실을 활보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라. 여긴 왜 왔지?”
갑작스레 등장한 협력자 때문에 카르멘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출입이 제한된 집무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위험한 선택이었으니까.
마족이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아직 일렀다. 적어도 10년 정도는 더 필요했다.
그러나 상대는 에키드나였다.
“흐응…?”
마왕 반려자의 귀에 고작 인간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설령, 닿았다고 해도 원래의 내용과는 달랐다.
“내가 못 올 곳에 왔어? 참 웃기다. 네 자리를 누가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해? 설마 자력으로 올라왔다는 진부한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이.”
“….”
카르멘은 에키드나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타고난 재능은 다른 자의 노력을 비웃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탐욕의 지팡이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디악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초대 가주의 비밀에 다가설 수 있던 것도 지팡이 덕이었다.
탁!
카르멘은 씨름하던 서류를 내려놓고서 에키드나에게 물었다.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어느 곳에도 그림자가 지기 마련이니.”
“잘 알고 있네에에.”
에키드나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판단한 카르멘은 곧바로 이유를 물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힘들었으니.
“용건이 뭐지? 신의 결계를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밖에 나오는 걸 꺼렸지 않나.”
“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를 찾았어어.”
예상치도 못한 말에 놀란 카르멘이 되물었다.
“뭐?”
“예언의 아이… 라고 하면 좀 오글거리지마아안. 어쨌든 찾았다구우.”
“누구지?”
“기다려어.”
딱!
에키드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쉬이익!
사방에서 그림자들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넘실거리는 그림자는 방 안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그림자 이동 마법인가….’
카르멘은 침착했다.
이 마법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에키드나와 계약한 이후, 세상을 상식으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림자의 기운이 옅어지자 카르멘은 눈을 떴다.
“여기는….”
카르멘은 무의식적으로 마나 감지를 펼쳤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교육 때문에 만들어진 습관이었다.
“아직도 얼음성이군. 수식 계산을 실수하기라도 했나?”
화려했던 마법과는 다르게 움직인 거리는 미미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얼음성 내부에 있었다.
“에이 설마아. 모두 다 예상대로야아아아.”
“헛소리. 내 가문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는 단 한 명뿐이다. 설마 그 아이라고 하진 않겠지.”
젊은 가주 카르멘은 가문의 대소사를 전부 꿰뚫고 있었다.
최근 태어난 어린아이라고 하면 유피테르밖에 없었다. 그와 똑 닮은 외모를 지녔기에 장래가 기대되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아이가 맞아아아.”
“제정신…!”
에키드나는 검지를 치켜세워 카르멘의 입가에 가져갔다.
“네가 진짜로 원했던 게 뭐지?”
평상시와는 달리 늘어지지 않는 말투. 180도 변한 분위기에 카르멘은 압도당했다.
“초대 가주를… 넘어서는 것.”
“그래. 그게 당신이 건 계약 조건이지.”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를 보는듯한 눈빛이 카르멘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인간을 넘어서길 원한다면 먼저, 아버지란 걸 그만둬야 할 거야.”
* * *
“인간을 저버리고 마족의 손을 잡다니….”
고유 결계 속에 갇혀버린 오흐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인간은 여신이 가장 사랑한 존재였다. 성녀의 존재가 이를 증명했다. 대륙 전쟁의 죄도 달게 받지 않지 않았는가.
특혜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카르멘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제약을 풀어야 하나?’
오흐트는 칼리스토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할 수 있었다.
신성 마나를 지녔기에 쓸 수 있는 편법이었다. ‘정화’는 신의 딸에게도 먹혀들었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후폭풍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마스터에게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마음을 굳힌 오흐트는 신성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캬아아악!
신과 닮은 힘을 느낀 타르타로스의 마나가 절망을 토해냈다.
오랫동안 신의 결계에 둘려 쌓여있었던 만큼 이곳의 마나는 신을 증오했다.
카르멘은 오흐트의 행동을 인지하고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소용없다. 이미 이곳은 나의 영역이니.”
고유 결계는 불합리했다.
완벽하게 펼쳐진 순간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게임이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초대 성녀이자 칼리스토의 일원인 오흐트는 달랐다. 미세한 틈을 끝끝내 찾아냈다.
그러기에 앞서 칼리스토의 봉인구를 깨트렸다.
타아아앙!
무형의 구속구를 부순 것뿐인데,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순수한 신성 마나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우우우우우웅!
오흐트의 주변에 마나 폭풍이 거세게 몰아쳤다.
그 여파로 고유 결계 속 마나의 주도권이 서서히 오흐트 쪽으로 넘어갔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상황에 카르멘이 물었다.
“어째서지?”
“인간의 마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거든. 보기보다는 허점이 많다구.”
오흐트는 빙긋 웃으며 마나를 쏘아냈다.
어떠한 수식도, 마법진도 심지어 시동어조차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마법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오흐트가 만든 작은 손짓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카르멘을 노렸다.
이변 속에서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고유 결계 속에서 마법을 쓴다고? 웃기지 마라!”
그 대신 맞불을 놓았다.
탕!
