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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34화 (234/265)
  • 종말의 시작(3)

    * * *

    의심이 가득한 오흐트의 시선을 뒤로하고, 유피테르는 마왕의 씨앗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르륵!

    씨앗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조금씩 옅어졌다.

    마음만 먹으면 얼음 따위 순식간에 녹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그 선택을 멀리 치웠다.

    마왕의 씨앗이 지닌 힘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트리아는 유피테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건….’

    실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저게’ 마왕의 씨앗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피테르의 마나에 억눌려 있었으나, 미세하게 기운이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오흐트의 반응이 힘을 실어 주었다.

    트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유피테르가 해동을 끝냈다.

    두근!

    심장의 형상을 베낀 마왕의 씨앗이 맥동했다.

    패배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기분 나쁜 마나를 사방에 뿌려댔다.

    “봐. 바로 이렇게 나오잖아. 대체 이걸로 뭘 찾아낸다는 거야?”

    “내 생각도 그렇다.”

    오흐트와 트리아.

    두 칼리스토들은 유피테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왕의 씨앗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으므로.

    그래서 트리아는 좀 더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디오에게 준 열쇠를 추적하는 게 빠르지 않나?”

    “배신자들이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은 없잖아. 그 말은 선조님답지 않은데.”

    “그렇긴 해도, 저걸로 대체 뭘 알아낼 수 있다는 거냐?”

    “뭐, 보고만 있으라고.”

    자신감 넘치는 유피테르의 말에 트리아는 입을 닫았다.

    맹랑한 후대가 맞는지, 아니면 그녀가 맞는지는 결과가 말해 줄 테니.

    우웅!

    유피테르는 점점 더 많은 마나를 불어넣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게 다른 아티팩트였다면 버티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미 마도사가 보유한 마나를 넘은 지 오래였다.

    그 순간,

    비밀 정원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뭐야, 마스터가 만든 거야?”

    “아니, 조금 다르네. 이건 고대 마족이 사용하던 마법이다. 아무래도 공간 이동 계열로 보이네.”

    “트리아 언니는 모르는 게 없구나?”

    “아는 것 빼고는 다 모르지.”

    칼리스토 자매들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에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 *

    “낯선 하늘이네?”

    오흐트의 말에 유피테르의 고개도 저절로 위를 향했다.

    하늘이 붉었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붉은색 하늘을 지닌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여긴….”

    “타르타로스인 것 같네. 나도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지만 말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리아가 가로챘다. 유피테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어서 설명했다.

    “잘될 줄 솔직히 몰랐는데.”

    “뭘 하려던 거였어?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전혀 모르겠는걸?”

    갑작스레 정보 담당이 되어도 트리아는 탁월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걸 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두뇌와 눈썰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도 유피테르가 어떤 방법을 쓴 건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트리아는 굳이 한 번 더 물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니?”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닌데.”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유피테르는 능청스럽게 빠져나가려다, 싸늘한 눈빛을 보고는 간단히 설명했다.

    “이게 진품이란 건 카테리나를 치료하면서 알았어. 비밀 정원에 있던 연구 일지에 실험 결과가 자세하게 쓰여 있었고.”

    “그래서?”

    “마나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지금 네 선조를 무시하는 거니.”

    트리아는 옆에서 뛰어다니며 구경하는 오흐트를 흘끗 본 후, 말을 이었다.

    “마나에는 여러 성질이 있지. 서클의 법칙이라던가, 근원 회귀의 법칙 같은 게 유명하다고 알았는데. 그새 바뀌었나? 잠깐, 설마….”

    마나의 성질을 나열하던 트리아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원 회귀를 이용한 거야.”

    근원 회귀.

    마법을 쓰기 위해 밖으로 방출한 마나는 마법사에게로 돌아가려고 했다.

    마나 제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원하는 형태로 짜 맞춰야 마법이 완성되는데 계속 흐트러지려고 하니 죽을 맛이었다.

    “근원 회귀라고 해도 티폰은 이미 죽었잖아.”

    아직 부족했다.

    흑백의 세계에 색이 칠해지고 있었으나, 다르게 말하면 고작 그뿐이었다.

    트리아가 아는 지식으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타르타로스는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고.’

    왜 유피테르와 칼리스토들은 마족을 절멸시키지 않았는가?

    신의 딸 바실리의 반려자와, 그녀가 직접 택한 칼리스토들은 마족보다 강했다. 한 명 한 명이 마족 공작급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계약에 의해 힘을 전부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도 타르타로스를 직접 공격하지 않은 건 신의 결계 때문이었다.

    굳이 신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조님. 티폰 전에도 마왕이란 존재가 수없이 많았지?”

    “그렇지. 마족은 원래 평화와는 담을 쌓은 놈들이니까. 싸울 만한 각이 보이면 그대로 들이박았었지.”

    “다른 이도 아니고 마왕이야. 그 급의 마나가 계속해서 마왕의 씨앗에 쌓였어. 그러면 어떻게 될까?”

    “…회귀의 속성이 더욱 강해지겠지.”

    이쯤 되자 트리아는 유피테르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 깨달았다.

    ‘마족과 평생을 함께한 아티팩트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네.’

    급이 높은 마법사일수록 마나의 속성이 강해졌다.

