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시작(4)
* * *
수백에 달하는 마족들을 가볍게 격파하고 돌아온 오흐트와 트리아.
칼리스토의 명성에 맞는 힘을 직접 증명해 보였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 파악했어? 마스터라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오흐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유피테르라면 벌써 정답을 찾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뿐.
“질문하면 전부 막힘없이 대답해 줄 거라고? 내가 현자의 돌이라도 되는 줄 아나.”
“어… 아니었어?”
“너나 나나 어디까지나 본질은 인간이다.”
그 인간은 마나를 지우거나 흡수하지 못하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오흐트는 간신히 참아냈다.
아무리 그녀라도 농담을 던질 타이밍이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까.
우스갯소리로 상황이 붕 뜨자, 트리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그렇게 보채지 마라. 어차피 유피테르는 이곳이 어딘지 알 테니.”
“정말? 역시 마스터야 믿고 있었다고!”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트리아 역시, 말을 끝내자마자 오흐트와 같은 행동을 했다.
주변을 훑던 유피테르의 눈이 트리아에게 고정되었다.
‘트리아가 적이 아니어서 다행이로군.’
유피테르는 타르타로스에 여러 번 왔었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도 신의 딸과 함께니 부드럽게 해결되었다.
즉, 타르타로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유피테르란 소리였다.
칼리스토를 포함에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흐트는 잠시 잊은 것 같지만.
“아마도 여긴 타르타로스 외곽일 거다. 마족의 마나가 그렇게 짙지 않으니.”
유피테르의 대답에 오흐트와 트리아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타르타로스가 크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건 좀… 상상 이상인데?”
오흐트는 다른 것보다도 크기에 주목했다.
그녀는 레아교의 성녀였다. 마족과 관련된 정보를 남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자주 접했었다.
그러나 이건 좀 이상했다.
그녀의 눈에 잡힌 타르타로스는 세아니아 대륙 일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었던 이야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광활해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후손이라면 다 계획이 있겠지?”
트리아는 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말투가 편해졌다고 해서 본질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앞으로만 향해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어? 몰라?”
“말했듯이 나는 만능이 아냐. 그리고 난 인간이라고.”
“그럼 어디로 갈 건데. 그것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그건 뻔하지. 타르타로스의 중심인 마왕성이다. 거기에 모든 비밀이 있을 거다.”
타르타로스는 넓디넓었다.
한참을 뛰어도 그럴듯한 건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피테르 일행의 속도가 마족의 그것을 뛰어넘었는데도 말이다. 날아가듯 움직여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마족의 마나를 먹고 자란 식물들이 대신 나서서 반갑게 인사했다.
“이래서! 마족! 놈들이랑은! 겸상도! 안 하는! 거야!”
오흐트는 짜증을 내며 신성 마법을 쏟아내었다.
신성 마나를 사용하기 힘든 환경임에도 그냥 출력으로 밀어붙였다. 초대 성녀인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족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 묘하군요.”
트리아 역시 얼음 마법을 선보이며 길을 만들었다.
굳이 중력 마법까지 가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얼음 마법 역시 다수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으니까.
유유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유피테르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군.”
“마족 놈들이 침입자를 용서할 리 없어. 대륙 전쟁 시절만 해도….”
대륙 전쟁을 몸소 겪었던 트리아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물론, 시선은 앞을 향했고 얼음 마법을 계속해서 적에게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오흐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냥 침입자가 올 거라고 생각을 못 한 거 아닐까?”
“오흐트.”
“왜 그래?”
“….”
트리아는 힘이 쭉 빠져버려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시절을 보내도 눈에 들어오는 건 다르다는 거네.’
트리아와 오흐트는 대륙 전쟁을 겪었다.
트리아는 300년 전에 있던 전쟁에 직접 참여한 데 반해, 오흐트는 대륙 전쟁 후에 두각을 드러냈다.
이 차이가 곧 시각의 차이가 된 거였다.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트리아를 대신해 유피테르가 의문을 풀어 주었다.
“오흐트.”
“왜 마스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지금 조금 바쁜데.”
“방금 전에 만났던 마족을 쓸어버린 게 누구였지?”
“누구긴 누구야 나랑 트리아 언니….”
이쯤 되자 오흐트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 * *
유피테르 일행이 마왕성을 향해 쾌속 전진하던 그 시각.
마왕성의 분위기는 흉흉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 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교만과 음욕은 불참을 선언했다고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아.”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건 티폰의 아내이자 질투의 공작인 에키드나였다.
다리를 꼬고서 무료한 표정을 한 그녀에게서는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화를 풀어. 그런 식으로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에키드나의 오른쪽에 있는 건 분노의 공작인 시트시거였다.
지금까지 남은 태초의 3인 중 하나였기에 유일하게 그녀를 막을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에키드나에게서 가장 멀리 앉아 있는 건 나태를 담당하던 라플라스였다.
유피테르에게서 간신히 살아간 돌아간 이후,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살았다.
아니, 숙여야만 했다.
“하하. 그 잘난 라플라스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네?”
“너무 그러지 마. 지금 가장 슬픈 마족일 텐데.”
“그깟 구멍 하나 뚫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에이, 다 생각이 있었겠지.”
