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열쇠(3)
* * *
바실레이아.
창조신 레아가 낳은 하나뿐인 딸.
물론, 이 표현이 정확한 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레아가 세계를 낳은 것이니까.
대륙과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은 모두 레아의 자식들이었다.
레아를 믿는 자들은 빛나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조차 창조신의 업적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바실리는 다르지.’
바실리는 특별했다.
창조신 레아에게 권한과 힘을 위임받았기에. 또, 신의 딸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바실리는 그 힘을 가지고 세계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다.
두 번의 대륙 전쟁을 막아내지 못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뜻이었다.
레아는 아이들의 자유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유피테르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에키드나가 열쇠를 가지고 수상한 짓거리를 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고작 마족 주제에 신의 딸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다니?”
“뭐, 어때에에.”
“이게 정말로….”
“곧 내 자리가 될 텐데에.”
에키드나의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며 열쇠가 산산이 부서졌다.
열쇠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신에 가까운 마나가 급격히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쿠우웅!
성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단순히 진동이 느껴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들게 만들었다.
이 사실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잡혀있는 테세라였다.
“에키드나 님! 아무리 당신이라도 공작 성에 이런 짓을 하는 건….”
“야, 언니면 다야? 조용히 안 해?”
“그치만…. 여긴 내 성이라고!”
은연중에 정체를 말해버린 테세라. 트리아는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오흐트에게 부탁했다.
“오흐트. 쟤 죽이지 말고 적당히 기절시켜놔. 들을 이야기가 꽤 많아 보이니까.”
“그냥 죽이면 안 돼?”
“바실리 님을 구하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 아마, 유피테르라도 같은 명령을 내렸을 거다.”
오흐트는 트리아의 말을 따랐다.
칼리스토의 서열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유피테르의 이름까지 꺼내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오흐트는 테세라에게 다가가 목을 잡았다.
“알았어. 자, 세라 언니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니까 겁먹지 않아도 돼.”
“하, 하지 마.”
“내가 성녀인데 설마 사람을 아프게 하겠어?”
“그렇지? 항상 날 잘 챙겨주던 우리 오흐트가 그런 무서운 일을 하지 않을 거야.”
“그러엄.”
오흐트는 귀여운 웃음을 짓자, 테세라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건 겁을 먹지 않게 하기 위한 사탕에 불과했다.
오흐트는 망설임 하나 없이 신성 마나를 주입했다. 손을 타고 신성 마나가 흘러가자 테세라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
마족 혼혈이라고 해도 신성 마나의 상성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테세라는 비명을 지르다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언니 말대로 했어. 이제 뭘 하면 돼?”
“테세라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지. 어차피 정보를 얻으려고 한 거잖아.”
“비밀 정원으로 돌아가자고?”
“설마. 타르타로스에 온 김에 최대한 정보를 얻어먹어야지.”
트리아는 얼음 마나를 뽑아내 벽을 뚫고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걸 본 오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쪽은 사람 하나를 데리고 이동해야 한다고. 힘들게 신성 마나를 썼더니 이러기야?”
마족의 땅에서 신성 마나를 쓰는 건 힘들었다.
저기서 마스터와 대치하는 에키드나가 마나 제어를 흩트리지 않았으면 더 어려웠을 거였다.
‘마스터 그냥 박살을 내버리라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지만, 오흐트는 유피테르를 믿었다.
타르타로스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세상이 몇 없었으니까.
“아이고. 이게 막내의 서러움 아닐까.”
오흐트는 테세라를 업고서는 트리아의 뒤를 따랐다.
‘오흐트 일행은 빠져나간 건가.’
유피테르는 칼리스토 일행이 성에서 빠져나간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시선은 에키드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림자를 걷어낸 덕에 마나 감지가 제대로 일하는 중이었다.
“또, 다른 생각 하나 보네에에?”
에키드나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주변에 퍼진 막대한 마나를 이용해 유피테르를 에워쌌다. 구멍이라고도 보기 힘들었으나, 끝을 모르는 아티팩트의 마나가 그녀를 도와주었다.
유피테르는 곧바로 대응했다. 보는 눈이 없으니 시동어도 필요 없었다.
별빛 마나를 사용해 아티팩트의 마나를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되겠어?”
“뭐?”
유피테르의 물음에 에키드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 마나가 어디서 왔는지 자알 생각해보라구우.”
그랬다.
성에 퍼져있는 마나는 열쇠의 부산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바실리에 대한 모욕으로 열이 올랐던 머리가 냉정해졌다.
‘굳이 열쇠를 부쉈어. 왜지? 아직 다 모인 것도 아니잖아.’
에키드나가 어떻게 신이 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바실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신보다야 신의 딸이 상대하기 쉬울 테니.
또, 소중한 열쇠를 고작 저런 일에 사용한 것에도 화가 났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를 쏟아내 마나를 지워버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의 손으로 바실리를 구할 방법을 없애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건 완벽한 외통수였다.
