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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41화 (241/265)
  • 마지막 열쇠(6)

    * * *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계가 유피테르를 환영하는 듯 문을 열어젖혔기에. 인식 방해 마법을 뚫은 이상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수 밑의 집은 꽤 컸다. 비밀 정원만큼 크지는 않아도 거점으로 삼기에 나쁘지 않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공간 왜곡 마법이라니. 밖에서도 그랬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전부 바실리의 계획이었던 건가….’

    유피테르는 신의 딸의 혜안에 감탄했다.

    공간 왜곡 마법은 고대 시대 유명했던 마법 중 하나였다. 귀족, 그 이상은 누구나 저택에 애용할 정도로.

    이곳의 마나에선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졌다.

    같은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술식의 세세함은 모두 달랐다.

    바실리가 의도한 길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마나를 숨겼어도, 패스는 여전히 작동했다.

    유피테르가 도착한 걸 확인한 오흐트와 트리아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야호! 드디어 왔구나. 마스터.”

    “후대여 조금 늦지 않았나?”

    “이렇게 숨어버리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찾기 쉽지 않다고.”

    유피테르는 작게 웃으며 인사를 받고 자매의 옆으로 이동했다.

    자매, 아니 호수 밑의 집은 꽤 묘한 분위기였다.

    마족 공작의 성에서의 흉흉한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편안하게 쇼파에 앉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유피테르는 이 불합리한 상황에 의문을 표했다.

    “그래서 이건 무슨 상황이지?”

    “드디어 왔구나, 마스터!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고.”

    놀랍게도 그의 말에 대답한 건 테세라였다.

    몸을 구속당한 상태도 아니었고, 다른 두 사람이 그녀를 감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배신하기 이전의 관계처럼.

    “거기는 눈이 아니라 목이 들어가야할 자리 같은데.”

    “아하하! 오흐트한테 지적받다니 이거 언니로서 실격이네. 어떡하지.”

    “솔직히 나잇값 못하는 건 맞잖아. 트리아 언니랑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걸 네 입으로 들으니까 더 짜증이 나는걸?”

    오흐트와 테세라는 정말 친자매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늘 다정한 게 아니라 때로는 투덕거리기도 하는 그런 달콤씁쓸함이 느껴졌다.

    유피테르는 굳이 테세라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그녀는 마족 공작이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둘의 마음을 얻어낸 거지?”

    “마스터. 설마 내가 이 둘을 회유했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지 않나.”

    “하아….”

    테세라는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유피테르에게 대답했다.

    “저기요. 오흐트는 몰라도 트리아 언니는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이거든요?”

    “맞아! 그게 트리아 언니의 매력이지.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옆에서 오흐트가 긍정했지만, 그런 게 테세라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유피테르가 진실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테세라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트리아 언니와 오흐트는 내 진솔한 마음을 들어준 것뿐이야.”

    “네가 교만의 마족 공작이라는 것도 이야기했나?”

    “당연하지!”

    테세라는 교만(superbia)을 담당하는 마족 공작이었다.

    칼리스토의 마스터였던 유피테르는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테세라에게 잠입 임무를 준 건 바실리였다.

    바실리는 혼혈 마족이라는 특성을 매우 높이 샀고, 마족 사회에 잠입해달라고 부탁했다.

    대륙 전쟁으로 벌을 받은 마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마족 공작의 자리까지 올라버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유피테르는 물론 바실리도 테세라가 이렇게 높게 올라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저 움직임 정도를 미리 알려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뿐.

    “응응, 속 시원하게 말해줬어. 근데….”

    “테세라가 말한 건 그게 다가 아니더군. 후대여 네가 좋아할 정보도 있었다.”

    트리아는 오흐트의 말을 중간에 끊고서 유피테르의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좋아할 정보라고?”

    “마지막 열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던데.”

    쿠웅!

    마지막 열쇠.

    그 단어가 트리아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유피테르의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얼음의 마나도 아닌 소멸을 담당하는 별빛 마나가 그의 몸에서 흘러넘쳤다.

    오흐트를 시작으로 테세라까지 움찔했다.

    분명히 머리로는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멸적인 마나에 몸이 떨렸다.

    “마스터. 마나 좀 줄여. 오흐트가 거, 겁을 먹었잖아.”

    “누, 누,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그렇게 덜덜 떨면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안 믿어줄걸. 저기 있는 트리아 언니를 봐. 여전히 여유롭잖아.”

    테세라의 말에 오흐트는 트리아를 쳐다보았다.

    트리아(3)라는 이름에 걸맞게 언니는 여느 때처럼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찻잔을 잡은 그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두 동생의 시선이 몰리자 트리아는 헛기침하고서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크흠흠. 후대야. 그렇게 화를 표출하면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늦어진단다?”

    유피테르의 성격을 그대로 꿰뚫은 한 방.

    “그렇군. 그 말이 맞아.”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온한 목소리의 효과는 대단했다.

    유피테르는 곧바로 마나를 갈무리하고서 테세라에게 물었다.

    “마지막 열쇠를 네가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바실리의 봉인을 해제할 열쇠가 4개라는 걸 창조신 레아는 말해주지 않았다.

    바실리가 신의 딸의 권능을 이용해 미래의 일부를 예지한 것에 불과했다.

