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39화 (239/265)

마지막 열쇠(4)

* * *

유피테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바실리가 이곳에 나타날 리는 없어. 분명 에키드나가 깔아둔 함정이겠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바실리가 본인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하지만, 유피테르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고 있었다. 소리가 귓가를 때릴 정도로.

오랜만에 본 그녀는 여전했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봄이 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따듯했다.

설령, 진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유피테르가 우두커니 서 있자 바실가 천천히 다가왔다.

“또 얼음성에서의 일이 떠오른 거야? 내가 왔는데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이리와 안아줄게.”

“…바실리.”

기억과 단 하나도 다르지 않은 바실리의 모습에 유피테르는 목이 메 울먹였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실리는 그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무한히 퍼부어주었다.

얼음성에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한 울림. 당시의 유피테르에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안락함이었다.

추억에 젖은 유피테르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바실리가 유피테르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넌 울보구나.”

“네 앞에서 만이야. 알고 있잖아?”

“이런 모습의 유피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

유피테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겨를조차 없이 이 순간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그녀를 만나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게 꿈이라도, 함정이라도 좋았다. 바실리의 모습은 기억과 완벽하게 일치했고,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바실리가 등을 톡톡 치며 유피테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억해?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물론이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유피테르는 그 말을 토대로 바실리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유피테르가 바실리를 만난 건 다름 아닌 파르테논 아카데미로 떠났던 시기였다.

리투아 제국 공작 가문들 중 수위를 뺏기지 않는 아르테미스.

달의 가문은 이런 타이틀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작별 인사조차 해주지 않았다.

희대의 천재로 각광받던 카테리나는 하나뿐인 오라버니를 격려하고 싶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체면을 차릴 정도로만 준비해라.”

차갑디차가운 얼음성에서 카르멘의 말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사랑받는 카테리나라고 해도 그 명령에는 감히 대들 생각조차 못 했다.

유피테르를 태운 마차는 쓸쓸히 얼음성을 떠났다.

파르테논 아카데미로 가는 사이 용병들은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저기 타고 있는 게 그 저주받은 그 대공자야?”

“아하이. 쓰읍! 입 조심하라고.”

“왜 그래, 뭔데?”

“저기 보이는 마법사님들 보여?”

“보이지.”

“저분들이 바로 그 마법사단들이라고! 말 조심 안 하면 그 자리에서 뎅겅이야.”

“아이고 세상에!”

오히려 용병들이기에 소문에 더 밝았고, 없는 소문을 더 만들거나 키우기까지 했다.

파르테논 아카데미가 리투아 제국에 있다는 걸 고려해도, 호위 병력이 지나치게 부실했다.

양적으로도 적었지만, 질적으로도 용병이 더 많았다. 어딘가 뒤틀린 구조인 게 분명했다.

마법사단 역시 할 말은 충분했다.

“저, 선배님.”

“뭐냐?”

“저 용병들 입을 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기는 소리 마라. 우리는 귀족이긴 하지만, 사실 저들과 다를 바가 없어. 게다가 이미 다 윗선에서 이야기된 거다.”

마법사단 선배의 말대로였다.

아르테미스 가문이 자랑하는 마법사단의 모습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 와 있는 건 실전 경험이 있어야 하는 신입들과 은퇴를 앞둔 자들 뿐이었다.

유피테르만 참으면 그리 고되지 않은 여정의 연속이었다.

호위가 약하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귀족 기준일 뿐, 개개인의 무력은 꽤 봐줄 만했다.

길을 가로막았던 몬스터들은 마법 한 방에 길을 터주었다.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들은 어느 상황에도 쓸만했고, 용병들도 돈을 거저로 받지는 않았기에.

그러나 사건은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벌어졌다.

“뭐, 뭐야 저게?”

“미노타우르스라고?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미궁에나 박혀있는 놈들 아냐?”

“당장 마법사단 어르신들 깨워. 우리만으론 역부족이다. 씨X.”

미노타우르스를 주축으로 한 몬스터 군단이 마차를 습격했다.

그들은 용병이었다. 당연히 누울 자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챘다. 화력 부족을 단번에 깨닫고 마법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슨 일인…. 저놈이 왜 여기에!”

“서, 선배님.”

“어느 때라도 우린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들이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내 지휘대로 움직여라.”

그러나 정예가 빠진 마법사단이 딱히 해결책이 될 리 없었다.

노마법사의 간결한 지휘 아래 단결되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여긴 그냥 조용하고 한적한 호수잖아! 이게 말이 돼?”

“이길 수가 없어. 이길 수가 없다고. 저 검은색은 뭔데. 마왕이 만든 군대라도 된대?”

“아니 씨X. 마법사단 놈들도 다를 게 없잖아.”

“어쩐지 이번엔 돈을 넉넉히 주더라니….”

용병들과 마법사단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멸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몬스터가 상대였기에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 바실리가 나타났다.