신이 직접 만든 열쇠를 인간의 힘으로 복원할 수 있을 리 없었기에.
생각이 깊어지자 유피테르의 마나 제어력이 무뎌졌다.
“알았구나? 이 마나를 지우면 당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실레이아를 만날 수 없게 된다구우.”
“비겁하게…!”
“비거업? 그건 마족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라구.”
아드득.
유피테르는 이를 악물었다.
씁쓸한 맛이 입가에 감돌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에키드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마법을 완성했다.
“그럼, 좋은 꿈 꿔.”
* * *
깜깜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마나 감지는 되는군.”
그나마 케팔로스는 확실하게 작동했다. 그림자에 갇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촤아악!
마나가 사방으로 펼쳐나가며 속속들이 정보를 전달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돌아온 마나를 확인한 유피테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거대한 공간이기만 하다고? 날 그냥 가뒀을 리가 없잖아.”
열심히 찾은 열쇠 하나를 보는 눈앞에서 부쉈다.
열쇠와 비슷한 걸 미리 제작했을 수도 있었다. 고대 아티팩트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마족들이라면 충분히 할 법했으니.
하지만, 유피테르는 곧바로 그 가능성을 지웠다.
그 마나에는 분명 신의 숨결이 들어있었으니까.
아티팩트가 많은 마족이라고 해도 신의 힘을 흉내를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건 오직 바실리에게만 허락된 거였다.
“뭔가 하려면 빨리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이 위험할 거다.”
유피테르는 푸른 마나를 끌어 올리고서는 얼음 화살을 만들어 사방에 뿌렸다.
파바바바박!
푸른 화살이 사방에 꽂히며 치명적인 냉기를 선사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들 마나를 먹이로 삼았기에 끝도 보이지 않았다.
얼음성을 연상시킬 정도로 극한의 냉기가 휘몰아쳤지만, 여전히 에키드나는 침묵했다.
“이래도 안 나온다고?”
공격력이 약하다 싶었던 유피테르는 방법을 바꿨다.
푸른 마나의 성질을 최대한 끌어올려 공간 자체를 얼리기도 했고, 별빛 마나를 섞어 공간에 구멍을 내려고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다채로운 공격을 해도 이 묘한 공간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때,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추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이이야기는 조금 이상해요. 어떻게 따듯한 해가 차가운 바람보다 더 강할 수 있죠? 아폴론 가문은 아르테미스에 비할 바가 못 되잖아요. 그냥 얼려서 제압하면 그만인데.”
“강한 건 좋은 거지.”
“그죠?”
“하지만, 때로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할 때도 있단다. 네가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해와 바람의 이야기.
그건 세아니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 중 하나였다.
강하게만 몰아치면 결국 한계에 도달해 꺾이고 만다는 걸 유피테르는 잘 알고 있었다.
카르멘 비제가 바로 그 사례였으니까.
“나그네의 마음을 얻은 건 결국 온기였지.”
유피테르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우우우웅!
이 공간을 만들고 있는 마나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제정신이냐고 물었겠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유피테르의 마나 친화력은 신이 그에게 준 선물 덕이었다.
마나를 지워버리는 별빛 마나는 분명 신의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제어하지 못하면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명심해 네 진짜 힘은 이런 게 아니라고.
‘알고 있어.’
바실리가 말했듯, 유피테르의 진정한 재능은 마나와 마법에 대한 독보적인 이해도였다.
세아니아 대륙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제로 서클이긴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마나와 함께 호흡했으니까.
반면에 유피테르는 달랐다.
처음부터 마나를 느낄 수 없었기에 누구보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했다.
신의 딸인 바실리조차 감탄했을 정도로.
“찾았다.”
유피테르가 눈을 번쩍 떴다.
에키드나의 의도는 여전히 미궁 속에 숨겨져 있었지만,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보였다.
이 공간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결계를 무력화시킬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틈은… 당연히 없을 거고.”
결계를 부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결계 속 어딘가에 있는 약점을 찾아내는 거였다.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할수록 결계의 강도가 높아졌다. 즉, 미숙한 마법사가 만든 결계는 가볍게 부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둘째는 결계와 완전히 동일한 구성의 마나를 갖는 거였다.
사실 현재의 마법사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특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따라하는 건 지독히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유피테르는 달랐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나를 결계의 마나와 똑같이 바꾸었다. 에키드나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다 됐군.”
유피테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방법이 사기적인 이유는 결계 밖으로 그냥 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과 밖의 구분을 무효화시켜버리는 수였다.
* * *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이쯤 되면 끝이 보이겠지라고 생각한 유피테르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에키드나인가.”
모습이 흐려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에키드나일 확률이 높았다. 이 공간에 다른 존재가 들어와 있는 게 더 웃겼으니.
그러나 들려오는 한 마디는 유피테르의 발을 멈추고도 남았다.
“안녕. 유피테르 너무 오랜만이지? 보고 싶었어.”
“바, 실리?”
유피테르의 앞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봉인되었다고 생각한 바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