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40화 (240/265)

마지막 열쇠(5)

* * *

“추억을 이용한다고?”

“그래에!”

에키드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의 딸을 시험해보기 위해 신이 직접 만든 열쇠야. 설마, 그런 걸 모르지는 않겠지이?”

“당연하지.”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에. 이건 어디까지나 시험이자 벌이야.”

“뭐?”

유피테르는 굳이 되물었다.

시험과 벌.

에키드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바실리가 봉인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유피테르의 잘못이었으니까.

불온한 싹을 미리 잘라내려고 했다면 마무리도 완벽해야만 했다.

신의 눈을 피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지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지만.

빙빙 돌려 말하는 듯한 에키드나의 태도에 유피테르가 물었다.

“그게 추억과 무슨 상관이지.”

“생각보다 머리가 좋지 않은 걸까아? 내 사랑은.”

“웃지 말고 빨리 대답해!”

조급해지는 마음에 유피테르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두 번의 공격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건 분명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얻은 건 없었다.

찾고 있던 열쇠는 모두 에키드나가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파괴되기까지 했다.

해결한 사건은 많은데, 그의 손에 들어온 건 허울로 가득 찬 명성뿐이었다.

에키드나는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분노한 유피테르를 보면서도 밀리지 않았고 별빛 마나에 겁을 먹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을 뿐.

“근데에 이거 내 손해인 거 같아아. 내 사랑도 그렇게 생각하지?”

“상황이 네 손아귀에 있는데 그게 뭔 헛소리야.”

“그치마아아안. 열쇠도 보여줬고, 정보도 줬는데. 내 사랑은 협박만 계속하잖아아아.”

에키드나의 말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부른 적 없는데 찾아온 것도, 먼저 공격한 것도, 도발을 한 것도 모두 그녀였다.

심리 트릭을 사용해서 정보를 빼내긴 했으나, 고작 그걸 협박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유피테르는 솟구쳐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참아내고서 입을 열었다.

“웃기는군. 날 찾아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나.”

“당연하지이. 내 사랑을 가장 잘 아는 건 나인 거어얼.”

“역시 그랬군.”

유피테르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에키드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재미없다아아. 왜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어?”

“…?”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방향은 유피테르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이지?’

지금까지 에키드나는 맹목적으로 그를 따랐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유피테르도 그저 힘을 숭상하는 마족의 습성이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에게로 다가와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 사랑은 말이지이…. 정말 신처럼 멋졌어.”

“신처럼?”

신과 같다는 말은 마족에게 있어서 대단한 모욕이었다.

과거에는 어머니를 모셨지만, 대륙 전쟁 이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으니.

그런 유피테르의 마음도 모르는지 에키드나는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사랑은 재미가 없어. 그냥 평범한 인간 같아아아.”

“난 처음부터 인간이었다만.”

“평범한 인간이 마왕을 갖고 놀 수 있어어?”

“그럴 생각은 없었다.”

탁!

빙글빙글 돌던 에키드나가 발을 멈추더니 그대로 얼굴을 유피테르에게 갖다 댔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듯한 연인에게만 허락된 거리.

그러나 두 사람의 눈동자에선 긴장감만이 숨 쉬었다.

“지금의 당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이야아. 잘 있어, 내 사랑.”

그 말만을 남기고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거기, 서!”

유피테르는 에키드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애석하게도 허공만을 갈랐다.

“하하하하….”

유피테르는 허무하게 웃었다.

“완전히 에키드나에게 놀아났군.”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키드나가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건 직접 겪었다. 하지만, 이렇게 선두를 빼앗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 이상 유피테르는 에키드나와 라이벌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간절하게 뒤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쿵! 쿵! 쿵! 쿵!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공감해주기라도 하듯, 마족 공작의 성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유피테르는 그 광경을 눈에 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 *

“오흐트. 어디 갈 만한 곳 있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도 타르타로스 안쪽으로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고.”

“…읍읍읍.”

테세라를 데리고 성에서 탈출한 트리아와 오흐트.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그럴듯한 거점 하나 없어 발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타르타로스와 연이 없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후대는 여전히 에키드나와 전투 중이로군.”

“저걸 전투라고 할 수 있어? 마스터가 되게 봐주고 있는 거잖아. 마음만 먹으면 그냥 슥―삭일 텐데.”

“뭐, 후대는 후대 나름의 고민이 있는 거겠지. 바실리 님을 깨울 열쇠도 가지고 있었잖아.”

“아, 그랬지.”

“…읍읍읍.”

이도 저도 못 하는 애매한 상황에서 오흐트가 의견을 냈다.

“트리아 언니.”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테세라 언, 아니지. 배신자 씨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 데 어때?”

“읍읍읍읍!”