“너희들은….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흔든 바실리는 압도적인 힘으로 몬스터를 지워버렸다.

해치우거나 맞서 싸운다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후, 바실리는 혼자 살아남은 유피테르를 데리고 그 공간에서 사라졌다.

이게 ‘그날’의 진실이었다.

* * *

‘이 모든 게 카르멘의 계획이었을 줄은 몰랐지.’

유피테르는 단 한 문장으로 과거를 축약했다.

마차를 습격한 건 다름 아닌 에키드나의 그림자 군단이었다.

처음에는 신의 축복을 받은 그를 제거하려고 마족이 나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고장 난 시계였다.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결과만 찍어서 맞춘 거였다.

에키드나를 움직인 건 무려 그의 아버지인 카르멘이었으니까. 달의 몰락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유피테르?”

유피테르를 현실로 잡아끈 건 다름 아닌 바실리의 말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네 머릿속은 나로만 가득하다고 했었잖아.”

“여전히 난 너의 것이야.”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

그러나 상대가 바실리라면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목숨을 구해준 걸로도 모자라 사랑과 힘까지 준 은인이었으니까.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사람이었다.

“어제처럼 달콤한 말을 해주지는 않을 거니?”

어제.

그 한마디가 유피테르의 가슴을 지독하게 후벼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실리는 여전히 신의 벌을 받는 중이야. 게다가….’

저렇게 자기만을 생각하지는 않아.

유피테르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바실리는 신의 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먼저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는, 유피테르에게 뭘 더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니.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유피테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실리.”

“왜 그렇게 진지해.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어?”

“꼭, 구하러 갈 테니까. 기다려.”

유피테르는 눈물을 머금고 얼음 창을 만들었다.

얼음의 마나가 아닌 별빛 마나를 잔뜩 품은 창이었다. 바실리의 뒤편에서 만들어진 창은 그대로 날아가 몸을 관통했다.

질끈!

유피테르는 차마 그 광경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 환상이라고 해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기에.

“이게 무슨….”

눈을 감아도 소리는 생생히 들렸다.

다른 이보다 마나 감지가 뛰어난 유피테르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아파하는 광경이 똑똑히 그려졌다.

바실리를 잃는 경험은 봉인되었을 때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이상은 사양이었다.

잠시 후.

바실리처럼 행동하던 자의 마나가 서서히 약해지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마나 감지를 믿은 유피테르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격이 먹혀든 건지 바실리를 흉내를 내던 존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허무함과 쓸쓸함은 어느새 증오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오갈 데 없이 모여든 증오는 금세 분노의 먹이가 되었다.

유피테르가 텅 빈 공간에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갈 길은 하나였지. 안 그래?”

신의 딸의 반려자이자 별빛 마나를 지닌 유피테르가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를 되찾기 위해 무리하지 마. 만약 그러면 화낼 거니까.

바로 바실리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바실리는 유피테르를 발견하고, 진정한 힘을 각성시키게 도와주었다. 따라서 이 은발의 마법사가 마음만 먹으면 3차 대륙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녀가 옆에 있을 때는 그걸 막아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평상시의 유피테르는 이런 함정 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화가 나서 조금 더 강한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렇게 분노를 무작정 쏟아내지는 않았다.

가진 힘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마왕 티폰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마족에게 크나큰 아픔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마족을 상대할 때에도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지는 않았다.

‘인간’ 유피테르로서 싸웠고 ‘대행자’ 유피테르의 힘은 최대한 아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안 그래, 에키드나?”

유피테르는 별빛 마나를 끌어모았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주변 광경이 흔들렸다. 마나로 만든 결계였기에 소멸의 마나를 견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쪄저적!

유피테르의 손에 있던 반지가 출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바실리 컬렉션 중 일부였으나, ‘소멸’이라는 마나의 속성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인 게 보였다.

“미안해. 약속, 지키지 못할 거 같아.”

유피테르는 가루가 되어버린 아티팩트를 얼려, 아공간 한 편에 고이 보관했다.

그 순간, 귓가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언제라도 너의 편이야.”

적이 남아있나 싶었던 유피테르는 황급히 마나 감지를 사용했다. 사막처럼 거대한 허허벌판이었지만, 케팔로스는 완벽하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결계 속에서 유피테르는 철저히 혼자였다.

“여기서 끝을 보자고.”

유피테르 식 반 마법 ― 소멸

유피테르가 시동어를 끝내자마자 결계에서 마나가 사라졌다.

마나는 세계를 구성하는 신의 뜻 그 자체였다.

마나라는 근원을 잃자 작은 세계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무너져내렸다. 어렵게 만든 결계였으나, 없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거짓된 세계가 사라진 후.

유피테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의 에키드나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았나 봐?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은데.”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야아아?”

“고작 이런 결계로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자 에키드나는 소리를 지르며 설명했다.

“그 결계는 네가 가진 추억 그 자체라구. 칼리스토들 조차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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