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얼음성으로(2)
* * *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지?”
아리엘은 가주의 책상으로 돌아와 크리스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우웅!
가주 집무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쇼파 두 개가 생겨났다.
아리엘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와! 성공했네. 유피테르. 그리고 오흐트? 그쪽도 편하게 앉아요. 쉽게 끝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럼 저는 차를 내올게요.”
“고, 고,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판을 내려줬는데, 유피테르가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었다.
‘달의 몰락’ 이후 아르테미스 가문은 여타 다른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으니까. 이전처럼 증오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단맛이라니…? 빌어먹을 아버지의 흔적을 닥치는 대로 지우기라도 한 건가?’
티세트가 비치된 쪽으로 이동한 유피테르의 눈에 변화가 포착됐다.
카르멘은 산미를 좋아해 씁쓸한 뒷맛을 추는 차를 주로 배치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달달한 차만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아리엘의 취미가 듬뿍 반영된 듯했다.
유피테르는 묵묵히 차를 내렸다.
그가 가진 것보다는 아니지만, 티포트도 찻잎도 이견 없는 최상품이었다.
능숙한 손놀림에 금세 차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저 아티팩트 우리 저택에도 있는 건데! 구하기 힘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마스터?”
오흐트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명색이 조디악의 마도사였으니 이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에키드나가 도와줬을 수도 있지. 마족 무기를 가졌을 때부터 연합했을 텐데.”
유피테르는 잘 우려낸 차를 찻잔에 조심스레 따랐다. 그리고서는 테이블로 돌아오며 대답했다.
마법이 있었기에 세 개의 잔을 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아! 마족이 있었지.”
“고대 시절에는 아티팩트가 귀하지 않았다고 바실리가 그랬잖아.”
“응응. 기억나.”
원하는 아티팩트를 찾는 건 우물에서 스프를 찾는 거나 다름없었다.
던전에서 발굴된 아티팩트는 극히 소량이었으니까.
하나하나가 귀중품으로 여겨져 어지간한 돈으로는 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대 시절부터 살아온 마족은 꽤 많은 양의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계속되자 아리엘이 나섰다.
“아들? 이제 이야기를 해줄 거니?”
“아.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간략하게 설명해드릴게요.”
유피테르는 바실리와 관련된 부분을 빼고 거의 다 이야기했다.
그가 세계의 균형을 다스리는 조율자라는 것부터, 칼리스토라는 부하들이 있는 것까지.
군데군데 빠진 이야기가 있었으나 아리엘은 별다른 내색 없이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이곳에 카르멘이 숨겨둔 무언가 있다는 거니?”
“아마도요.”
“마스터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다구요! 한 번 믿어봐 주세요!”
붙임성 좋은 오흐트는 어느새 아리엘의 옆으로 이동해 친딸처럼 굴고 있었다.
아리엘은 흐뭇한 표정으로 오흐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카르멘이 뭘 숨긴 건지는 아무것도 모른단다. 배신한 것조차 몰랐으니까….”
아리엘의 말투에서 씁쓸한 느낌이 나자 유피테르는 바로 움직였다.
“괜찮아요. 짐작이 가는 곳이 몇 군데 있거든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네, 저번에 왔을 때 얼음성을 전부 훑었었거든요.”
“우리 아들 대단해졌구나?”
유피테르를 바라보는 아리엘의 눈빛은 봄 햇살처럼 따듯했다.
‘정말로 다 컸구나….’
유피테르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낸 카테리나와 제이스란과 늘 비교가 되었으니까.
심지어, 황실 주최 파티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에 휩쓸리기까지 했다.
아리엘은 유피테르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젊었을 적 카르멘을 똑 닮은 외모였다. 다만, 차갑기라기보다는 조금 더 선이 가늘었다.
‘그 사람을 닮긴 했어도, 넌 그 사람이 간 길을 걷지 말렴.’
가지고 있는 재능에, 아니면 끝없는 욕망에 삼켜진 건지는 몰랐다.
다만, 대견한 큰아들이 카르멘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일수록 그 힘에 휘둘리는 자들이 많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요. 오흐트는 대단한 치료사니까요.”
“어? 아, 맞아. 엄마는 우리 유피 믿어.”
훅 치고 들어온 유피테르의 말에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못다 한 근황 이야기를 이어갔다.
반년 만에 만났기에 서로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모든 걸 이야기해준 거니? 엄마는 딱히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유피테르의 귀환을 눈치챈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피를 이었기에 결계는 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 애초에 한 번 등록된 자들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위병들은 새벽에도 근무를 섰고, 만일을 대비해 마법사단의 일부도 깨어 있었다.
마법사단의 수준이 내려갔다고 해도 침입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를 않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지녔는데, 굳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이곳에 왔다는 걸 비밀로 하기 위해서예요.”
“지금의 네 실력이면 마족들도 잡을 수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럼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건 가뿐하잖니.”
유피테르는 곧바로 아리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제 동선을 숨기는 건 간단해요. 하지만, 얼음성에서 무슨 일이 날 수도 있잖아요?”
