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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30화 (230/265)
  • 비밀 정원(3)

    * * *

    연구 일지는 카르멘의 실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기애가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현학적인 문체였다.

    마치,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도 유피테르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촤르륵!

    유피테르의 눈은 손만큼 빨랐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는 일지의 내용을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여동생의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평소보다도 머리가 더 잘 돌아가야만 했다.

    “에키드나는 마왕의 씨앗이 마족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또한,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유사품이 여러 개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고작 이런 걸 위해 연구 일지를 찾은 게 아니었다.

    리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본격적인 내용이 필요했다. 저 정도의 말은 유피테르도 쓸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활자의 압박 속에서도 유피테르는 침착했다.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바로 넘겨버리는 과감함까지 발휘했다.

    바실리가 왜 유피테르를 칼리스토의 주인으로 점찍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드디어 찾는 내용과 비슷한 부분이 나타났다.

    “마왕의 씨앗이 다른 종족의 손에 넣어갔을 경우?”

    공교롭게도 정확히 리나의 경우와 일치했다.

    악의가 느껴졌다.

    누군가 이런 상황을 의도한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씨앗은 기본적으로 마족에게만 적응하고, 진화한다. 이외의 종족이 이것을 발견할 경우. 통째로 태워 존재를 말살하라.”

    찜찜한 내용.

    그럼에도 유피테르는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리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구정물에도 몸을 담글 용기가 있었으니까.

    “만약, 진품이 다른 종족의 손에 넘어갔을 경우 단 하나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건….”

    구절을 마저 읽은 유피테르는 연구 일지를 던져버렸다.

    휘이잉! 타악! 퍽!

    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행한 일지는 어딘가의 구석에 파묻혔다.

    종이와 서적이 워낙 많은 곳이어서 금세 모습을 감춰 버렸다.

    “웃기지 말라고!”

    유피테르는 마족의 극악함에 분노를 쏟아냈다.

    우웅!

    푸른 마나가 일렁거리며 주변을 위협했다.

    비밀 정원을 가득 메운 마나는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침묵했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다는 건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순간, 오흐트가 도착했다.

    “마스터! 지금 카테리나를 데려왔어. 옆에 리오나도 있길래 같이 왔는데 괜찮…. 왜 그래?”

    돌아왔다고 보고하려던 오흐트.

    그러나 마스터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다.

    “왔나. 오흐트, 아, 리오나도 있었구나.”

    “오랜만입니다. 유피테르 교수님.”

    “응응. 아무 문제 없이 잘 모셔왔다고! 대단하지?”

    클리오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오흐트는 언제나처럼 해맑았다.

    “수고했다.”

    유피테르는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카테리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초대 성녀인 오흐트의 실력을 불신하는 게 아닌, 그만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여전하군.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소식이었다.

    침대째 옮겨진 카테리나는 죽은 듯 잠에 빠져 있었다.

    마법으로 잠을 재운 건 아니었다. 몸이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면을 골랐을 뿐.

    혹시나 몰라 입가에 얼굴을 대보자, 호흡이 제대로 느껴졌다.

    이제 연구 일지의 내용을 직접 시도해야만 했다.

    “오흐트. 저기 있는 캡슐이 보이나.”

    “음. 아 저거? 저 수상하게 생긴 캡슐을 말하는 거지?”

    캡슐은 마도 공학의 산물 중 하나였으니 오흐트가 모를 리 없었다.

    환자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새로운 방법도 수용했기에.

    “그래. 그곳에 카테리나를 눕혀줘.”

    “씨앗을 제거할 방법은 찾은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마스터.”

    오흐트의 관심사는 오로지 ‘치유’였다.

    설령,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완전히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초대 성녀로 선택받은 이유였다.

    “아마도.”

    “아마도라니! 설마, 확신도 없는데 카리나를 데리고 오라고 한 거 아니지? 응? 아니라고 말해주라 제발.”

    끝내 울먹이는 오흐트의 말투에 유피테르는 시선을 피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처했다.

    연구 일지에는 분명히 모든 게 적혀 있었다.

    무려 에키드나와 함께 한 실험이었다. 그 방법이 먹히지 않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숙주를 가사 상태로 만들어 빼내는 방법이었으니까.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문제지.’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왠지 잘 차려진 밥상 같지 않냐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함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했다.

    “눈 돌리지 말고 대답해 줘!”

    유피테르는 오흐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한 마음가짐이었다.

    “방법은 있다.”

    “정말이지? 근데 왜 마스터답지 않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늙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어련하시겠어요.”

    오흐트는 픽―하고 웃으며 카테리나를 캡슐로 옮겼다. 유피테르와 클리오나는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

    * * *

    유피테르 일행은 카테리나가 들어간 캡슐을 정중앙에 두었다.

    왼쪽에는 클리오나가, 오른쪽에는 오흐트가 위치했다. 가장 가까운 앞쪽은 유피테르의 자리였다.

    딱히 지정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가 되었다.

    “유피테르 교수님.”

    흘러가는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클리오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카리나는 무사하겠죠?”

