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32화 (232/265)
  • 종말의 시작(1)

    * * *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카테리나의 상태를 확인하던 오흐트.

    진지했던 표정은 어느새인가 풀어진 지 오래였다.

    헤실헤실 웃는 그녀의 입가에는 이미 한 조각의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완벽해! 짜증 나는 마족의 마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확신 가득한 말에도, 유피테르와 클리오나는 섣불리 기뻐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그게 정말이야, 오흐트? 그럼 카리나가 곧 일어나겠네?”

    마왕의 씨앗과 흡수한 카테리나의 심장은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하지만, 그건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당시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폭탄이 예고 없이 터져버렸다. 그 결과, 이런 위험한 상황까지 도달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어엄! 내가 누군데. 설마, 그런 초보자 같은 실수를 하겠어?”

    “누군데?”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군지 안 알려줬나?”

    “응. 성국 출신의 엘리트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클리오나는 유피테르 일행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치가 빨랐기도 했지만, 유피테르 일행의 태도가 더 큰 증거였다.

    ‘마족 사냥을 무슨 소풍 나가듯이 이야기했었지.’

    조디악의 마도사도 마족을 상대로라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사사건건 상식과 정반대로 행동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 이 기회에 알려줄까? 어차피 너라면 믿을 수 있어.”

    카테리나가 델포이를 졸업하려면 적어도 1년은 더 필요했다. 당연히 주변을 지켜줄 아군이 필요했다.

    언니들이 배신한 이상 더는 안전한 곳 따위 없었다.

    ‘리오나가 강하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겠지.’

    리오나는 아직 카드를 숨기고 있었다. 오흐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그 자리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내 본명은 오를레앙이라고 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아?”

    오흐트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으나, 그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오를레앙…? 그건 크레이타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초대 성녀님의 이름인데. 넌 오흐트잖아?”

    “그건 진짜 이름이 아니야. 마족의 끄나풀일 잡기 위해 만든 가명 정도로 이해하면 돼.”

    “그럼, 네가…. 아니, 당신이. 초대 성녀님? 정말로.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말에 클리오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혼란한 머릿속을 보여주는 듯, 친한 오흐트에게도 딱딱한 원래의 말투를 사용했다.

    그러는 사이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우으으….”

    카테리나가 일어날 기색을 보이자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리나? 정신이 드니.”

    “봐봐! 내가 뭐랬어. 나은 게 확실하다고 했잖아. 죽은 사람 빼고 다 살리는 초대 성녀 오를레앙이 바로 나라구!”

    “카리나….”

    오흐트의 말대로 이번에는 뭔가 다르긴 달랐다.

    캡슐에 인형처럼 누워있던 카테리나는 반쯤 일어나 앉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에 울기 일보 직전의 세 사람이 들어왔다.

    “오라버니? 리오나까지 왔네. 너는 오흐트였던가?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큰일이라도 난 거예요?”

    표정과 말투가 전부 카테리나 본인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걸 깨달은 클리오나는 카테리나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리오나. 무슨 일이야?”

    “카리나, 카리나, 카리나. 너무 보고 싶었어.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구나.”

    “왜 울어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카테리나는 여전히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택할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 *

    유피테르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어도 단번에 전후 사정을 이해할 정도로.

    카테리나 그제야 자신의 몸에 벌어졌던 일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건 감사 인사였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다. 고마워. 걱정 많이 했지? 학생회 일을 혼자서 감당하려면 힘들었을 텐데.”

    “업무는 네가 늘 혼자서 대부분 처리했잖아. 그렇게 말하면 조금 화가 날 것 같은데.”

    “혼자 하다니. 너희들이, 학생회가 있어서 나도 한시름 놨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이 눈이 거짓말을 하는 눈이라고 생각해?”

    카테리나와 클리오나.

    두 사람은 잘 웃지도 않았고 차가운 태도를 주로 보여왔다.

    그런데도 늘 델포이 아카데미 인기 투표 1, 2위를 독차지했다.

    버릴 부분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와 질투를 넘어 존경심까지 드는 실력 덕분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하 호호 이야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클리오나와 적당히 회포를 푼 카테리나의 시선은 오흐트에게로 향했다.

    “오흐트. 너도 고마워. 아니면 오를레앙 님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을까?”

    “에이, 말도 마. 그건 이미 버린 이름이라고. 흑역사는 묻어두는 게 최고라고 마스터가 그랬어.”

    “그래? 오라버니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카테리나의 눈동자가 드디어 유피테르를 담았다.

    “유피 오라버니.”

    “그 단어는 좀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하니.”

    “유피 오라버니? 왜요 귀엽고 정감 가는 별명인데요. 어머님께서도 자주 애용하시는 걸요.”

    “하아…. 내가 어떻게 널 이기겠니.”

    유피테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일상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나온 행동이었다.

    여동생과의 대화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습관 같은 거였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낙원교를 제압하고 시에라 제국의 일에 끼어들며 여기까지 왔다.

    다사다난했음에도 카테리나를 한순간도 잊고 있지 않았다.

