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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33화 (233/265)
  • 종말의 시작(2)

    * * *

    카테리나와 클리오나가 떠난 후.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비밀 정원을 빠르게 정리했다.

    칼리스토 저택 대신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려고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카테리나를 치료하며 비밀 정원은 난장판이 되었기에 각오를 해야만 했다.

    “자체 청소 마법진이라도 새겨 놓지 좀! 그러고도 비밀 정원이야?”

    단서를 찾은 후, 바로 움직일 줄 알았던 오흐트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게 유피테르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그렇게 말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네, 네. 알았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오흐트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청소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다.

    “아니, 솔직히 말이야. 이건 너무하잖아?”

    결국, 터질 게 터져버렸다.

    오흐트는 바닥에 풀썩 주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청소를 선호했다.

    환자가 지낼 곳이라면 자연히 청결해야 했기에.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묘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테세라 언니가 주동자라고 해도 누가 참여했는지까지는 모르는걸.’

    테세라와 에냐가 배신했다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명단에 누가 또 이름을 올렸는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오흐트는 이런 생각을 그대로 담아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클리오나에게 도와달라고 한 후에 보냈어도 되었잖아. 어차피 어느 정도는 다 알게 되었는데.”

    “걔넨 아직 아카데미생들이다.”

    유피테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오흐트를 더 자극했다.

    “마스터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사정을 신경 썼어? 어? 바실리 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대륙도 뒤집어엎겠다며!”

    오흐트의 목소리가 비밀 정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바실리 님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런 걸 원하지 않으실 게 뻔했다.

    신의 자리를 찬탈하려던 마왕을 죽인 유피테르의 죄. 그 죄를 대신 한 게 바로 바실리 님이었으니까.

    신은 무정하셨으나, 신의 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지금 우리가 완전히 밀리고 있는 거 알고 있기는 해?”

    감정이 격해졌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해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것 정도야 알았다. 초대 성녀 자리를 카드놀이로 딴 건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몸속에 꽈리를 틀고 있는 뱀이 자신을 물것만 같았다.

    악에 받친 목소리에 드디어 유피테르가 오흐트를 바라보았다.

    “정보전을 말하는 건가?”

    “그래! 전투를 하기 전에 미리 승리해 놓는 게 최고의 전술이라며. 그걸 뒷받침하는 게 정보고. 왜 지금은 아무것도 하질 않는 거야?”

    “내가 노는 것처럼 보이나.”

    “설마 아니라고 말할 거야? 마스터가 이전에 했던 일들을 떠올려보라고! 정말로 진심이긴 한 거야?”

    유피테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반지를 쳐다보았다.

    손가락에서 빛을 내는 아티팩트들은 전부 바실리가 선물해준 것들이었다.

    유피테르는 바실리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로 결심이 무뎌졌는가?

    아니었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바실리의 봉인을 뒤로 하고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움직임이 덜 하긴 했지.’

    초창기 유피테르는 그야말로 막 나갔었다.

    마왕 티폰을 단죄하고, 마족 공작들에게는 으름장을 놓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칼리스토들에게 격의 차이를 새겨주기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얼음성으로 복귀 이후 유피테르는 승승장구해왔다.

    마족을 물리쳤고, 델포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인정받았다. 또, 마블링에 나가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낙원교까지 제압했다.

    그러나 이는 유피테르의 실력의 절반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인간’의 기준에서 대단했을 뿐, ‘대행자’로서는 실격에 가까웠다.

    유피테르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

    어려운 질문이었다.

    오흐트는 조금 생각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칼리스토들의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말이군.”

    “마스터가 그때처럼 본때를 보여준다면, 혹시 모르지. 복귀할지도.”

    소망이 담겨있는 듯한 오흐트의 말에 유피테르가 웃었다.

    “하―.”

    메마른 웃음 속에는 한 줌의 기대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자매들이 정말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나?”

    “어떤 가족도 싸울 때가 있잖아. 그러다 화해하면 언제 그랬다는 듯 보듬어 주기도 하고. 안 그래?”

    ―마스터의 가족처럼.

    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걸 밖으로 내놓을 만큼 오흐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랬지, 역린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터벅터벅―

    유피테르가 천천히 오흐트에게 다가왔다.

    혹시나 속마음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하는 생각에 오흐트는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유피테르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오흐트.”

    “뭔데. 나 혼내려고 하는 거 아녔어?”

    “내가 널 혼낼 자격이 있기나 해?”

    “웃기시네. 난 아직도 기억한다고. 마스터가 언니들을 초주검으로 만들었을 때의 모습을.”

    “아, 그럴 때도 있었지.”

    유피테르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숨기고 있는 패를 너에게도 보여줄 때가 된 거 같네.”

    “숨겨둔 패? 그런 게 있었다니 난 들은 적 없어.”

    비장의 무기가 있다는 말에 오흐트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유피테르는 탁월하게 타이밍을 이용했다.

    “예전에 한 번 물은 적 있었지.”

    “내가 마스터에게 묻는 게 한두 개야?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줘.”

    “트리아가 나를 신처럼 받드는 이유.”

    확실히 흥미가 돋는 주제였다.