탐욕과 식욕을 담당하는 두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정거리는 탐욕의 태도와 애써 말리는 듯 행동하는 식욕의 태도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처럼.
순간 울컥한 라플라스가 탐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공작무기를 빼앗겼지 않습니까!”
“아앙?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저기 계신 에키드나 님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그럼.”
탐욕과 식욕이 연주하는 심포니에 뒷골이 당겼지만, 라플라스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에키드나는 공작 중에서도 알 수 없는 자였으니까.
굽신굽신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깐 라플라스를 비웃으며 탐욕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식욕도 얼른 그를 따라 했다.
“에키드나 님! 그 빌어먹을 대행자를 내게 상대하게 해줘. 내 힘이라면 가능하다고! 저기 있는 저 덜떨어진 놈이랑 다르게.”
“탐욕 오라버니는 실수하지 않는답니다. 믿어주세요, 에키드나 님.”
“….”
에키드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뭔가 공을 세워야 해. 에키드나 님의 눈에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마왕 티폰이 살아있을 무렵의 에키드나는 이렇게 무섭지 않았다.
적어도 그분의 말은 들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에키드나 님은 폭주하는 아티팩트나 마찬가지였다. 너무나도 위험한데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저분의 생각을 읽을 수 없으니 최대한 잘 보이는 게 우선이겠지.’
탐욕이야말로 그의 본능이었다.
그럼에도 생존의 욕구가 한발 먼저 살려달라고 비는 상황이었다.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에키드나 님은 원래 타인에게 잘 신경을 쓰지 않으셨으니까.
공작무기를 빌려줬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라플라스가 추락한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탐욕의 말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
푹 빠져있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에키드나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덧씌워졌다.
그래, 이거였다.
명색이 탐욕을 담당하는 공작인데 이 시간을 헛되게 보낼 리 없었다.
“그자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에키드나 님. 제가 가서 그놈의 목을…. 흐억.”
탐욕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에키드나가 움직였다.
아니,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마왕성의 마나가 스스로 그녀의 힘에 복종해 탐욕을 처벌한 거였다.
특별한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닌, 마나 자체가 치명적인 독이 되어 고통을 주었다.
“사, 살려주세요! 탐욕 오라버니는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욕심이 조금 많은 사람인 것 뿐이에요.”
오라버니의 상황을 본 식욕이 머리를 조아렸다.
질투의 공작에게 이게 먹힌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탐욕과 식욕의 공작을 바라보는 에키드나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정말로 같은 종족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시트시거가 나섰다.
“에키드나.”
“…?”
에키드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트시거는 아직 자신의 말이 통한다는 것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그만 저들을 용서해줘. 네 계획을 위해서 필요한 자들이라고 했었잖아.”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시트시거는 에키드나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바로 알았다.
“켁엑, 켁켁. 가, 감사합니다. 에키드나 님.”
“괜찮아요? 그러니까 너무 나서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라버니는 그게 흠이라니까.”
“그래, 그래.”
목을 조이던 마나가 서서히 풀어졌기에.
“음….”
에키드나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자칫 잘못하면 소멸할 수도 있었기에 당연했다.
“계획은 거의 막바지야. 신의 딸의 봉인을 풀 열쇠도 딱 하나만 남았으니까아. 너희들이 생각해도 대단하지?”
“어려운 일을 진짜 쉽게 하시네요. 존경합니다.”
“역시, 에키드나 님이십니다.”
“우와… 대단하세요!”
라플라스, 탐욕 그리고 식욕은 모두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러나 시트시거는 달랐다.
“네가 가지고 있는 건 하나뿐이라고 하지 않았어?”
“답지 않게 말이 많네에.”
평온한 어조였으나, 소름이 끼쳤다.
라플라스는 공격을 대신 막아줄 이를 소환했고, 탐욕과 식욕 남매는 도망을 칠 준비를 할 정도였다.
이번에도 시트시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무려 신의 딸의 봉인을 풀 열쇠다.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닐 테지. 애초에 그게 왜 대륙에 퍼져있는 거지?”
“그건 나도 몰라아아.”
창조신 레아의 생각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왜 열쇠가 손에 닿는 곳에 있는 지보다 어떻게 하면 그걸 가질 수 있는 건지가 더 중요했다.
어차피 그 자리는 곧 그녀의 것이 될 운명이었으니까.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어어어. 아까 이야기한 대로 행동해 줘. 유피테르를 막지는 말구우.”
잔잔한 에키드나의 말에 공작들은 최고의 예의를 표하면서 한 명씩 자리를 떠났다.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왜 너는…. 아니다. 널 믿어보도록 하지.”
시트시거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마왕성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공작들이 모두 사라진 후.
에키드나는 아공간을 열어 세 개의 열쇠를 꺼냈다.
첫 번째 열쇠는 카르멘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고.
두 번째 열쇠는 손을 잡은 칼리스토들이 거래의 증표로 넘겨준 거였다.
마지막 열쇠는 성국에 있는 걸 빼돌린 거였다.
이제 단 하나였다.
하나만 더 있으면 창조신 레아의 자리를 찬탈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마지막 열쇠의 핵심은 바로 타르타로스와 유피테르에게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