오흐트의 말에 테세라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몸을 맘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젠장, 젠장! 왜 공작인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타르타로스는 그녀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몸속에 신성 마나가 있는 상황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늘 자신을 따라주던 마나가 싸늘히 등을 돌리는 건 너무나도 쓰라린 아픔이었다.

‘게다가 저 여자가 있잖아.’

트리아의 존재도 문제였다.

오흐트가 성녀라고 해도 타르타로스에서는 싸워볼 만했다. 서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성격이 나쁜 트리아는 이길 수도 없었고,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트리아는 오흐트와 테세라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

열쇠를 얻는 게 목적인 이상 타르타로스에도 거점은 필요했다.

유피테르나 칼리스토와 같은 초월자들에게도 휴식은 중요했으니까.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일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좋아. 테세라를 풀어줘.”

“라져!”

오흐트는 테세라에게로 다가가 마법을 해제했다. 물론, 전부 풀어 준 게 아니라 대화할 수 있게만 했다.

오흐트에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작은 자유를 얻은 테세라는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일단 이야기라도 할 수 있다는 걸로 만족스러웠다.

“야호오오오!”

“오흐트. 쟤 입 다시 막아.”

“응!”

오흐트는 충실히 트리아의 명령에 따랐다.

서열도 중요하긴 했지만, 트리아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유피테르의 사람 보는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했다.

발언권을 빼앗긴 테세라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자매를 쳐다보았다.

“…읍읍읍.”

“언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

오흐트의 제안에 트리아가 테세라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조용히 할 거지?”

“읍읍읍읍!”

테세라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걸 본 트리아는 오흐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 고마워 오흐트.”

“도움이 되지 않을 정보라면 다시 입을 막아버릴 거니까!”

착하기만 하던 동생이 본모습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고마움을 표하던 테세라는 황급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내가 준비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그런 말을 해도 구속을 풀어주지는 않을 거야. 혼혈 마족을 뭘 믿고?”

“이게, 언니한테 못 하는 말이 없….”

“….”

테세라는 기어오르는 여동생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흐트의 뒤에 서있는 트리아를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무서웠다.

자그마한 행복을 뺏기고 싶지 않았던 테세라는 곧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준비한 거처가 있어. 마족들도 모르는 곳이니까 그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 * *

공작 성을 빠져나온 유피테르는 케팔로스를 향해 자매들의 뒤를 쫓았다.

마음 같아서는 에키드나를 찾아 단번에 결판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조급해지면 조급해질수록 허점을 드러낼 뿐이었다. 에키드나가 상대라면 그런 약점을 보여주는 건 위험했다.

지금은 뒤처졌다는 걸 진심으로 인정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몇십 분 동안 마나 감지를 따라가니 한 호수가 길을 가로막았다.

타르타로스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호수였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환수인 유니콘이 물을 마시러 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맑은 호수라니. 물을 정화하는 아티팩트라도 있는 건가.”

타르타로스는 마족의 마나로 가득했다.

마족의 마나는 원체 공격적이었다. 게다가 신의 결계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마나의 농도가 짙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르타로스의 몬스터들은 기괴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바다나 호수, 나무와 같은 자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이동했다.

“여기서 마나의 반응이 끊겼나.”

마나의 잔향은 정확히 호수 바로 앞쪽에서 끊어져 있었다. 마치, 물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속에 숨겨라… 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로군.”

유피테르는 몸을 딱 맞는 크기의 결계를 만들고서는 망설이지도 않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속은 깨끗했다.

“캬오오오!”

“키에에에에엑!”

물속을 지배하는 몬스터들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유피테르를 노렸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결계조차 뚫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어버렸다. 몇 마리가 비명횡사하자 다른 몬스터들은 두려워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마족조차 두려워하는 유피테르였다. 고작 몬스터들의 공격이 통하는 게 더 이상했다.

몬스터들의 방해도 없었고 결계 덕에 호흡도 가능했다. 유피테르는 느긋이 케팔로스를 사용해 자매들을 찾았다.

그러기도 잠시 세 사람의 마나가 확실히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호수 속에 있을 리 없는 자그마한 집이었다.

“다중 인식 저해 마법이라. 마족이라도 찾기 쉽지 않은 수준이잖아.”

호수 자체도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데, 집에도 여러 겹의 마법들이 걸려 있었다. 칼리스토 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꽤 공들인 게 티가 났다.

저택의 마법을 분석하던 유피테르의 눈이 빛났다.

“바실리의 마법까지 있다고?”

저택을 보호하는 마법 중에는 바실리의 것도 있었다. 그녀의 마법은 애초부터 다른 이가 사용할 수 없었다. 평범한 육체가 견뎌낼 수 있는 출력이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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