    ‘에키드나가 이상한 거지.’

    사실, 제대로 된 단서조차 없었다.

    고대 아티팩트의 일부가 열쇠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얼음성에 열쇠가 있다는 것도 운이 좋아서 알게 된 거라고 바실리는 말했다.

    탁!

    어느새 자리를 떠난 오흐트가 유피테르의 자리에 차를 가져다주었다.

    마스터의 상태를 신경이라도 쓴 것인지, 허브티 중에서도 진정 효과가 있는 페퍼민트였다.

    “자, 이게 마스터 거야.”

    “고마워. 잘 마실게.”

    혀를 넘어 목 끝까지 박하 향으로 가득했다.

    차의 온기와 박하의 시원한 느낌에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서서히 풀어졌다.

    “그래, 네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먼저겠지.”

    “좋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 * *

    테세라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녀는 유피테르를 배신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얼마 되지 않은 그의 편이었다.

    칼리스토를 담당하던 첫째 언니, 에나스가 타르타로스에 나타났다.

    어떻게 결계를 뚫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마족 공작들도 틈을 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저, 그녀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수하들을 알아볼 순 없었다. 무려 에키드나 님과 관련된 일로 보였으니까.

    직접 알아본 결과, 첫째 언니가 칼리스토를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유피테르에게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패스를 사용하면 걸릴 게 분명하고, 다른 방식을 써도 에키드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으니.

    그래서 선택한 게 배신한 듯이 행동하며 최대한 정보를 빼 오는 거였다.

    “…이렇게 된 거야.”

    “고생했군.”

    그걸 본 오흐트가 유피테르에게 따졌다.

    “아니. 이게 그렇게 넘어갈 일이야? 테세라 언니는 목숨을 걸고서 정보를 가져온 거잖아. 마스터가 아무리 뛰어도 얻지 못했던 거라고.”

    “나는 괜찮아. 저 말만으로도 충분한걸.”

    테세라가 진정시켜도 오흐트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계속해서 실랑이가 이어지자, 트리아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쏘아붙였다.

    “오흐트 너도 테세라를 몰아붙였잖아.”

    “그건 그렇지만….”

    “네가 정말로 칼리스토의 일원이라면 마스터의 말을 의심하지 마라.”

    “트리아 언니도 마스터에게 막 대하잖아. 후대, 후대 거리면서!”

    할 말이 없던 오흐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대화의 소재를 바꿨다. 하지만, 트리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건 단순한 표현일 뿐이지, 난 마스터의 판단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그건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그건….”

    정론에 오흐트가 쩔쩔매자 트리아는 쐐기를 박았다.

    “평소 어리광을 받아주는 마스터께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가르치려 들어?”

    “그만.”

    분위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자 유피테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지막 열쇠가 이 타르타로스에 있는 건 확실해?”

    테세라의 말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신성 아티팩트는 그녀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고, 마법 역시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 세 명을 이끌고 에키드나를 포함한 마족들과 싸워야만 했다. 또, 에나스가 이끄는 칼리스토의 배신자들과 맞붙을지도 몰랐다.

    이 모든 방해를 뚫고 나가야만 바실리를 구할 수 있었다.

    “에키드나 님이 그랬어. 열쇠들은 서로 공명한다고.”

    “난 그런 거 느끼지 못했는데.”

    “거기까지는 나도 몰라. 그냥 에키드나 님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는 거니까.”

    유피테르는 차를 한 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타르타로스의 지도는 있나?”

    “미리 준비해 놨지.”

    테세라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모든 불빛들이 꺼지며 숨을 죽였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테세라의 마나가 이리저리 뻗어져 나가며 지도를 그렸다.

    “이게 타르타로스의 지도야. 마스터는 와봤으니까 알고 있지 않아?”

    “대충은.”

    바실리와 함께 몇 번이고 이곳에 드나들긴 했다.

    하지만, 마왕이 죽은 후에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으나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건 기본이었다. 트리아나 오흐트에게도 지리 정보는 필요했다.

    “트리아, 오흐트.”

    “뭐지 후대야. 할 말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말을 해보아라.”

    “우응…. 왜?”

    트리아와 오흐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트리아는 여느 때와 같이 여유로웠으나, 오흐트는 방금 전 있던 일을 떨쳐버리지 못한 듯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유피테르는 오흐트에게 물었다.

    “오흐트. 바실리를 꼭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겠지?”

    “죽는 한이 있어도 바실리 님을 구하고 죽을 거야.”

    오흐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동자는 강인하게 빛났다. 앙다문 입은 그녀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면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마. 마족이 두려워하는 네 힘이 꼭 필요하니까.”

    “역시? 역시 그렇지?”

    유피테르의 칭찬에 오흐트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유피테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본 후 다음 사람을 찾았다.

    “네게 주어진 정보 중에서는 타르타로스에 대한 것들도 있었지 않아?”

    “확실히 그랬지. 하지만, 후대야.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걸 너도 알고 있는 듯 보이는데.”

    “선조 님은 대단하네. 하고 싶은 말을 늘 한발 먼저 해준단 말이지. 기다렸지 테세라. 드디어 네 차례야.”

    유피테르는 어깨를 으쓱한 뒤, 테세라에게 타르타로스와 열쇠가 있을 곳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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