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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37화 (237/265)
  • 마지막 열쇠(2)

    * * *

    흔들다리 효과.

    극심한 공포에 지배당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쉽게 착각에 빠진다.

    유피테르는 이 심리 트릭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사람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기에.

    마나를 이용해 상대방을 겁에 질리게 하면 그걸로 상황 종료였다.

    어차피 유피테르의 외모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으니. 가문의 그 누구도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반 푼어치 취급을 받을 때조차 황실 파티에 초대받았으니까.

    유피테르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를 바라봐, 에키드나.”

    실제로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딱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에키드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유피, 테르?”

    처음 겪는 따뜻한 말투에 에키드나의 시선이 유피테르에게 박혔다.

    부담감이 느껴지는 집중력이었으나 유피테르는 최선을 다해 미소를 유지했다.

    그게 이 전술의 핵심이었으니까.

    “으응…?”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건지, 에키드나의 표정이 조금씩 몽롱해졌다.

    타인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로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좋아.’

    여기까지는 전부 예상대로였다.

    한 발자국.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고지에 닿을 수 있었다.

    바실리를 다시 만나는 것도 더는 꿈같은 헛소리가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저걸 전부 얻으면, 딱 하나의 열쇠만 더 찾으면 되었으니.

    에키드나가 가진 열쇠들이 진품이라는 것만 확인해도 큰 수확이었다.

    설령, 지금 손에 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가진 열쇠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해줄 수 있어?”

    “열쇠?”

    “응. 봉인의 열쇠. 네가 모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지.”

    “…좋아.”

    에키드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우웅!

    언뜻 보아도 에키드나가 가진 아공간은 거대했다. 태초의 마족이라는 걸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원하는 게 이거지이이?”

    에키드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 개의 열쇠를 꺼냈다.

    신의 딸의 봉인을 풀 열쇠답게 존재감이 엄청났다. 어디선가 신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중에는 유피테르가 얼음성에서 찾아낸 열쇠도 섞여 있었다.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이기에 몰라보는 게 더 이상했다.

    ‘저게 저곳에 있다는 건… 디오도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로군. 너희들이 믿은 게 고작 에키드나란 말이냐.’

    유피테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키드나가 지닌 힘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그런 종류였다.

    티폰이나 시트시거도 강했지만,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틀을 깨고 나온 마족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때,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강인한 시선이 느껴져 유피테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

    범인은 에키드나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유피테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예의 광기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여기서 더 끌면 위험하다, 유피테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미인계를 마음먹고 쓰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실수를 할 유피테르가 아니었고, 다 된 밥에 초를 치고 싶지도 않았다.

    유피테르는 잡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한평생 신전에서 살았던 자들이라도 홀랑 넘어갈 것만 같은 아름다운 호선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유피테르의 시선은 열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랑, 놀람, 두려움, 집착.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나보다 이 열쇠가 더 좋은 거야아아?”

    에키드나가 입을 삐죽였다.

    드디어 자신을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은빛의 눈동자는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

    연기를 해야 할 순간이지만, 유피테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머리로는 어떠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계산이 끝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가슴이 그걸 극도로 반대했다.

    저 질문은 바실리와 에키드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의미였으니까.

    에키드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열쇠를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아직 전 여친을 못 잊었나 보네에에. 그런 면도 매력적이지만 말야.”

    “어떻게…!”

    매혹의 효과가 풀린 듯,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 에키드나. 그런 그녀를 보며 유피테르는 경악했다.

    “어떻게라니?”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지? 내가 이걸 사용할 거라고 예측이라도 한 건가.”

    “에이 설마.”

    “그건 아무리 너라고 해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었다. 설령, 마왕이라도 말이야!”

    울부짖는 유피테르를 향해 에키드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에키드나는 유피테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턱!

    숨이 막혔다.

    달콤한 애정 표현일 뿐인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이 호흡하는 걸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무서웠다.

    비틀린 애정 안에 담긴 무거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환한 에키드나의 미소를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웃고 넘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갖고 노는 것도 모자라, 상처까지 줘버린 건가.’

    유피테르는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에 예민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모멸감을 극복하긴 했다. 그러나 그게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 한구석에 아픔을 남겨 두었다.

    그런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결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카르멘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인 에키드나가 불쌍했다.

    유피테르는 티폰을 죽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에키드나의 유일한 반려자였던 이를.

    소중한 사람을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이건 쉬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잠깐….’

    무언가가 이상했다.

    에키드나는 ‘열쇠’를 노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적이었다.

    애초에 그는 에키드나의 마음을 조종하려거나 괴롭히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호감도를 올려 열쇠의 진위를 확인하려고 했었을 뿐.