    바실리와 만나기 전까지 그를 잡아준 건 여동생과의 추억이었으니까.

    만약, 리나까지 잃었다면 정말로 마족이라는 종족을 소멸시켰을지도 몰랐다.

    유피테르가 상념에 잠긴 사이, 카테리나는 캡슐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썼다.

    “아하하…. 이게 이렇게 어려웠나?”

    카테리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움직이는 육체는 삐걱대며 생각과는 따로 움직였다.

    삐끗!

    카테리나가 땅을 딛고 서려고 하는 그 순간, 발목이 뒤틀렸다.

    아슬아슬한 광경을 보고 있던 클리오나와 오흐트는 재빨리 카테리나의 양팔을 잡았다.

    “잠깐. 카리나. 위험해.”

    “이제 막 회복한 환자가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되지!”

    카테리나는 두 사람 덕에 넘어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오흐트의 설교가 이어졌다.

    “지금 몇 달을 누워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려고 해.”

    “그래도, 고작 걷는 건데….”

    “고자아아아악? 지금 고작이라고 했어?”

    오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서는 성국 출신인 클리오나에게 질문했다.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는 어떻게 하지?”

    “나. 아니, 저 말씀이십니까?”

    오흐트가 초대 성녀라는 걸 알자마자 그녀를 대하는 게 어색해졌다.

    성국 크레이타에서 초대 성녀의 일대기를 읽지 않는 자들은 없을 정도였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답답하게 굳어 있지 말고. 대답해봐. 대단하신 델포이의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너도 들었을 거 아냐.”

    다행히 질문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클리오나는 신성 기관에서 배운 내용을 되짚어보며 조심스레 질문에 대답했다.

    “환자의 근육이 많이 약해져 있을 확률이 높으니 재활 훈련을 도와준다. 그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치유 마법을 동반하는 게 좋다… 맞습니까?”

    “정답이야. 자 이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이 두 사람의 협공으로도 힘든데, 유피테르까지 참전했다.

    “두 사람의 말이 맞다.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야. 컨디션이 돌아온 후에 원래대로 움직이는 게 맞아.”

    “전 지금도 멀쩡해요, 오라버니. 마법도 쓸 수 있다니까요?”

    카테리나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곧바로 마나를 뿜어 내 얼음 화살을 만들어냈다.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다섯 개의 얼음 화살이 금세 비밀 정원에 만들어졌다.

    이전과는 달리 영롱한 푸른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씨앗이 없어진 게 맞는 듯했다.

    “카리나, 너도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희대의 천재? 아니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바보?”

    카리나가 마법을 쓴 걸 보고 클리오나는 말문이 막혔다. 오흐트 역시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저런 상황에서 완벽하게 마법을 펼친 건 정말로 대단한 거였다. 마나 제어력은 컨디션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니까.

    “자. 이제 제가 멀쩡하다는 걸 아셨죠, 오라버니? 그러면 저도 함께….”

    카테리나는 말을 끝내 마치지 못했다. 유피테르가 마법으로 재워버렸기에.

    평소라면 저항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악의 몸 상태인데다가 유피테르의 마나 제어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오흐트와 클리오나는 힘을 합쳐 캡슐 속에 잠든 카테리나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유피테르가 오흐트의 이름을 불렀다.

    “오흐트.”

    “왜, 왜 그렇게 불러.”

    오흐트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긴장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때는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었다. 카테리나만 콕 집어서 재웠다는 건 그녀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설마,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은 건 아니겠지?’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을 하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자신의 진단이 틀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유피테르의 마나 감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칼리스토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기술이었으니.

    마치, 신의 힘처럼.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널 혼내려는 게 아니야.”

    오흐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피테르는 작게 웃은 후 클리오나에게로 다가갔다.

    “클리오나.”

    “네, 교수님.”

    초대 성녀 오를레앙이 따른다면 유피테르는 분명 특별한 존재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듣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타협한 게 교수라는 호칭이었다.

    “너와 카테리나를 델포이로 돌려보내 줄게.”

    “저희는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클리오나의 목소리에 서운한 감정이 잔뜩 들어갔다.

    마족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야 알았다. 하지만, 말이라도 좋게 해줄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의 싸움에 휘말린다면 단순히 죽는 거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세상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잔인해.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렴.”

    유피테르는 클라오나에게 아티팩트 하나를 던져주고 말을 이었다.

    “이건 아티팩트…인 건가요?”

    “그래. 언제든지 비밀 정원으로 올 수 있는 공간 이동 계열이지.”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카테리나는 말로 설득당할 아이가 아니니까 말이지. 만일의 사태에는 이곳으로 돌아와라.”

    아티팩트를 돌덩이 던지듯 주는 것도 의문이었지만, 다른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저 말은 델포이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델포이 가드들은 황실 근위대 수준만큼 강했고, 옴팔로스의 결계까지 복구된 상태였다.

    마족이 결계를 뚫었다곤 하나,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곧바로 공간 이동을 시켜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