    따라서 세컨드 서클의 마도사가 한계에 무릎을 꿇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천년에 한 번 나올 재능을 타고난 카르멘조차 다른 이의 손을 잡았을 정도로.

    “이해했어?”

    “그 안에 있는 마나를 역산해서 결계까지 속인 거구나.”

    “정답이야.”

    유피테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트리아가 초대 가주 나이아드의 여동생인 건 이미 들은 정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한 이야기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이론이었다.

    반―마법과 사기적일 정도로 높은 마나 제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니.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오흐트가 유피테르를 불렀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저길 좀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긴장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유피테르가 그곳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마족들이 유피테르 일행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환영 인사가 거친걸?”

    “싸울 거지?”

    오흐트의 질문에 유피테르가 피식 웃었다.

    “뭐야. 왜 웃는데. 뭐가 그렇게 웃긴데!”

    “아니, 그냥.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허락을 받는다는 게 재미있어서.”

    초대 성녀 오를레앙은 마족을 싫어하는 걸로 유명세를 떨쳤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한 사람도 고통받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를 꿈꿨을 뿐이었다. 대륙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었으니.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아픈 사람들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 굴레를 해결하기 위해 마족을 직접 사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강의 치유란 ‘적’을 없애버리는 거니까.

    유피테르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명령했다.

    “좋아. 가서 본때를 보여줘. 우리가 누군지. 우리를 배신한 게 어떤 일인 건지 똑똑히 몸에 새겨주라고.”

    “역시, 마스터는 이야기가 잘 통한다니까!”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흐트는 마나를 이용해 하늘 높이 날아갔다.

    “배신한 애들이 마족이랑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트리아가 물었다.

    “일단은.”

    “이유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

    “너희 자매가 바실리를 배신한 거라면 존재 자체가 소멸되었겠지.”

    “확실히 그런 계약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마족과 손을 잡는 건 이해가 안 돼.”

    바실리가 봉인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마족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창조신인 레아를 위해 미리 움직여 마왕 티폰을 제거했다. 비록, 유피테르의 손을 빌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레아는 그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창조물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었으니까. 설령, 반역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해결하는 건 오롯이 레아의 몫이었다.

    “에키드나가 바실리의 봉인을 막을 열쇠를 갖고 있더군.”

    “뭐? 그게 사실이야?”

    같은 공작인 라플라스에게 확인한 사실이야, 라고 유피테르는 덧붙였다.

    “니들 오늘 다 죽었어!”

    저 멀리서 마족들과 대치하는 오흐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살을 내려 작정했는지 성검까지 꺼내 손에 쥐고는 이리저리 검기를 뿜어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저것들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인 거 같네.”

    “….”

    유피테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트리아는 발을 박찼다.

    고작 그뿐인데도 푸른 마나가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며 기둥을 만들었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네.’

    트리아가 얼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체를 밝혀도 믿지 않는 유피테르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칼리스토들이 초월자들이라고 해도 혈족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특별한 자에게만 허락된 힘이었으니까.

    ‘공간을 얼리는 걸 중력 마법으로 발전시킨 건 확실히 대단하군. 역시, 초대의 동생이라는 건가.’

    * * *

    “침입자 놈…. 신성 마나를 사용합니다.”

    “결계를 뚫는 방법을 알기라도 하는 건가? 그건 높으신 분들만의 비밀이라고 했는데.”

    마족들은 오흐트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침입자가 신성 마나를 흩뿌리며 싸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지간한 마족들은 검으로 가볍게 긋기만 해도 목숨을 잃었다.

    그럴듯한 반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체.

    “저기 또 한 명이 올라옵니다!”

    “지옥에나 떨어질 신성 마법사는 아닌 듯합니다.”

    “그럼 그쪽부터 노려봐!”

    새로 나타난 인간은 적어도 신성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마족이 노릴 이유로는 충분했다. 밀리지 않는 상성이라면 한 번 해볼 만했으니.

    그러나 상대가 나빠도 너무나 나빴다.

    “버러지가.”

    트리아는 아르테미스 가문 특유의 차가운 말투로 마법을 펼쳤다.

    트리아 식 조화 마법 – 얼음의 무게

    얼음 마법과 중력 마법이 합쳐진 조화 마법. 혼자서 완성했지만, 여느 조화 마법처럼 강력했다.

    “마, 말도 안 돼. 한낱 인간 따위가!”

    “피, 피해!”

    먼지처럼 하늘을 뒤덮은 마족들은 피해 보지도 못하고 단번에 목숨을 잃었다.

    먹잇감이 사라지자 오흐트가 트리아에게 다가와 따졌다.

    “내가 상대할 것들도 좀 남겨둬야지!”

    “지금 싸우는 게 중요한 거니? 마스터가 왜 여기 왔는지 알긴 해?”

    “어…. 모르는데. 언니는 알아?”

    잘못을 한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묻는 오흐트. 그러나 트리아도 딱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건 알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그래서 잠깐 주저했다. 오흐트는 그 찰나의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이. 언니도 몰라? 모르는 것만 모른다며.”

    “후우…. 일단 돌아가자.”

    “아니, 자기도 모르면서 왜 남에게 타박을 줘! 서열 높으면 다야?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무슨 서열을 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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