“그걸 덮어주는 게 이 엄마의 몫이라는 거구나?”
아리엘은 유피테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빠르게 이해했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출중했다.
정략결혼이었긴 했으나, 까다로운 카르멘이 결혼을 받아들일 정도였다.
이곳에 온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유피테르는 천천히 운을 띄웠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게? 더 마시지. 차라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지금 이러는 사이에도 적들이 뭘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시간은 제 편이 아니에요, 어머니.”
아리엘이 아쉬운 티를 팍팍 냈지만. 유피테르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홀짝홀짝 차를 마시던 오흐트가 아리엘을 도와줬다.
“마스터. 그건 내일부터 해도 되잖아. 하루 늦는다고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는다구!”
그러나 유피테르의 결심은 확고했다.
“칼리스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디저트나 과자는 입에도 대지 못할 줄 알아.”
“으극!”
디저트 없다는 초강수에 오흐트의 행동이 빨라졌다.
남아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유피테르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보다 무서운 말은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또 봐요.”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데리고 사라졌다.
난생처음 보는 공간 이동 마법이었으나, 놀라지 않았다. 이미 들은 게 있었기에.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렴.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해.”
* * *
공간 이동을 사용해 도착한 곳은 얼음성의 지하였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 텅텅 비었어. 보통 지하는 창고로 쓰이는 거 아냐?”
“보통은. 창고로 쓰이는 곳은 따로 있어. 이전에는 모르지만, 아버지 대에는 비워둔다고 들었어.”
“그러면?”
“본성과 그 주변에 있는 건축물들을 전부 통틀어 그렇게 부르는 거지. 사람들의 말이 와전되어서 그렇게 인식된 거야.”
“그렇구나….”
간단한 대화 후, 유피테르는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지하는 어지간한 평야만큼 넓었는데, 빛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나 감지로 유피테르의 뒤를 따라가던 오흐트는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했다.
“마스터. 여기 원래 어두워? 그냥 빛 마법 하나 사용하면 되잖아. 이렇게―.”
오흐트가 가벼운 빛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자 유피테르가 바로 막았다.
“뭐야! 왜 막는 건데?”
“이 어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빙빙 꼬지 말고 그냥 말해줘. 시간이 없다면서!”
“이 어둠은 결계 마법의 효과지. 혹시라도 마나에 반응할지도 있잖아? 그래서 조심하는 것뿐이다.”
역시 마스터는 다 생각이 있었다.
오흐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한참을 걸어간 유피테르는 검음을 멈추더니, 벽 한곳에 손을 갖다 댔다.
“여긴가?”
우우웅!
형형색색의 마법진이 지하를 가득 메웠다.
그간 봤던 어둠이 전부 환영이라는 듯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제는 마나 감지가 아니라 눈으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마스터 이건, 고대 마법진 이잖아?”
“맞아.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야. 카르멘의 실력이 이 정도였다니 믿을 수가 없군.”
마법진은 천천히 회전하며 한 곳으로 마나를 쏘아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의 시선은 자연스레 마나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다.
마나가 멈춘 그곳엔 동상 하나와 거대한 문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상에 유피테르가 중얼거렸다.
“초대 가주의 동상?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오흐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초대 가주가 만든 성이니까 이곳에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하지만, 이 마나는 분명 카르멘의 거라고.”
“그럼 들어가 보면 되는 거 아닐까?”
오흐트는 말이 끝나자마자 문 쪽으로 달려갔다.
힘차게 발을 뻗으면서도 신성 마나를 주먹에 모았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문을 후려쳤다.
지이이잉!
매서운 기세의 공격이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었기에
“아오, 더럽게 아프네. 진짜.”
오흐트는 손을 탈탈 털며 돌아왔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작정 공격하래? 그 버릇 좀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무작정 공격하는 게 먹힐 때도 있잖아?”
“지금은 아니잖아. 일단 어떻게 반응하나 보자고.”
툴툴거리는 오흐트를 뒤로 화고 유피테르는 마법을 준비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푸르게 빛나는 화살들은 유피테르의 위에서 만들어져 그대로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음 화살 역시 결계를 뚫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결계를 얼어붙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결계에 부딪쳐 사라졌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나듯이.
“뭐야. 마스터도 똑같잖아.”
오흐트가 실망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유피테르가 뭔가 보여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어, 어라?”
그 순간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지자 오히려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저런 경우 대부분 함정이었으니까.
“어떻게 할 거야 마스터?”
“이럴 때야말로 네 말을 지킬 타이밍이 아닐까?”
“그게 무슨―?”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뭐, 뭘 하려는 거야?”
전에 없던 행동에 오흐트는 당황했다.
유피테르는 늘 칼리스토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행동했었다.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친 적은 극히 적었다.
“뭐 하긴.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에?”
유피테르는 싱긋 웃으며 당황한 표정의 오흐트를 이끌고 비밀 공간의 안쪽으로 향했다.