카르멘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치자, 검푸른 마나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멘 식 특제 마법 – 검은 뱀의 송곳니
그가 얻은 새로운 힘은 공간을 가르며 쭉쭉 나아갔다.
목적은 단 하나.
눈앞에 보이는 적을 물어뜯는 거였다.
서로 다른 두 마나가 충돌하려는 바로 그 순간, 던전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무슨 짓이야!”
“오히려 내가 할 말이다! 타르타로스에서 신성 마나를 쓰다니 돌아버린 거냐.”
오흐트나 카르멘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하지만, 이 둘의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흔들림이 멈춘 던전에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물건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열쇠잖아?”
“어, 어째서 4번째 열쇠가…. 이건 말도 안 돼!”
카르멘이 제물의 의식까지 동원해 갈구했던 열쇠는 자유롭게 공중을 유영했다.
마치, 꽃 주변을 노니는 나비 같았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두 사람은 행동도 달랐다.
오흐트가 열쇠 쪽으로 바로 몸을 날린 데 비해 카르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연구 결과가 틀렸다는 사실이 사슬처럼 몸을 억죄었기에.
‘잡았다!’
한발 먼저 움직인 오흐트가 열쇠를 손에 움켜쥐었다.
카르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실과 다르다는 건 충격이었으나, 계속 얽매여있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또, 눈으로는 계속 오흐트를 쫓고 있었다.
“어림없다!”
탕! 탕!
카르멘은 지팡이로 두 번 바닥을 내리쳤다.
공작만이 소유권을 허락받은 탐욕의 지팡이의 위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다양한 마법진을 그려내더니, 고유 결계 속을 마법진으로 메워버렸다.
쿠웨에엑!
마법진은 각기 다른 마법을 토해냈다. 문자 그대로 탐욕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공격이 빗발치는데도 오흐트는 웃었다.
“재밌네! 근데 이걸 어쩌나.”
칼리스토의 힘을 온전히 쓰는 오흐트에게 저런 공격은 식은 포션 먹기였다.
“정교하지 않은 공격은 안 쓰느니만 못하다고 어딘가의 누구 씨가 말하지 않았었나?”
“….”
그건 카르멘이 아르테미스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마족과 달리 인간의 마나 보유랑은 무한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분명히 한계가 존재했다.
부서질 것 같은 검을 들고 싸우는 검사들과 비슷했다.
“열쇠 정말 고마워! 그럼 잘 있어.”
카르멘이 고민하는 사이 오흐트는 공간 이동을 사용해서 빠져나갔다.
아드드드득!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카르멘.
그는 이를 악물며 고유 결계를 해제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던전 안을 뒤덮을 정도였다.
카르멘은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유피테르 일행에게 마지막 열쇠를 빼앗겼다는 걸 에키드나에게 전해야만 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훤해 정말로 움직이기 싫었다.
철벽의 카르멘이라고 해도 호불호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그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음?”
* * *
공간 이동을 사용한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곁에 도착했다.
친숙한 마나의 향기에 오흐트의 시선이 저절로 유피테르의 얼굴로 향했다.
“마스터어어어어어어!”
“무사했구나.”
유피테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오흐트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대략 알았다. 패스를 통해 그녀의 상태가 전해졌기에.
칼리스토의 힘을 강제로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혼내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위태로울 정도로 몰린 상황이라는 뜻이었으니.
오흐트를 제물의 의식으로 보낸 건 유피테르였다. 그녀가 다치면 반쯤 그의 잘못이었다.
“역시 내 동생이야!”
“후대의 말 따위 무시하고 바로 빠져나오지 뭘 하고 있던 거야. 걱정했다.”
테세라와 트리아 역시 오흐트의 곁으로 다가와 한마디씩 건넸다.
칼리스토 자매들이 무사 귀환을 축하하고 있을 무렵, 유피테르의 눈이 묘한 물건을 포착했다.
“오흐트. 손에 든 건 뭐지?”
마스터의 물음에 오흐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4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열쇠야. 이걸로 이제 비긴 거라고.”
“….”
유피테르가 말없이 손을 내밀자, 오흐트는 그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열쇠가 맞군.’
첫 번째 열쇠를 본 적이 있었다. 열쇠가 진짜라는 걸 알아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결 밝아진 유피테르의 표정을 보며 트리아가 물었다.
“후대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 하나의 열쇠로는 바실리 님을 구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게 무슨 말…. 아니, 언니 말이 맞네. 이제야 원점으로 돌아온 거잖아.”
언니의 말을 부정하려던 테세라는 결국 수긍했다.
자신이 가져온 정보로 열쇠를 얻은 건 정말이지 기뻤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상황은 그대로였다.
오흐트도 한마디 거들었다.
“열쇠 하나를 에키드나가 부숴버렸다며. 그럼 이제 어떡해? 바실리 님을 영영 볼 수 없는 거야?”
그 말에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마주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4번째 열쇠를 구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정작 열쇠를 손에 넣으니 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정보와 전략을 담당하던 트리아조차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유피테르가 입을 열었다.
“이 열쇠가 우리의 손에 들어왔다는 걸 에키드나도 알 테니. 앞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