    ‘설마…. 아니겠지. 내 생각을 읽고 행동한다니.’

    에키드나가 자신에게 상상 이상으로 집착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같은 방법을 떠올렸고, 자신을 구슬리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가설 하나에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무슨 짓이지?”

    “뭐르을.”

    “내게 현혹 마법이라도 건 건가? 그렇지 않으면 이딴 생각을 할 리가 없어.”

    “헤에….”

    에키드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대답했다.

    “내 사랑의 양심에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닐까아아.”

    “양심?”

    유피테르는 차갑게 웃었다.

    감히, 마족이 양심을 운운하다니. 그건 마왕이 세상을 구한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말이었다.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이 열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에에. 쉽게 넘겨줄 거 같아아?”

    “네 손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그걸 누가 정했는데?”

    에키드나가 강하게 쏘아붙였다.

    평소의 늘어진 그런 어조가 아니었다. 무언가 쌓여있던 한을 풀어내는 듯했다.

    에키드나의 절규를 들은 유피테르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로 에키드나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오흐트에게서 디저트를 뺏는 게 더 쉬웠다.

    에키드나는 뛰어난 언변을 자랑하지도, 남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도 못했다.

    다만, 사는 세계가 달랐다.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지? 죄를 지은 마족 주제에 똑바로 노려보다니.”

    “어머어 이래야 좀 내 사랑 같아졌네에.”

    그런 에키드나를 보며 유피테르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르테미스의 상장과도 같은 푸른 마나가 아니라 별빛의 마나였다.

    “바로 그걸 사용하다니 급하긴 한가봐아아아. 그런 당신도 너무 좋지만 말이지.”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여기가 아직 그림자 속이라는 걸 잊은 거야아아? 약해졌네. 내 사랑.”

    “네 힘을 그냥 상대하는 건 어렵지.”

    성국 사람들은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를 가장 강한 마족으로 꼽았다.

    2차 대륙 전쟁 때, 시트시거가 화려한 전적을 남겼기에.

    그는 인간들의 기술을 완전히 박살을 냈다. 오로지 힘으로만 이뤄진 일들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에키드나를 더 높게 평가했다.

    ‘마법이라는 건 결국 체스지. 가지고 있는 걸 어떻게 이용하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니까.’

    16개의 말을 가지고 상대방을 무너트리는 게임인 체스.

    그러나 에키드나는 16을 넘어 무한히 많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또,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를 섣부르게 판단하는 건 사치였다.

    “그림자부터 걷어내 주지.”

    유피테르의 선택은 간단했다.

    그의 오감과 마나 감지를 비껴가게 하는 그림자부터 채워내는 거였다.

    유피테르식 반 마법 ― 충격파

    별빛의 마나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마나 자체를 소멸시키는 힘 앞에서는 에키드나 역시 무력했다. 그림자의 세상은 어두웠으나, 별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별은 밤하늘을 밝히는 달의 유일한 동료였으니까.

    에키드나가 만든 그림자의 새장은 한순간에 줄어들었다.

    마나 제어력을 뺏겼다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찌든 때를 하얗게 지워내는 것만 같았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오자 트리아와 오흐트가 보였다.

    그러나 조금 묘한 광경이었다.

    “이게 감히 함정을 펴놔? 언니라고 존경했는데. 이건 아니지. 바실리 님과 마스터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오흐트.”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한 대 더 때려. 신성 마나 가득 넣어서.”

    “주문대로!”

    에키드나의 공간에 잡혀있는 동안,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테세라는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오흐트는 신성 마나를 두르고 노려보았으며, 트리아는 그걸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감상하는 중이었다.

    저쪽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유피테르는 그렇게 판단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마법을 파훼했지만, 에키드나의 표정은 밝았다.

    “그림자 마법이 내게 의미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잘 알지.”

    바실리를 제외하면 유피테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에키드나였다.

    어떻게 보면 칼리스토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야아아아….”

    에키드나의 말에 유피테르가 귀를 기울였다.

    “뭘 모르는 건 유피테르 너인 거 같은데에에.”

    에키드나는 아공간을 다시 열더니, 열쇠 하나를 꺼냈다.

    “뭘 하려는 거지?”

    유피테르는 눈을 떼지 않았다.

    에키드나가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불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봉인의 열쇠는 강대한 힘을 지닌 아티팩트이긴 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용지물이다.’

    무려 신의 딸을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 담겨있는 마나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티팩트는 올바른 사용법이 아니라면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옴팔로스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 처형당한 것처럼.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로 궁금해지는걸? 아마, 바실레이아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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