    지금껏 대답을 회피했던 질문의 해답이 나오려고 하자 오흐트는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마스터의 자리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디오가 정보 담당이었지.”

    “디오 언니의 마법은 정보전에 어울리고, 트리아 언니는 전투에 적합한걸!”

    “잘 아는군.”

    “일단은 칼리스토는 내가 더 선배니까.”

    “내가 마스터다만?”

    “아 그랬지.”

    유피테르는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오흐트를 가볍게 침몰시키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유가 뭐야?”

    “트리아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뭐? 확신이 있었다고?”

    오흐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피테르과 칼리스토 자매 사이에 접점이 생긴 건 티폰이 죽은 이후였다.

    애초부터 친하지 않았는데 무조건적으로 믿을 이유가 있다는 게 이상했다.

    ‘어이가 없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유피테르가 오흐트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다.

    오흐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그 이유가 뭔데?”

    “트리아 역시 아르테미스 가문의 사람이었으니까.”

    “뭐―?”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유피테르도 오흐트와 같은 심정이었다.

    은발과 은안.

    아르테미스 가문의 상징이 된 특징이었다.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다.

    그래서 같은 가문 출신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냥 우연이 겹친 거라고만 생각했다.

    ‘트리아가 초대 가주 나이아드의 여동생이라는 걸 듣고는 놀랐었지.’

    트리아의 고백 이후 유피테르와 트리아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이 생겨났다.

    이 동질감은 언제든 든든히 뒤를 받쳐줄 신뢰의 고리로 쑥쑥 자라났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트리아가 정보를 가지고 올 거라는 소리지.”

    그 순간,

    비밀 정원에 공간 이동의 빛이 나타났다.

    습격이라고 생각한 오흐트는 순간적으로 마나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그게 아는 사람의 마나라는 것을 알고는 긴장을 풀었다.

    “이렇게?”

    “어…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는데 말이지.”

    비밀 정원에 나타난 사람은 방금까지 회자되던 트리아였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유피테르에게 공손히 인사부터 했다.

    “오랜만입니다. 신이시여.”

    “어, 안녕?”

    여간 당황한 게 아닌지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오흐트는 곧바로 뛰어가 트리아의 품에 안겼다. 트리아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했기에.

    “트리아 언니!”

    “오흐트. 그렇게 아이처럼 굴어서야 마스터를 지키겠습니까?”

    “그것보다 나 들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뭐를 말입니까?”

    “트리아 언니가 마스터의 먼 선조라는 거!”

    늘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트리아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피테르에게 따졌다.

    “유피테르. 이런 건 우리 계획에 없었잖아!”

    말투부터 신선했다.

    평소 신이라고 부르며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던 모습이 전부 거짓말인 듯했다.

    “오흐트는 우리 편이니까 괜찮아.”

    “그게 확실해? 네가 가진 열쇠는 고작 하나뿐이잖아. 그마저도 디오가 가지고 있고.”

    트리아는 신랄하게 아픈 부분을 찔러왔다.

    바실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4개의 열쇠가 필요했다.

    유피테르가 찾은 건 고작 하나였다. 그것도 바실리가 준 힌트를 사용한 것에 불과했다.

    허나, 유피테르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 열쇠를 그냥 디오에게 넘겨줬겠어. 선조님이 봐도 그건 아니지?”

    “설마, 디오가 배신할 거라는 걸 예측하기라도 한 거야?”

    트리아의 말에 오흐트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칼리스토 전체를 의심했을 수도 있지.”

    의외로 오흐트가 정답을 맞히자, 유피테르는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흐트의 말이 맞아. 돌연변이를 심문할 때 벌어졌던 일은 분명 내부인의 소행이었거든.”

    “신의 결계가 뚫렸듯이, 마족들이 그랬을 수도 있지 않나.”

    트리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이 직접 만든 결계도 결국에는 약점을 보였다. 그렇다면 신의 딸과 초월자들의 결계도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분명히 내부인의 소행이었어.”

    유피테르는 단호했다. 그 정도로는 납득할 수 없었던 트리아가 근거를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 내가 아는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는 직감만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 마법에서 테세라의 향기가 가득했다.”

    “테세라? 마족의 동향을 살피던 넷째는 그곳에 없었다만?”

    “맞아. 그래서 내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그때 오흐트가 끼어들었다.

    “테세라가 배신했다는 건 알지만, 내게는 그런 말해 주지 않았잖아! 치사해!”

    “같은 걸 두 번 말하는 취미는 없거든. 이제 이해가 되었어 선조님?”

    그러나 유피테르의 말에도 트리아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은발의 자손이 실력은 믿을 만했음에도,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었다.

    ‘누가 달의 선조 아니랄까 봐 까다롭네.’

    이대로는 트리아의 의심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유피테르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이게 모든 해답을 알려줄지도 몰랐으니까.

    원래 이럴 목적으로 구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거라면 그걸 견딜 수 있을 듯 보였다.

    우웅!

    유피테르는 아공간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오흐트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걸 왜…. 지금 제정신이야 마스터?”

    그랬다.

    유피테르가 꺼낸 건 차갑게 얼어붙은 마왕의 씨앗이었다.

    “그 저주받을 물건을 왜 또 꺼내는데!”

    “아마, 이게 답을 알려줄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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