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29화 (229/265)

비밀 정원(2)

* * *

영상 크리스탈의 재생이 끝났다.

빛은 이미 힘을 잃었으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영상 속 내용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에.

숨이 막히는 정적을 깬 건, 유피테르였다.

“에키드나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카르멘에게 접촉했을 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왕비이자 마족 공작인 에키드나가 한낱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심지어, 먼저 다가오기까지 했다.

“저 내용이 사실이라면 달의 몰락을 일으킨 이유도 납득이 가.”

카르멘은 현실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초대 가주 나이아드의 경지를 노리는 거였다.

몰려있는 상황이니 에키드나가 보여주는 힘이 퍽 대단해 보였겠지.

무려, 태초의 마족 중 한 명이었으니.

“마족은 인간을 벌레처럼 생각하잖아. 굳이 다가온 이유가 뭘까. 생각나는 게 있어, 마스터?”

“글쎄…. 에키드나는 신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다고 라플라스가 그랬으니까 말이지.”

“감히, 레아 님의 자리를 노리다니. 웃기지 말라 그래!”

“워워. 진정해. 그렇게 화를 내봤자 너만 힘들다고.”

오흐트는 화를 가라앉혔다.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차분하기도 했고, 듣다 보니 맞는 말이었기에.

“카르멘은 이곳을 초대의 비밀 정원이라고 불렀어. 그렇다면 단서가 더 있을 거야. 찾아봐 줘.”

“알았어!”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흩어져 비밀 정원 수색에 착수했다.

그러나 한참을 뒤져도 그럴듯한 단서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티팩트는커녕, 초대의 기록물조차 중요한 부분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마스터, 하나도 없는데? 우리 전에 누군가 들어왔던 거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유피테르는 비밀 정원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아찔할 정도로 폭력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에키드나나 카르멘 둘 중 한 명이 여길 싹 치워버린 거 아닐까? 영상 크리스탈도 꽤 먼 후예를 위한 내용이었으니까.”

별다른 고민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오흐트. 하지만, 그걸 들은 유피테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봐.”

유피테르는 양해를 구한 뒤, 생각에 잠겼다.

‘달의 몰락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보자. 그럼 뭐가 필요하지?’

생각을 전환했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버렸다. 답이 나오지 않는 건 식이 틀렸다는 증거니까.

‘애초에 얼음성에는 카르멘을 막을 만한 마법사가 없었어. 여우라고 불리는 리테리아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달의 몰락.

그건 세아니아 대륙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한 마도사가 인간을 초월할 방법을 찾아냈다는 외침이었다.

얼음성이 부서지고, 아르테미스 가문이 몰락한 건 부차적인 거였다.

유피테르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드디어 뭐가 잘못되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유일한 변수는… 나인가.’

카르멘의 계획에 유피테르라는 존재는 들어 있지 않았다.

어디서 실종되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카르멘은 담담했다.

마치, 자신이 그 시각에 정확히 돌아온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흐트.”

“생각은 끝난 거야? 그러면 정답부터 알려줄래?”

평소의 유피테르라면 이 정도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믿었기에 오흐트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유피테르의 표정을 보자마자 질문을 바꿨다.

“무슨 일인데?”

“내가 귀환한다는 소식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되지?”

뜬금없는 질문에도 오흐트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마스터 본인과 칼리스토 정도일까?”

“그게 아니다.”

“그럼 뭘 물어보고 싶은 건데?”

“언제 어느 시각에 얼음성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너희들이 알고 있었냐고.”

오흐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나는 몰랐어. 마스터가 아르테미스 가문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들었지. 아, 그거랑 봉인을 풀 열쇠를 찾아 나설 거라는 건 추측할 수 있었어.”

바실리 님이 봉인될 날짜가 다가올 무렵.

마스터와 바실리 님은 둘만 아는 공간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자매들은 평소와 같이 임무를 수행했기에 그 장소를 알지 못했다. 극히 소수에게만 알려진 정보였다.

바실리 님께서 감옥에 갇히는 시각은 안다고 해도 마스터의 발자취는 비밀이었다.

봉인되자마자 떠날지, 아니면 조금 더 지켜볼지는 온전히 마스터의 마음에 달려있었으니까.

마스터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마스터가 언제 떠날지는 트리아 언니 정도만 아는 거 아니었어?”

“트리아와 테세라에게만 알려줬었다.”

“트리아 언니는 그렇다 쳐도 테세라 언니에게까지 알려줬다고? 그건 전혀 마스터답지 않은데?”

만에 하나.

그래, 만에 하나라는 질문에서 실수는 시작되었다.

바실리. 아니, 바실레이아를 잃었다는 지독한 상실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만약, 죽거나 함정에 빠진다면 누가 바실리를 구하지?

지금이라면 웃어넘길 이야기였으나, 그때는 아니었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전반적인 계획을 털어놓았었다.

