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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36화 (236/265)

마지막 열쇠(1)

* * *

마왕성으로의 여정은 의외로 쉬웠다.

무슨 명령이라도 들었는지 마족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식물들을 제압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거의 최단 루트로 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안에 마왕성에 도착할 듯했다.

단지, 음습한 마족의 마나가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유피테르 일행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어, 어째서?”

“심장이 여러 개라도 되는 건가? 감히, 이곳에 오려고 하다니.”

그자의 정체를 확인한 오흐트와 트리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유피테르는 쐐기를 박아 버렸다.

“테세라, 무슨 낯짝으로 이곳으로 찾아온 거지?”

그랬다.

잘 가던 일행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칼리스토의 넷째, 테세라였다.

대부분의 칼리스토들이 유피테르를 배신한 상황. 심지어 테세라는 악의 축이라고 의심받고 있었다.

곱지 않은 시선에도 테세라는 싱긋 웃어 보였다.

“뭐긴? 내가 타르타로스 담당이잖아. 마스터님께서 오셨는데 얼른 뛰어와야지.”

“으음….”

유피테르는 침음성을 삼켰다.

‘패스를 읽고 온 거군.’

유피테르와 칼리스토들의 걷는 길이 달라진 건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마나 패스는 이어져 있었다. ‘계약’ 자체가 부서지지 않았기에.

즉, 칼리스토들은 아직 바실리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게 마음만 먹으면 위치를 추적할 수 있음에도 내버려 둔 이유였다.

“그런 표정을 보면 좋은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지잖아. 안 그래? 친애하는 마스터.”

“좋은 정보라….”

살가운 태도에도 유피테르는 흔들리지 않았다.

달콤쌉쌀한 꿀 아래 숨어있는 독이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 그리고 테세라는 이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자였다.

“마족인 네가 우리에게 정보를 준다고? 칼리스토들이 배신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래, 바보 같은 짓을 했더라고. 그런다고 바실리 님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야.”

“뭐…?”

테세라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잖아.”

그 말에 오흐트와 트리아가 벌컥 화를 냈다.

“감히 바실리 님을 모욕해!”

“신이시여.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배신자를 빨리 처단….”

두 사람과 다르게 유피테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걸 본 두 사람은 더 강하게 소리쳤다.

“마스터!”

“신이시여!”

그 순간, 테세라가 빙그레 웃으며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자아, 자아. 그런 식으로 내부 분열하라고 온 게 아니라구우. 이걸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뭔데. 이 반쪽짜리야.”

오흐트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배신자들이라고 생각하니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은 테두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만 같았다.

“이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네. 정보를 얻고 싶으면 따라와.”

* * *

“이게 마지막 열쇠를 향할 정보라고?”

유피테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층고가 높고 넓이도 넓었다. 테세라의 위치가 범상치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연회장 같은 곳에 초대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테세라가 가장 상석에 앉아 대화를 주도했다.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선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테세라의 손에 구슬이 들려 있었으니까.

“맞아. 에키드나 님이 가지고 있던 걸 몰래 빼 온 거야. 무서워서 회의에도 못 갔다고.”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칼리스토로서의 마지막 정이라고 하면 믿어줄 거야?”

진심 어린 테세라의 눈동자에 대답한 건 트리아였다.

마족 공작의 성을 신기하게 둘러보는 오흐트와 다르게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테세라를 향했다.

“테세라.”

“응. 트리아 언니.”

“난…. 아니, 우리는 네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테세라는 억울했다.

이 정보를 빼앗아 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칼리스토 자매의 네 번째를 담당하는 테세라라고 해도 에키드나는 무서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과 명성에 걸맞는 힘.

테세라의 위치에서 에키드나의 눈을 속이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계속 이러면 나도 몰라. 그냥 가버려. 마음대로 하라고!”

결국, 테세라도 폭발했다.

그녀는 마나를 이용해 유피테르 일행을 추방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우우웅!

주변의 마나가 모두 테세라의 기분에 호응했다.

두두두두!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유피테르를 힘으로 억누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결과가 달라졌다.

“젠장, 여기 공작의 거처라고 했지.”

“알고 있었으면 미리 대비를 했었어야지. 초대 성녀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일단은 동료였잖아!”

“너는 항상 그래.”

“언니가 내 마음을 알기나 해? 일단 방어막이나 치자고.”

테세라를 만나 고풍스러운 말투를 연기하던 트리아의 본심이 새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흐트는 신성 마나를 최대한 뽑아내서 방어막을 구축했다.

먹힐지는 몰랐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당하는 것보다야 나았기에.

마나에 휩쓸리는 순간에도 유피테르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정보만큼은 넘겨!”

“싫어. 나를 믿지 않았는데 내가 왜?”

“내가 아니라 바실리를 위해서!”

바실리.