    유피테르의 눈빛에서 불안함을 읽기라도 한 걸까?

    클리오나의 입가는 파르르 떨렸다.

    그도 그럴 게 시간이 지나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카리나는 여전히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건 힘들지 않았다.

    그저 학생회장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교수가 아닌 리나의 오라버니로서 약속하지.”

    “그 말, 믿겠습니다.”

    유피테르는 클리오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리나는 원래 태양 같은 아이였지.’

    여동생에게는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황실 주최 파티가 열리면, 황녀를 제치고 늘 리나에게 시선이 모였다.

    은은한 달빛이 아닌, 타오르는 태양 같았다.

    이렇게 매력이 철철 넘치니 친구에게도 소중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감상에서 빠져나온 유피테르가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

    “마스터. 치료 방법은?”

    “연구 일지에 씨앗을 끄집어내는 방법이 적혀 있더군. 그걸 어느 정도 따라 할 생각이다.”

    “역시, 마스터야!”

    의심하던 자세가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오흐트는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딱!

    유피테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밀 정원의 모든 마나가 한곳으로 모였다.

    해바라기가 해를 쳐다보듯이.

    어둠이 드리워진 정원에서는 서로의 얼굴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방법인데 이러는 거야? 마나가 끊기면 캡슐이 고장 난다고! 설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

    “맞습니다. 카리나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흐트와 클리오나는 성국 크레이타 출신답게 환자를 먼저 생각했다.

    카테리나를 살리려고 하는 와중에 저런 행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나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필요한 치료법인 거야? 마스터의 마나라면 충분할 거 같은데.”

    “아니.”

    “그러면?”

    “죽이려고.”

    “그게 무슨―?”

    오흐트가 당황하는 사이 유피테르는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손짓 하나에 뭉치고 뭉친 마나들이 그대로 카테리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카테리나의 몸속에는 두 개의 마나가 똬리를 튼 상태였다. 마나 충격을 받으면 평소보다 더 위험했다. 생명에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마스터 미쳤어?”

    “교수님. 이건 아닙니다!”

    오흐트와 클리오나는 발작하듯이 움직였다.

    클리오나가 유피테르에게 뛰어가 그를 잡아 말리는 사이, 오흐트가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반지를 빼둔 것이지,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지를 않았다.

    늘 도와주던 신성 마나가 웬일인지 딴청을 부렸다. 이건 분명히 유피테르의 기술이었다.

    “정말 돌아버린 거야?”

    오흐트가 불같이 화를 내며 주먹을 날리려는 그 순간.

    번쩍!

    빛이 돌아왔다.

    동시에 유피테르가 모아두었던 마나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 마법을 해제했다고 해도 카리나에게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연약해서 뚝 부러진….”

    “오흐트. 잠깐만.”

    클리오나가 어깨를 톡톡 치자 오흐트가 물었다.

    “왜? 마스터에게 할 말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저기 좀 봐.”

    “응?”

    오흐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말도 안 돼.”

    카테리나가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쇼크로 인해 움직이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듯했다.

    심지어, 검푸른 마나까지 새어 나왔다.

    쨍그랑!

    거세져 가는 마나에 캡슐이 깨졌다.

    캡슐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자, 오흐트가 한 발 먼저 나서 방어막을 펼쳤다.

    “리오나 괜찮아?”

    “덕분에 무사해. 고마워.”

    안전이 확인되었으니 이제는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따져 물을 타이밍이었다.

    “이제는 이유를 알려주겠지? 그러리라 믿어.”

    “봐라.”

    때로는 여러 마디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이걸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깨진 캡슐 사이로 마왕의 씨앗이 서서히 떠올랐다.

    카테리나와 확실히 분리된 것인지 온전히 검은색인 마나를 뿌려댔다.

    “마왕의 씨앗은 어떤 종족이라도 완벽하게 동화하지. 강한 존재라면 누구라도 마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사 상태로 만든 거구나.”

    오흐트가 유피테르의 말을 받았다.

    마스터의 행동은 기생 유형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법과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의문이 하나둘 풀려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왕의 씨앗은 어떻게 할 거야?”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씨앗은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끝도 없이 마나를 방출할 뿐이었다.

    “굉장히, 기분 나쁜 마나입니다.”

    “마족의 마나니까 당연하지.”

    독과 같은 기운에 클리오나가 비틀거리자, 오흐트는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자, 클리오나는 머리를 숙였다.

    “고마워. 오흐트.”

    “뭘 이런 걸로?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

    오흐트는 미소를 지었다.

    교수의 이미지가 큰지 유피테르에게는 딱딱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친근하게 말했다. 특별해진 것 같아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할 거내고 물었나? 해답은 간단하다.”

    유피테르는 마나의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 그걸 본 오흐트와 클리오나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커졌다.

    “미쳤어? 그건 어느 사람이든 몸속에 기생한다고! 마왕이 되겠다는 헛소리라도 한다면 얼굴에 주먹을 날릴 거야.‘

    “맞습니다. 아무리 교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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