트리아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고, 테세라는 마족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배신자가 누군지를 알아냈다.”

전화위복.

이 말처럼 과거의 실수 덕에 등을 돌린 자가 누군지 색출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아마 테세라일 거다. 거의 90% 확률로 말이지.”

“테세라 언니가 왜…?”

“나야 모르지. 마족 근처에 있어서 은근히 물들었을 수도 있어. 배신자의 마음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

끝맛이 씁쓸한 대화에 오흐트는 뒤를 돌았다.

놀람, 경악, 후회, 안도

여러 감정이 뒤섞여 찡그린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이럴 때 안도하다니. 최악이네, 나.’

두루두루 친하다고 하더라도 그중에 더 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오흐트의 테두리 안에 테세라는 없었다.

워낙 저택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마음을 열 기회도 적었다.

“믿었는데. 감히 바실리 님을 배신해?”

“지금은 참아. 그 분노는 배신자들 앞에서 터트려도 부족할 테니.”

“아니 그치만…. 이게 말이 돼? 바실리 님과 마스터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걸 뻥―차버린 거잖아.”

유피테르의 달램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칼리스토의 일이 힘든 건 맞았다. 평범한 이었다면 견뎌내지 못할 강도였다.

그러나 신의 딸인 바실리 님께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이건 그분에 대한 모욕이었다.

오흐트는 타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일 먼저 보이는 걸 냅다 걷어찼다.

킹! 팅! 데구르르르!

단검 하나가 시원하게 날아가 여기저기 부딪치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 * *

“오흐트. 여긴 단서로 가득한 곳이다. 화가 나도 멋대로 행동하면 곤란해.”

“마스터!”

“그렇게 급히 불러도 넘어가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네 버릇을 고칠 때야.”

“그게 아니라 이걸 보라고!”

짐짓 화난 척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던 유피테르.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주려고 하다 의외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마왕의 씨앗이야.”

“뭐?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나야 모르지.”

카테리나의 심장을 좀먹고 있는 정체불명의 폭탄.

그것과 완전히 같은 게 이곳에 있었다. 심지어, 결계가 외부의 위험을 전부 차단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의 영상 크리스탈처럼.

“오흐트. 리나를 데려와.”

마왕의 씨앗을 보자마자 유피테르가 명령했다.

“뭐?”

“일단 데려와.”

“미쳤어? 그 애를 잘못 건들면 위험해질 거라고 말했던 건 마스터잖아! 환자를 그렇게 대한다면 이유라도 알아야겠어.”

어울리지 않게 강짜를 부리는 유피테르. 오흐트가 이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오흐트는 환자에게 늘 진심이었다.

또, 델포이에서 지내면서 카테리나와도 꽤 친해진 상태였다.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설명해주지는 않는 거야? 설마, 나도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오흐트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유피테르는 곧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리나는 갑자기 쓰러졌던 거 기억하지?”

“응응. 나조차도 병명을 확인하지 못했지. 카리나의 마나와 마족의 마나가 충돌하는 것만 보였으니까.”

“마왕의 씨앗이 여러 개라는 말은 둘 중 하나가 모조품이라는 의미가 돼.”

“어째서?”

“시트시거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씨앗을 되찾으려고 했거든.”

카테리나의 몸에 마왕의 씨앗이 심어졌다는 걸 안 시트시거는 옴팔로스를 다그쳤다.

옴팔로스가 델포이 계획의 중추였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하필 리나의 몸에 그게 들어가다니. 차라리 내 몸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모조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법사로서의 수명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

세상 전부가 적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오히려 진짜인 게 다행일지도 몰라’

진품이라면 적어도 눈에 띄는 부작용이 없을 듯했다.

마왕의 씨앗은 차기 마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시스템이었다. 지도자에게 나쁜 짓을 하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같은 성질을 지닌 게 두 개니까 이번에는 해결방법이 보일지도 몰라.”

마왕의 씨앗이 있다는 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연구 일지가 분명히 있을 거였고, 그게 꼭 필요했다.

이곳에 왜 씨앗이 있는 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말 믿어볼게.”

오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테르가 얼마나 리나를 아끼는 지 알았으니까. 굳이 슬픈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기다려. 금방 돌아올테니까.”

우웅!

공간 이동을 사용해 사라졌다. 칼리스토의 일원다운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마법이었다.

혼자 남은 유피테르는 비밀 정원을 샅샅이 뒤졌다.

“이건 아니야. 이것도 필요 없어.”

워낙 방대했기에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현재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킬 정도로 중요한 자료들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마도학의 이해. 마왕학 개론. 마족학의 정석. 마왕의 씨앗 연구일지. 아, 이거로군.”

기나긴 씨름 끝에 유피테르는 결국 연구 기록을 찾아냈다.

그는 서가 옆에 자리를 잡고 연구 서적을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압도적인 지능이 빛을 발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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