그 단어가 가진 울림은 깊고 따뜻했다. 심통이 난 테세라의 행동이 잠깐 멈출 만큼.

그 순간 오흐트가 재치를 발휘했다.

“잠시만.”

“뭘 하려는 거야? 여긴 너에게 있어 지옥 같은 곳이잖아.”

트리아의 걱정을 뒤로하고 오흐트는 움직였다.

탓!

마치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경건한 신성 마나를 몸에 두른 오흐트는 잽싸게 튀어 나가 테세라의 뒤를 잡았다.

‘어설퍼.’

테세라는 그 모든 행동을 알고 있었다.

타르타로스 안에서 여동생은 제 실력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성국에서 힘이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흐트는 용감하게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테세라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어설프게 마법을 사용하다가는 유피테르의 먹이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 대신 마나의 도움을 받았다.

탁!

테세라는 구슬을 잡지 않은 손으로 오흐트의 머리를 손을 잡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족의 마나를 그대로 손에 불어 넣었다.

푸시시시―

잡힌 손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자 오흐트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 그만둬. 아프잖아!”

“난 마지막 기회를 줬어. 그걸 차버린 건 바로 너고.”

테세라는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마나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세라 언니!”

“누가 네 언니야?”

순백에 가깝던 오흐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제아무리 초대 성녀라고 해도 마나를 강제로 불어넣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서열에서도 밀렸는데, 타르타로스의 의지까지 신성 마나를 방해했으니까.

‘없애야 하나.’

유피테르는 진지하게 테세라를 소멸시킬지 고민했다.

솔직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실리가 직접 선택한 이들을 유피테르가 없애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이대로면 오흐트의 생명마저 위험한데.’

하지만,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력으로 테세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보였다.

이제 선택지는 하나였다.

오흐트를 구하기 위해 유피테르는 마나를 뿜어냈다.

늘 사용하던 푸른 마나 대신 별빛을 닮은 마나가 주변을 빠르게 장악했다.

그 순간, 갑자기 공간이 사라졌다. 그에 맞춰 시야가 암전되었다.

“이게 무슨….”

유피테르는 자연스럽게 마나 감지를 사용했다. 마법사의 눈을 가리는 건 고대부터 내려져 오는 전통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대단한 케팔로스도 묵묵부답이었다.

‘테세라의 마법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칼리스토의 마스터가 되자 그들의 정보가 뇌리에 박혔다.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지식이었던 것처럼.

테세라.

그녀는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트리아보다도 더 위였다.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살아있었으니까.

마족 혼혈이라는 특이한 성질 덕에 그녀는 마음대로 타르타로스를 오갈 수 있었다.

‘신의 결계는 마족이 아닌 다른 이들을 무조건 배척하니까.’

테세라가 신의 결계를 농락한 방법은 간단했다. 몸 안에 있는 마나를 깨끗하게 지우면 그만이었다. 오랜 세월이 그걸 가능하게 도와주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보다 마족을 감시하는 데 적합한 존재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빠르게 상념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오흐트, 트리아 무사한가? 살아있다면 대답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묘한 감각이었다.

여기가 공작의 성이라면 목소리가 울려야만 했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랬었으니까.

“…우후후.”

“누구냐.”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유피테르는 긴장했다,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평범하기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심지어,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굳이 타르타로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벌일 존재가 둘일 리 없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시야가 회복되었다. 무슨 조화인지 적응기도 필요 없는 듯했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뜰 수고를 덜은 유피테르는 눈 앞으로 다가온 존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키드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역시, 나를 보러 온 거구나! 사실은 너도 나를 좋아하는 거지?”

광기.

오직 그 단어만이 에키드나를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혹적인 눈동자에는 오직 유피테르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다른 것을 일부러 밀어낸 듯한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래도 유피테르는 표정 변화 없이 에키드나에게 물었다.

이런 일로 놀라기에는 너무 익숙했으니까.

“대체 어떻게 여기를 온 거지?”

“내 사랑이 신호를 보내줬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타르타르스에서 그러면 모를 수가 없다구우.”

“신호라니 그럴 리가 없어.”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유피테르는 빠르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훑었다. 그러나 여전히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차갑게 대하는 모습도 너무 좋다니까. 내가 신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온 거지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플라스의 말대로라면 에키드나도 바실리의 열쇠를 노리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그녀를 잘 구슬리면 열쇠들을 꺼내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봉인을 풀 열쇠를 하나밖에 구하지 못했고, 그것마저 디오에게 반쯤 빼앗긴 상태였다. 이판사판으로 판을 엎어버리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유피테르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러자 날카롭기 그지없던 외모가 달처럼 은근한 빛을 내었다. 평범한 이라면 눈이 마주친 순간 사랑에 빠질 게 분명했다.

‘잠입 때 필요한 스킬을 여기서 사용하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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